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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698화 (698/1,277)

##  698화

세연이 전화를 하는 사이 나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지만 온 신경은 그녀가 하는 말로 향하고 있었다.

난 지금까지 세연과 교수님이 어떤 사이인지 각자에게 간접적으로 듣기만 했다. 단지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안도했는데, 정말로 어떤 분위기인지는 지금에서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네. 놀라셨죠? ……아 정말요?」

그런데 세연은 정말 환하게 웃으며 교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뭔가 훨씬 더 친밀한 느낌이다.

직접 사사하는 분이긴 하지만 나이가 세 배도 넘는 음대 교수님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이렇게까지 밝을 수도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두운 생각을 하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러면 단둘이 만나긴 싫으니 혼자 돌아다녀 보겠단 말은 뭐였지? 세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

난 잠자코 세연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와 있음을, 그리고 나와 만나서 놀고 있다고 말하고는 친구로서 소개해 드리고 싶다고 전했다.

이렇게 듣고 있자니 세연의 이야기는 상당히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전화를 마친 세연이 날 바라보았다.

{오래 기다렸지? 미안, 교수님이 이래저래 묻는 게 많으셨어.}

{……놀라게 해 드리겠단 계획은 성공하신 건가요?}

{성공이고말고. 아, 재밌네. 평소엔 교수님을 이렇게 놀라게 할 기회가 없잖아?}

밝은 미소로 답한 그녀는 벤치 아래로 다리를 흔들거리면서 흥얼거리듯 말했다.

{어…… 점심식사 하자고 하시네. 위치는…… 아 메시지 왔다. 음, 서쪽 해변에 있는 해산물 레스토랑이야.}

{해산물이요?}

{응. 어…… 혹시 별로 안 좋아하니?}

{아뇨, 괜찮아요. 위치를 보여 주시겠어요?}

{여기.}

그녀가 보여 준 화면엔 내가 가고자 했던 레스토랑의 위치가 찍혀 있었다.

이런 것도 우연이겠지만, 난 이곳이 세연과 전화할 때 식사했던 곳이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럼…… 갈까요.}

{그래, 바로 오신다니까.}

세연이 활기차게 먼저 벤치에서 펄쩍 뛰어 일어났다.

레스토랑까진 걸어서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해변 공원으로 향한 뒤에 바다를 구경하며 길을 따라 걷는다. 세연은 그렇게 산책하듯 걷는 것만으로도 즐거운지 재잘거리며 앞장섰다. 난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레스토랑에 도착해서 예약된 자리를 찾아갔다.

의자에 앉아서 잠시 바다를 보고 있자니 웨이터가 와서 메뉴판을 내밀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러시아어 질문에 세연이 내 쪽을 바라보았고, 난 그녀에게 일단 무언가 마실 것부터 주문하자고 제안했다. 잠깐 걷느라 목이 마르기도 했고.

세연도 나도 레모네이드를 원했고, 난 웨이터에게 전했다.

“레모네이드 두 잔 주시겠어요? 일행이 한 분 더 오시면 그때 메인을 주문할게요.”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고개를 까딱이며 주문을 받아간 웨이터는 체감상 30초도 안 되어서 우리 앞에 레모네이드를 내어주었다. 보기 드문 빠른 서비스였다.

음료를 받자마자 한 모금 마신 세연은 테이블 위로 반쯤 엎드리며 말했다.

{시원해, 살 것 같다……. 바다도 보이고 정말 좋네.}

시차가 있거나 하진 않으니 적당히 자긴 했겠지만, 배를 20시간이나 타고 왔으니 피로가 조금 쌓여 있는 듯했다. 그 피로를 이 레모네이드로 날려 버리겠다는 듯 세연은 빨대를 물고 홀짝거렸다.

기분이 조금 느긋해진 것 같은 그녀를 보면서 난 묻고 싶던 부분을 살짝 물어보기로 했다. 지금이면 괜찮을 것 같았다.

{세연, 한 가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응? 뭔데?}

{교수님과 사이가 별로 안 좋으신가요? 미리 알아 둬야 할 것 같아서…….}

난 상황에 대해 잘 모르지만 앞으로 분위기 파악 정도는 해야겠다는 어투로 그렇게 말했더니, 세연이 물고 있던 빨대를 뱉더니 경악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세연은 양손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내가 교수님이랑 왜? 아까 말했잖아? 너랑 같이 이야기하는 걸 보고 싶을 정도라니까?}

{그렇지만 단둘이서 보는 건 싫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왜 피하시냐고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으시고…….}

세연이 그렇게 답한 탓에 내가 비관적인 생각들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지금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도 직접 두 눈으로 보기 위함이었으니.

