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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699화 (699/1,277)

##  699화

언젠가 난 세연이 교수님에게 레슨받는 광경을 어렴풋하게 떠올려 본 적이 있었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레슨실에 나란히 앉은 두 사제.

그건 꽤나 떠올리기 쉬운 광경이었다. 세연이 어느 정도의 음악을 어떻게 구사하는지 들어 봤고, 교수님이 어떤 레슨을 하시는지 알고 있었기에.

세연은 좋은 스승을 만나서 그녀의 음악성을 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교수님 역시 좋은 제자를 만나 치유와 보람을 느낄 수 있으셨겠지.

물론 아까 세연이 숙제는 어쨌는지 물어보실까 봐 교수님을 단둘이선 뵙고 싶지 않다고 엉뚱한 소리를 한 탓에 잠시 어두운 상상도 하긴 했지만, 그게 전부 오해라는 건 이제 정말 명백해졌다.

「내가 늦었지.」

「아니에요, 저희 오자마자 시킨 레모네이드 보세요. 요것밖에 안 마셨잖아요?」

두 사제는 단란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테이블 건너편에서 지켜본 세연과 교수님의 모습은 정말 이상적인 사제 관계처럼 보였다.

「갑자기 블라디보스토크에 왔다고 해서 깜짝 놀랐구나. 언제 온 거지? 비행기 표는 있었고?」

「배 타고 왔어요.」

「뭐라고?」

「교수님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요. 히히.」

붙임성 좋은 세연이 생글거리며 이야기하고 교수님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받아 주었다.

잠깐 보기만 해도 교수님이 세연을 보는 눈빛이 얼마나 자상한지, 또 세연은 교수님을 얼마나 따르는지 알 수 있었다.

“…….”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난 다시 한번 두근거리는 마음을 꾹 눌렀다.

내가 기도했던 바람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에 기쁨과 환희를 느낀다. 한 점 거짓 없는 내 진실된 마음이었다.

두 사제가 정말 행복해 보인다고, 앞으로도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웃으며 축복하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난 축복을 입에 담을 수 없음을 냉정하게 자각했다.

절대로 저 사이에 끼어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머릿속을 확고하게 지배한다. 그건 뻔뻔함을 넘어서 아주 죄질이 악랄한 행위다.

이 정도 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하며 감사하게 생각하자. 그뿐이었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물론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있을 뿐인 이런 상황에서 완전한 외부인으로 있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운명은 날 멀찍이 내버려 두지 않았다. 반드시 의식해야 하는 거리에 어중간하게 떨어뜨려 놓는다. 마치 벌을 주려는 것처럼.

세연은 날 내버려두고 교수님과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게 미안하다는 듯 눈빛을 보내더니, 곧 대화 주제를 내 쪽으로 틀었다.

「어…… 타티아나랑 이미 만나 보셨다고 들었어요. 인사만 하셨다고요?」

「그래.」

「이야기는 어떻게 하셨어요? 교수님 러시아어 할 줄 아세요?」

「김 지휘자가 통역을 해 줬지. 이번엔 네가 통역을 해 주면 되지 않겠니.」

「어…… 제가요?」

세연은 조금 당황해했다. 그녀는 나와 교수님이 음악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싶어 했지만, 자신이 중간에 통역으로 끼지 않고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이제야 느낀 듯했다.

교수님은 태연했다.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네이티브처럼 하시는 다국어능력자이시지만 통역을 통하는 것도 익숙하신 것이다.

「편하게 하려무나.」

「음, 그러면…… 제가 영어로 해 볼게요. 어, 물어보실 거라도 있으세요?」

「글쎄.」

편하게 하라던 교수님은 짧게 말할 뿐이었다. 무언가 통상적인 질문이라도 해 주셔야 말문을 틀 수 있는 세연은 난감해했다.

{어…… 그럼 타티아나…….}

“주문하시겠습니까?”

