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97화 (697/1,277)

##  697화

근처 벤치에 잠깐 앉자고 제안했다.

잠깐 벤치까지 걷는 그 몇 걸음 사이 난 그녀가 할 만한 질문이나 내 대답 등을 모두 생각해 두었다.

그리 어려울 건 없었다. 어제 오후는 물론이고 밤에도 잘 자서 그런지 머리도 맑다.

세연 역시 내 뒤를 따르며 생각들을 정리한 것 같다. 벤치에 나란히 앉자마자 그녀가 내 쪽을 휙 돌아보며 물었다.

{정확히 무슨 일로 교수님이랑 만나게 된 거야? 나 그게 궁금하더라고. 연주회 일 아니면 접점도 없을 것 같은데.}

{……교수님에게 여쭈어보시지 않으셨나요?}

{응. 아예 전화도 안 드렸어. 놀라게 해 드리고 싶어서.}

세연은 내친김에 그런 장난도 하기로 한 것 같았다. 행동력 하나는 정말 대단했다.

{많이 놀라실 텐데요…….}

{이미 왔는데 어떻게 해? 괜찮겠지. 아무튼 그래서, 정말 우연히 뵙게 된 거야?}

마냥 낙천적인 목소리를 들으니 그녀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세연의 행동을 이래라저래라할 순 없으니 묻는 이야기에 대답이나 해 줘야 할 것 같다.

난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연이라면 우연이겠죠.}

{세상이 아무리 좁다 해도 그건 너무 엄청난 우연 아냐? 난 분명 무언가 필연성이 있다고 생각해.}

{필연이요……?}

{같은 음악계에 있는 사람들만 겪을 수 있는 거.}

세연은 무언가 낭만적인 뉘앙스로 그런 말을 했지만, 나는 조금 더 엄격하고 신학적인 운명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나와 인연이 있을 세상에 몇 안 될 사람들과 마주하게 되는 건 그녀 말대로 필연에 가까운 일이겠지. 아무 예상도 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 어쩌면 작년 겨울, 세연을 만났을 때부터.

{맞아요.}

{정말?}

{예. 세연의 교수님은 이번 연주회의 예술감독으로 모시게 된 거예요.}

세연에게도 말해야 할 때였다.

난 그녀 쪽으로 살짝 몸을 돌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 주었다.

내가 협연 경험을 쌓기 위해 대타 연주자로 이곳에 온 것, 박 교수님은 예술감독을 제의받았으나 지휘자님의 재량으로 취소되고 내가 그 직책까지 맡게 된 것, 그리고 어제 티켓까지 취소할 순 없어서 일찍 블라디보스토크로 온 교수님과 마주하게 된 것까지.

특별히 문제가 있다는 느낌은 전혀 없이 온전히 사실만을 전해 주었다.

내 목소리에 집중하면서 고개만 주억이던 세연은 이야기가 끝나자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잠깐만…… 정말?}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해! 타티아나!}

갑자기 세연이 내 팔을 덥석 붙잡았다.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좌우로 그리고 위아래로 마구 내 팔을 흔들어 대기만 한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긴 했지만 나와 달리 밝고 긍정적인 세연을 예측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다. 이렇게 열렬하게 축하받을 줄은 몰라서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든다.

세연의 축하에 크게 반응하지 않고 있자 그녀는 곧 팔을 흔들길 멈추었다. 초롱초롱한 눈빛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난 무어라 말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미리 생각했던 질문을 꺼냈다.

{……정말 괜찮나요?}

{그럼, 말이라고 묻니? 난 네가 피아노로 다른 기악 파트도 다룰 줄 안다는 걸 알아. 지휘자님도 그걸 알아보신 거겠지.}

{그래도…….}

{왜 그래? 설마 교수님이 네가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하실까 봐?}

상당히 적나라한 표현이어서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세연은 헤실거리며 웃더니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전혀 아닐걸? 오히려 자랑스러워하실지도.}

{……자랑스러워하시다니, 왜요?}

만약 내가 아니라 세연이 같은 상황이었다면 교수님도 분명 그러셨겠지. 하지만 지금 난 교수님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었다. 그 상황을 이해하셨다 하더라도 자랑스러워할 이유는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세연의 생각은 달랐다.

{국적도 다르고 선생님이 달라도 음악가라는 건 같잖아? 교수님은 겨우 열여섯인 네가 예술감독을 맡았다는 걸 분명 음악계 선배로서 기쁘게 생각하실 거야. 그건 내가 장담해 줄게.}

{…….}

{이전부터 널 눈여겨보시기도 했으니까…… 더더욱 그럴걸. 물론 청중석에서 평가는 혹독하게 하시겠지만…….}

온갖 생각들로 가득하던 내 머리는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

평소 난 세연이 말하는 것처럼 생각해 왔다. 모든 게 달라도 같은 음악을 공유한다면 음악가로서 엮여 있다고 할 수 있다고. 그리고 그건 다름 아닌 교수님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교수님은 이전부터 날 세연과 같은 나이의 러시아 연주자로서 흥미를 두고 계셨다고 했다. 그 시점에서 이미 완전한 무관계성이란 성립하지 않았다.