아까 전화통화를 하는 모습을 보곤 어쩌면 오해겠구나 싶었지만 교수님이 오기 전에 그녀에게서 이유를 듣고 싶었다.

내 말을 듣고서야 세연은 오해라는 듯 머뭇거렸다.

{아, 그거…….}

{무슨 이유라도?}

{그게…… 아, 창피해 정말…….}

한참을 중얼거리던 그녀는 날 정면으로 보지 않으려는 듯 의자에서 몸을 돌려 비뚜름하게 바닷가 쪽으로 앉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교수님이 저번 주에 내 주신 숙제랑 과제곡이 있거든.}

{……예?}

{지금 단둘이 만나면 분명히 내 얼굴 보자마자 그건 어떻게 하고 왔냐고 캐물어 보실 거란 말야. 나 죽을지도 몰라. 정말로.}

{…….}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의 영어를 다시 차근차근 해석했다.

한참 지나서야 난 다시 물어볼 수 있었다.

{잠시만요……. 그러니까, 숙제 검사를 하실까 봐 무서우시다고요?}

{어…… 출발하고 나서야 그걸 알았지 뭐야.}

세연은 나와 교수님을 만나러 가까운 블라디보스토크는 금방 갈 생각을 했지만, 이게 방학 중에 잔뜩 받은 숙제를 내팽개쳐 놓고 여행을 가는 것과 똑같다는 건 나중에서야 떠올렸던 것이다. 당연히 교수님과 마주하면 그 말이 나오지 않을 리 없다.

난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된 일인지 이해하고 나니 비로소 완전히 안심이 되었다.

세연에겐 큰일이라서 불안해하는 것 같았지만, 할 일을 미뤄 두고 놀러나가는 건 그녀 나이대의 학생들이라면 으레 할 법한 일이었다. 그리 큰 잘못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물론 되도록 음악에 집중해 주었으면 하지만…… 의무적으로 학생들을 피아노 앞에 앉혀야 하는 선생님들이라면 모를까, 내가 무어라 할 일이 아니다.

나처럼 연습광 소리를 들으며 매달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하루에 적은 양의 연습만으로도 충분한 퍼포먼스를 뽑아내는 재능 있는 연주자들도 많다. 그런 건 개개인마다 달랐다.

그렇게 대충 납득하고 있는데 세연은 사족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런 거 신경 쓰면 애초에 못 왔을걸? 그래서 아마 내 뇌가 출발 직후까지 의도적으로 숙제는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나 봐. 대단하지 않아?}

{그건 좋은 게 아닌데요…….}

어떠한 계획이나 자각이 아예 없는 건 조금 문제 아닌가요?

약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세연이 움찔하며 의자 뒤로 몸을 젖혔다. 가르치는 것처럼 굴지 않으려고 의식하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무서운 선생님을 보는 눈빛이었다.

{……네가 그렇게 말할 것 같아서 말 안 하려 했어.}

{그러면서도 제가 옆에 있으면 절 핑계 삼아 세연 본인의 이야기를 쏙 빼놓고 빠져나오려 하신 거고요?}

{타티아나…… 무서워.}

{……하.}

어쨌든 그녀의 귀여운 핑계를 듣고 나니 온몸에 힘이 쭉 빠진다. 그냥 바로 이유를 물어볼 걸, 혼자 안 좋은 생각을 하던 나도 참 바보같다.

한숨을 쉬며 레모네이드로 목을 축이자 세연은 조금 더 솔직해진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아무튼, 요즘 들어서 부쩍 숙제가 많아졌어. 내년 준비라는 건 알겠는데…… 뭔가 느낌이, 느낌이 다르다니까?}

교수님은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땐 정말 무섭게 가르치시는 분이시다. 세연은 요즘 들어서야 그 점을 느끼는 듯했다.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래서 요즘 힘드신가요?}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기분은 좋아.}

약간 의외의 대답이었다.