세연이 반대로 내게 말을 걸려던 차에, 테이블을 지켜보고 있던 웨이터가 와서 물었다. 일행이 다 모였으니 이젠 식사 주문을 해야 할 때였다.

각자 주문을 할 땐 딱히 의견을 나누거나 할 것도 없었다. 많은 관광객을 상대해 본 웨이터는 세연과 교수님이 한국 사람이라는 걸 한 번에 알아보았고, 한국어가 있는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그럼 전 이걸로…….」

「나도 그렇게 할까.」

간단하게 각자 메뉴를 골라 주문하고 나니 갑자기 침묵이 확 찾아들었다.

세연은 막연히 상상했던 것처럼 나와 교수님이 소통하는 게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같다는 걸 분명히 깨닫고는 어떻게 방법이 없을지 고민하는 얼굴이었고, 교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다.

솔직한 심정으로 난 이런 어색한 상황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친구의 제안으로 마주하게 된 자리는 어색한 게 되레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세연을 중간에 두고 말하는 것이 내가 유지해야 할 적정선이라는 기분이 든다.

때문에 적극적으로 말을 걸거나 웃지 않고 조용히 기다리기만 했다. 스마트폰을 보면서 딴청을 피울 것까진 없었고, 멀리 바다를 지켜보거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고 이따금 세연에게 눈짓하는 것 정도면 충분했다.

하지만 겨우 몇 초 정도 흐르는 사이 분위기는 더더욱 어색해졌다.

“…….”

「…….」

저 멀리선 활기차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목소리가 들려온다.

점심식사를 위해 레스토랑을 찾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여기 있는 세 사람만 어색한 고요의 모래 속으로 파묻히고 있었다. 그 시간에 비례해 입술이 더더욱 무거워지며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가장 부담스러움을 느끼는 건 이 자리를 주선한 세연이었다. 약간 패닉에 빠진 것같이 보이는 그녀는 지금 어떤 언어를 써야 할지도 헷갈려 하는 얼굴이었다.

곤란해하는 세연을 보고 있자니 가여워져서 먼저 화두를 던져 줄까 싶었는데, 그녀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말했다.

「아, 더워, 더워. 땀나.」

한여름이기도 하고 난처한 상황이기도 하니 진땀이 흐를 만도 했다.

단순히 말뿐만은 아니었는지 세연은 입고 있던 카디건을 벗어서 둘둘 말았다. 그리고 어디 둘 곳을 찾는지 두리번거렸다.

모든 행동이 마치 연극처럼 과장스러워서 그녀가 얼마나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웃으면서 옆 의자에 놓으라고 하려는 찰나였다.

“어.”

난 세연의 팔에 있는 기다란 상흔을 발견했다.

뭐지?

저번엔 저런 상처는 없었는데.

“왜…….”

웃으며 말을 걸려던 난 그대로 멈칫하며 굳어 버렸다. 머릿속의 시간이 천천히 흐르더니 이내 멎었다.

간신히 안정되었던 심장이 덜컹 흔들리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곧 아플 정도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약한 공황을 느끼면서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상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특히 지금은 절대로.

몇 번 겪은 일이라 그런지 어느 정도 제어할 순 있어서 가느다랗게 숨을 이어 쉬며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해 봤다.

그럼에도 모든 생각은 세연의 팔로 향하고 있었다.

왜 하필 팔이지? 깊은 상처인지 아닌지 여기선 봐도 잘 모르겠다. 세연은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움직이기도 했고.

가슴 한구석에서 불안감이 해일처럼 밀려온다. 난 꼼짝도 하지 못 하고 굳어 버린 채로 그 해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기에 휩쓸리면 정말 끝장일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난 굳어 있는 등을 펴고, 잇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선 테이블 앞으로 손을 휙 뻗었다.

{타, 타티아나? 왜 그래?}

놀란 세연이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난 그녀의 손목을 붙잡곤 내 쪽으로 당겼다.

“…….”