난 끊어내야 할 미련을 의식하고 있었기에 반대 입장을 생각해 보지 못했지만, 이제 와서 그날을 떠올려보면 교수님은 분명 날 보고 당혹스러워하거나 어려워하지 않고 조금은 반가워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데도.

내가 더 어른스럽거나 똑똑했다면……. 그런 뒤늦은 후회가 조금 찾아든다.

내 표정을 보던 세연은 나름대로 상황을 유추해냈다.

{그런데 자세히 이야기하기 복잡하다는 건 이해가 가네. 네 입장에선 곤란했겠다. 그치.}

곤란해하지도 못하고 그저 필사적으로 정상인을 연기했을 뿐이었다. 내가 얼마나 못난 사람인지 그녀에게 설명하자면 끝도 없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니 세연이 다 이해한다는 듯 웃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한 그녀는 몸을 길게 펴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나저나…… 사실 너만 괜찮다면 다 같이 식사라도 하면서 인사하면 어떨까 싶었는데……. 네가 불편해할 만한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네.}

세연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것 같다. 하지만 왜 그런 걸 원하는진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이 애가 왜 식사자리를 원하는 걸까?

그런 자리를 무조건 피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이 또한 내게 주어진 어떠한 필연이라면 마주할 생각이 있었다. 망령이자 예술감독으로서 어려움을 느끼는 건 언젠가 극복해야 할 문제였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나와 교수님 사이에서 무엇을 원하는 것이라면…… 난 아무것도 줄 수 없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려놓고 세연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는 내 시선은 그리 신경 쓰지 않는지 다시 한번 기지개를 켜고는 시원스레 말했다.

{어쩌지…… 그럼 당분간은 할 게 없네. 그냥 혼자 돌아다녀 볼까.}

{혼자요?}

{응? 응.}

왜 지금까지 하던 이야기에서 세연이 혼자 여행하는 것으로 결정이 된 거지?

당연히 그녀가 나 없이라도 교수님을 만나러 가서 깜짝 놀라게 해 드릴 것이라 생각했던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연은 그녀 나름의 이유를 말해 주었다.

{네 연주회 보러 온 거잖아? 교수님 만나면 자연스럽게 네 이야기도 하고 그러려고 했는데…… 일단 연주회 끝날 때까진 미루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아.}

{교수님이랑 단둘이서 보긴 싫은 것도 있고.}

{……예?}

상상도 못한 이야기에 당황해서 되물었다.

순간 불안한 생각이 번져 나갔다. 그간 세연과 교수님의 사이가 좋을 것이라 생각해 왔지만 근래 들어 어떻게 되었는진 잘 모른다. 교수님이 세연에 대해 따로 무어라 하셨던가?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수척해 보이던 교수님. 그리고 대놓고 단둘이선 싫다고 하는 세연.

놀라게 해 드리려고 아예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것도 일련의 핑계일지도 모른다.

내가 휙 돌아보자 세연도 눈을 깜빡였다. 왜 그렇게 보냐는 것 같다.

혹시라도 잘못된 목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어째서 피하려 하시나요?}

{어? 음…… 그냥?}

{…….}

냉정하게 세연과 교수님에 대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켜볼 생각이었는데, 무언가 대답을 피하려는 것 같은 세연을 보며 난 이전까지의 규칙을 조금 미뤄 두기로 했다.

{그러지 마세요. 연락드리세요.}

울적하고 수동적이었던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다.

세연이 어떠한 변덕을 부리고 있는진 모르지만, 나 또한 평정을 지키는 선에서 변덕을 부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내 목소리가 조금 차가웠는지, 세연은 놀란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조금 달래는 투로 이어 말했다.

{무슨 일이신진 모르겠지만…… 알겠어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갑자기 만날 이유가 필요하시다면 제가 함께 해 드릴게요.}

{저기…… 타티아나, 난 널 이유로 삼겠단 생각 같은 건 한 적 없어.}

{무엇이든 상관없어요. 연주회까지 시간이 남았는데도 일찍 오신 건 세연이 바랐던 것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지 않은가요?}

아예 직설적으로 말해 버렸다.

세연은 나나 교수님에게 어떤 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와 있는지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고 찾아왔다. 심지어 연주회까진 며칠이나 남았는데.

내가 그 부분을 지적하자 세연은 한숨을 내쉬더니 중얼거렸다.

