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0화
바다가 보이는 레스토랑에서의 점심 식사는 마치 취조실에서의 심문 시간처럼 변해 있었다.
죄인이 된 세연은 양손을 모으고 쭈뼛거리며 앉아 있었고, 나와 교수님은 형사와 검사처럼 엄정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빈 물 잔을 옆으로 치워놓은 교수님이 먼저 물었다.
「그럼 설명해 보거라.」
「음…… 별일은 아니었어요.」
「피아니스트에겐 별일이 아닌 일 같은 건 없단다. 세연아. 그냥 있는 대로 말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다시 한번 세연이 그렇게 가볍게 말한다면 이 차분함은 사라지고 말 것 같았다. 혼날 거라 생각했는지 조금 움츠러들었던 세연은 곧 얼마 전 겪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풀어놓았다.
레슨을 받으러 가는 길에 마트에 들렀는데 롤테이너에 부딪혀서 팔을 다쳤던 일, 그리고도 응급처치만 하고 레슨을 받으려 했는데 김종혁을 만나선 그대로 병원으로 끌려갔었던 일.
이야기를 듣던 교수님은 그제야 짚이는 곳이 있는지 인상을 쓰며 말씀하셨다.
「김종혁 이 녀석이…….」
「오빠는 교수님을 생각해서 그랬을 거예요. 저 이야기 전부 들었어요. 저기…… 제자가 다치는 걸 정말로 싫어하신다고.」
「…….」
난 어떤 상황인지 모르지만 앞뒤 이야기로 유추해 보면 아마 교수님에게 전화를 걸어서 아무 일도 없다고 한 것 같았다.
나름대로 최선의 방책이었을지 모르겠지만, 교수님은 그 때문에 더 화가 나신 것 같았다.
「그럼 계속 날 속일 생각이었다고? 언젠가 분명 알게 되었을 일인데, 정말 내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더라면 그때 바로 괜찮다는 걸 내게 말했어야지.」
「그건…… 죄송해요.」
「원 참, 너는 그렇다 치고 그 녀석은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애같이…….」
숨기는 것으로 대처한 것에 대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중얼거리던 교수님은 곧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간 못 미더운 모습을 보였으니…… 탓할 일도 아니긴 하지만.」
「예?」
「크흠.」
헛기침으로 이야기를 정리한 교수님은 세연을 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세연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손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교수님은 손을 돌려서 팔을 다시 확인하더니 조용히 말씀하셨다.
「아니다. 아무튼…… 흉터가 안 남았으면 좋겠구나.」
「요즘 레이저 시술 좋대요!」
「…….」
교수님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눈가를 찌푸렸다. 기껏 걱정해서 말했더니 이렇게 천진난만하게 대답한다면 누구라도 기가 막힐 테지. 앞에서 보는 나도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헤실거리는 세연을 보며 결국 교수님은 마주 웃고 말았다.
이건 세연 나름대로의 긍정적인 방식이었다.
언제까지고 잘못을 빌고 위축되어 있어 봐야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운이 좋은 것은 세연의 운명이 강하다는 뜻이기도 할 테니. 이번 일로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고, 앞으로 잘 해나갈 생각을 하는 것도 중요한 것이다.
세연의 손을 놓아준 교수님은 다시 천천히 물 잔을 채우며 내 쪽으로 눈짓했다.
「네 친구에게도 이야기해 주렴.」
「아.」
「걱정하는 것 같던데.」
그렇게 말씀하시며 날 보는 눈빛은 이전과 약간 달라져 있었다. 세연을 가운데에 두고 똑같이 걱정했었기 때문일까, 약간의 고마움과 분명한 친근함이 이쪽으로 향한다.
거기에 보답할 수 없는 난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세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게도 설명을 해 주어야 했다.
{미안, 타티아나. 많이 놀랐어?}
{……약간요.}
{어떻게 된 거냐고 했었지? 어, 그게 말야…….}
교수님에게 지적받은 세연은 이번엔 별일 아니라고 하지 않고 차분하게 자신이 겪은 일을 다시 영어로 설명해 주었다.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곤 있었지만, 난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이렇게 세연이 내게 괜찮다는 걸 제대로 확인시켜 주는 것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안정되는 마음도 분명 있었던 까닭이다.
잠시 후 설명을 마친 세연은 목이 타는지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시더니,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투로 어깨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종혁 오빠도 그렇고 교수님이나 너도 걱정하는 걸 보니까 내가 위기감이 너무 없는가 싶은데…… 생각해 보니까 만약 네가 그렇게 다쳤다면 나도 깜짝 놀랐을 것 같아.}
피아노 연주자가 되고자 한다면 부상에는 늘 예민하고 신경을 써야 할 필요가 있었다.
부득이한 사고가 아니라 할지라도 평소에 너무 무신경하게 살다가 피로가 누적된 인대나 관절 등에 장기적 부상을 입은 연주자들은 정말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지만, 일단 이런 자리에서 할 이야긴 아닌 것 같았다. 세연도 오늘 깨닫는 바가 없잖아 있는 것 같았으니까, 나중에 따로 말해 줄 수 있는 날이 오면 그때 해도 괜찮겠지.