일단 꿰매진 않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렇게까지 크게 다친 건 아닌 것 같았다. 상처를 입은 진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지만 꽤 아물어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길게 상처가 났다면 하마터면 더 깊고 심각하게 다칠 위험도 충분했을 것 같다.

순간의 행운이나 불행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아는 나는 세연의 상처가 찰과상에서 그쳤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좀처럼 진정할 수 없었다. 심장이 쉴 새 없이 두근거렸다.

상태를 확인한 나는 다시 세연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파하진 않는 것 같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다가도, 난데없는 화가 확 치밀어 올랐다.

{세연.}

{으, 응?}

{언제 다치신 건가요?}

{그게…….}

세연은 우물쭈물하며 팔을 빼려고 했지만 내가 꼼짝도 하지 않자 곧 포기했다.

그런데 이 상황에 놀란 건 나나 세연뿐만이 아니었다.

「그거…… 뭐지?」

난 너무 놀란 나머지 옆에 있는 교수님이 이 상황에 대해 아는지 모르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이 반응을 보니 전혀 모르고 계셨던 것 같다.

상당한 충격을 느끼신 표정으로 교수님이 물었다.

「이 정도로 다쳤는데 왜 말을 하지 않았지? 세연아. 왜?」

{어째서 교수님도 처음 보시는 것 같은 반응인 거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숨기고 있었던 건가요?}

「레슨 때 내색도 않아서 몰랐는데…… 대체 언제?」

{어째서 그러셨죠? 언제 어떻게 다치신 건가요? 크게 다칠 뻔했던 건 아닌가요?}

「설마 그때…… 그때인 거냐? 종혁이가 널 데리고 나갔을 때?」

{많이 심각한 건 아니죠? 그것만 알려 주세요.}

「그 녀석이 혹시 또 사고를…….」

나와 교수님은 번갈아 가면서 세연에게 마구 질문을 퍼부었다. 방식도 순서도 언어도 따지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 침잠하던 어색함은 전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엄청나게 과열된 분위기였다.

세연은 어디론가 도망치지도 못하고 앞과 옆에서 들려오는 두 가지 언어에 휩쓸리면서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는 것 같았다.

나 역시 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교수님이 또 한 사람을 언급하는 건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충격을 넘어서서 끔찍한 일을 생각하기 직전이시라는 것 또한 여실히 전해져 온다.

내가 순간적인 발작으로 실수를 한 것 같다는 직감을 느꼈을 때, 힘이 빠진 틈을 타 세연이 손목을 휙 빼더니 빠르게 말했다.

「잠깐, 잠깐만요! 그냥 저 혼자 긁혔을 뿐이니 괜찮아요!」

「…….」

「종혁 오빠한테서 이야기는 들었지만, 정말 괜찮으니까 제발 진정하세요. 교수님. 제발요.」

「그, 그래…….」

{타티아나도.}

{…….}

그제야 교수님은 어깨에서 힘을 빼시더니 물 잔에 물을 가득 따라선 그대로 마셨다.

난 물을 마실 힘도 없었다. 그대로 다시 의자에 털썩 앉았을 뿐이다. 순간적으로 너무 긴장한 탓인지 탈진감마저 느껴진다.

“…….”

심장을 누르듯 가슴께에 손을 올리며 길게 심호흡했다. 여전히 두근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세연은 별거 아니라 말했고 상식적으로 연주자 활동에 문제가 갈 만큼 큰 상처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나도 이해했지만, 약한 공황은 금방 휙 하고 사라지지 않고 길게 날 괴롭혔다.

그리고 테이블 저편에, 마치 거울처럼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

눈이 마주친 것도 잠시, 세연에게 마구 퍼부어 댔던 것이 떠올랐는지 교수님은 내 시선을 슥 피해 버렸다.

「크흠…….」

어색한 상황이 폭풍에 휩쓸려 날아가 버린 건 좋지만, 지금 이 분위기는 어떻게 할 건가요?

난 전부 세연의 탓이니 책임이라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세연은 곧 억울하다는 듯 울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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