「사정도 모르고 무작정 와 버려서 다른 변명을 할 수가 없네…….」

세연이 생각하기에도 지금 다른 말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건 분명한 것 같았다.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녀의 말을 기다리자, 이윽고 그녀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바랐던 것…… 가까운 곳에서 네 연주회가 열린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이긴 하지만, 사실 그것뿐이었다면 이렇게 일찍 오진 않았을 거야.}

혹시나 내가 기분 나빠할까 눈치를 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건 이미 그녀가 바로 오겠다고 전화로 말했던 시점부터 알고 있었던 부분이었다.

가만히 바라보자 세연이 작게 말했다.

{솔직하게 말할게. 교수님과 네가 피아노 이야기를 하는 걸 옆에서 보고 싶어.}

말하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운지 목소리는 작았지만 눈은 제대로 날 보고 있었다. 정말 다른 이유는 없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로이지만 여전히 이유는 모르겠다. 난 그녀의 생각을 조금 더 알아보기로 했다.

{그저 보고 싶으실 뿐이신가요?}

{이상하지?}

{이상하다기보단…… 왜 그런 생각을 하시는지 알고 싶어요.}

내 질문에 세연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음…… 타티아나, 혹시 좋아하는 작가나 영화감독 있어?}

엉뚱한 질문이었지만 일단 그녀에게 따라 주기로 했다.

{근래 읽은 작가로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프랑수아즈 사강이 있어요.}

{어, 어려운 책 읽네…….}

{그렇지도 않아요.}

{아무튼, 두 사람이 만나서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상상해 보면 어때?}

{……?}

잠시 생각해 보니 정말 초현실적인 장면이었다.

일단 두 사람은 시대도 안 맞고 국적도 다르다. 다루는 언어나 문학적 주제도 다르니 정말 작가라는 점 말고는 비슷한 점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모든 현실적 문제들을 치워 놓고, 조용한 커피숍에서 두 거장이 테이블을 두고 앉아서 문학에 대한 토론을 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한 기분이 들었다.

프랑수아즈가 스스로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사형수가 되어 총살당할 뻔했던 이야기를 할까?

혼자 그런 생각에 빠져 있던 난 세연의 비유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비슷한 이유야. 내 세계에서 제일 존경하는 교수님과 제일 존경하는 친구가 한 자리에서 나누는 피아노 이야기가 듣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거든.}

세연이 말하는 존경respect이란 단어가 지닌 넓은 맥락을 보면 나와 교수님을 동급으로 놓는 것은 아닐 테지만, 그녀가 날 그만큼 진지한 연주자로 보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내가 아주 못하고 있진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바라보니 세연은 양손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상한 이유라는 건 알아.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와 사강의 대화처럼 상상에서 그치지 않고 가능한 일이긴 하잖아?}

{가능한 일이죠…….}

{응. 그냥 그런 바람이 조금 있었어. 그런데 네가 불편하다면 거기서 끝이야. 더 권유할 생각은 전혀 없어.}

세연은 자신의 상상 속에 있는 장면을 현실로 이끌어내는 데에 적극적이지만, 상상이 아닌 진짜 현실의 사람에게 막무가내로 굴진 못한다.

난 발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여전히 편하진 않다. 하지만 세연이 말해 준 솔직한 이유가 어느 정도 날 설득했다. 현실성이 있다는 건 옳은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리고 그녀뿐만이 아니라 나 역시 같은 자리에서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저도 세연이 있다면…… 괜찮을 것 같아요.}

세연이 나와 교수님이 피아노 이야기를 하는 걸 보고 싶어 한다면, 난 지금 교수님과 세연의 사이가 어떤지 보고 싶었다.

어째서 단둘이 보기는 싫다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아야만 했다.

이렇게까지 신경 쓸 자격이 없다는 건 알지만…… 세연의 바람을 들어주면서 겸사겸사 알 수 있게 될 것이란 교묘한 생각이 들었다.

변명을 쌓아 결정을 내린 내가 말하자 세연이 물어보았다.

{불편하지 않겠어?}

{처음 알았을 땐 약간 혼란스러웠지만 괜찮아요.}

{쿨하네. 그런 건 좋은 것 같아. 내가 네 입장이었다면 부담감 때문에 아무도 만나기 싫었을 텐데.}

전혀 쿨하지 않았지만 그냥 웃음으로 넘겼다.

세연은 자신 때문에 내가 무리하고 있진 않은지 걱정하는 눈치였지만, 이윽고 그대로 하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화한다?}

{예.}

점심시간까진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바로 의향을 여쭈어야 할 테지.

난 비스듬하게 다리를 꼬면서 전화를 거는 세연을 바라보았다. 목적도 분명하고 준비할 시간도 충분했다. 약간 긴장은 되지만 견딜 만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