분명 힘들다고 칭얼거리며 내게 하소연을 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방금 전 어린애처럼 숙제 안 하고 도망 와서 혼나기 싫다고 하던 그녀는 온데간데없이 진지한 연주자 임세연이 내 앞에 앉아 있었다.

{예전엔 교수님이 내게 그렇게까지 큰 기대가 없으신 것 같았거든. 아, 객관적인 기대치 말이야. 교수님 개인적으로는 날 원하셨으니 제자로 삼으셨겠지만, 적어도 열일곱 살이 되자마자 국제무대에 올릴 생각은 전혀 없으셨던 것 같았어.}

그도 그럴 것이, 연주자로서 경력이 일천한 나와 비슷하게 세연 역시 본격적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으며 연주자를 꿈꾸기 시작한 건 불과 2년도 채 안 된다.

국제 콩쿠르는 4년이나 5년쯤 후에 스무 살이 넘어서 나가도 늦지 않으니까, 이번은 넘기겠다 생각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겠지. 나 역시 미하일 선생님으로부터 이번엔 넘겨도 괜찮다는 말을 듣기도 했었고.

하지만 세연의 도전욕구는 강렬했고, 교수님을 설득하기에 충분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국제 콩쿠르에 나가기로 했다는 걸 허락해 주시고는, 요즘은 생각이 바뀌셨나 봐. 레슨 강도도 훨씬 강해졌고…… 날 진짜로 훈련시키신다는 느낌이야.}

그렇게 레슨이 힘들어졌으나 세연은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금 충동적으로 여기에 와 있긴 하지만 그녀가 제대로 내년 콩쿠르를 마주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게 전해져 왔다.

난 옅게 웃으며 말했다.

{내년 벨기에에서 뵙겠네요. 세연.}

{……?}

세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눈을 크게 떴다.

{내가 퀸 엘리자베스에 나가기로 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아니, 그보다…… 너도?}

{예. 저도.}

{와, 정말!?}

크게 탄성을 지른 그녀는 테이블 앞으로 확 다가오며 말했다.

{설마 했는데, 정말 같은 콩쿠르에 나가게 되었네?}

{후후, 그렇네요.}

{신기해, 신기해.}

같은 콩쿠르라면 경쟁자이기도 하다는 말인데. 세연은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고 일단 반가워하고 기뻐했다. 천성이 긍정적인 아이였다.

현실적인 면모 또한 있었고.

{진짜 열심히 해야겠어. 예선 탈락이라도 해 버리면 이젠 진짜 창피해서 너 못 볼지도…….}

{열심히 하고 계시잖아요? 괜찮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어요.}

{세상 누구도 네가 예선에서 떨어질 거라 생각하진 않을걸?}

농담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젓는 세연을 보며 난 정말로 벨기에에서 그녀와 만나길 바랐다.

직간접적으로 세연에게 난 여러 가질 해 줄 의향이 있었지만, 진실로 내가 바라는 것은 큰 무대에서 최선을 다 해 그녀를 상대해 주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최소한의 속죄가 될 것이란 생각이 오래 전부터 어렴풋하게 들곤 했었다.

{교수님 언제 오시지? 이거 한 잔 더 마실까?}

그렇게 한동안 세연과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레스토랑 문이 열리며 노년의 한 남성이 들어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누군가 찾는 듯하다가, 이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난 혹시라도 눈을 마주하지 않도록 세연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세연아.」

「교수님!」

우리 테이블로 온 교수님이 먼저 세연을 불렀다. 세연은 그제야 벌떡 일어나선 인사했다. 나도 그녀를 따라 일어서선 고개를 들었다.

벌써 세 번째다. 익숙하진 못하더라도 스스로를 가누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들끓는 감정은 몇 번이나 눌러놓은 덕분인지 지금은 괜찮았다.

미리 인사를 나누었던 터라 교수님은 자연스레 내 이름을 불렀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다시 뵙네요. 교수님.”

무대에서 보자고 하고 헤어졌고, 김성조 지휘자님은 다시 교수님을 볼 일 없을 거라 하셨지만 이렇게 세연의 주도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세연이 없었더라면 없었을 자리. 세 번째 시험대일지도 모르는 이 자리를 난 유연하게 마주하고 싶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세 사람이 된 우리는 테이블에 앉았다. 교수님은 자연스레 세연과 나란한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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