그보다 난 세연이 말한 다른 인연에 대해서 물어보기로 했다. 지금은 다른 쪽으로 관심사를 돌리는 것이 세연에게도 덜 부담일 것 같기도 했고.
{세연을 병원에 데려다주신 분과는 친하게 지내시는 건가요?}
{종혁 오빠? 어, 약간?}
뭔가 애매한 대답이었다. 설명이 더 필요하단 표정으로 바라보자 세연은 자신이 김종혁과 어떤 사이인지 가늠하는지 테이블 귀퉁이 어딘가를 응시하더니, 이윽고 말했다.
{지금은 친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다친 날 병원에 데려다주기 전까진 좀 어색했었거든.}
{같은 분께 사사하더라도 어색할 수 있죠. 꼭 친하란 법이 없기도 하니.}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글쎄, 종혁 오빠는 피아노 그만두어서 교수님에게 레슨 안 받거든.}
{그만두었다고요?}
{어? 응.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 봐.}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이야기에 목 어딘가를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 목소리가 잘 안 나왔지만, 난 건너편의 세연의 얼굴을 보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녀는 딱히 무언가 걱정하고 있지 않았다. 그 낙천적인 에너지는 내게도 전해져 왔다.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자. 세연이 해 준 이야기들을 돌이켜보며 난 침착하게 정리한 생각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피아노를 그만두었는데도 교수님을 찾아뵙나 보네요.}
{응. 맞아. 레슨을 받지 않더라도 종종 찾아오곤 해.}
나도 모르게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교수님은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엔 끼어들지 않겠다는 듯 바다를 보고 있었다.
이제 저분에게 있어서 세연이 얼마나 큰 의미일지, 감히 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세연은 그렇게까진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별 감흥 없이 이야기를 이었다.
{근데 피아노를 아예 하지 않는 건 아닌 것 같아.}
{예?}
{그날 병원 갔다가 내가 떼를 써서 연습실에 갔었거든. 그때 날 레슨해 주기도 했었어. 근데 몇 년 쉬었다는 사람이 쇼팽의 뱃노래를 그냥 치더라니까? 따로 연습하는 게 분명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세연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어쨌거나 피아노를 손에서 아주 놓진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뱃노래를 연주할 수 있을 정도라면 실력도 상당히 보존하고 있는 것 같고…… 여전히 음악가라 할 수 있다면 굳이 프로 피아노 연주자를 목표로 하지 않더라도 이 세계에 발끝 정도는 담그고 있을 테니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안도할 수 있었다.
다른 이유와 미련의 강압 때문에 떠밀리지 않고, 아프지 말고 행복하게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기를.
말없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할 무렵이었다.
우리가 영어로 나누는 이야기를 교수님이 아예 알아듣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교수님은 괜한 이야기를 더 할 필요 없다는 듯 딱 잘라 말씀하셨다.
「학교를 나온 내가 지금 가르치는 제자는 너 하나뿐이다. 세연아.」
얼음처럼 냉정한 어투였다. 세연이 옆을 바라보자 교수님은 그 눈을 바라보지 않고 스마트폰의 검은 화면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그 전에 있던 한 녀석은 사람으로서 날 배신했고, 한 녀석은 죄책감으로…….」
「예?」
「아니다, 미안하다. 못 들은 걸로 하거라. 관계없는 일이니까.」
말실수를 했다는 듯 교수님은 허리를 쭉 펴며 사과했다.
하지만 이미 뱉어진 말로 세연은 여러 가지를 느낀 것 같았다. 늘 웃는 얼굴인 그녀도 지금은 진지하게 다시 한 번 약속했다.
「늘 조심할게요. 죄송해요. 정말로.」
「부담 주고자 하는 말은 아니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단다.」
두 사람은 다시 이상적인 사제지간처럼 웃음을 나누었다.
테이블 건너에서, 난 가만히 교수님이 하신 말들을 되짚었다.
사람으로서 배신했다는 말은 차가운 칼날이 되어 날 베고 지나갔다.
모르는 건 아니었다. 분명히 알고 있었다. 때문에 얼마 전 봤을 때 숨이 가쁠 정도로 짓눌리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한 심리적 압력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모를 정도로 난 바보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한번 확인당하자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
난 테이블 밑으로 내려와 있는 양손을 천천히 모아 쥐면서 되뇌었다.
미련이 있을지언정 후회를 해선 안 된다. 과거를 후회한다는 간단한 마음으로 쉽게 편해지려고 하는 건 내 스스로가 용서하지 못한다.
후회는 기망이고 변명은 죄를 더할 뿐이었다. 난 비열해지고 싶지 않았다.
칼에 베이더라도 비명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침묵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 차라리 완전히 짓밟혀 사라져 버리길 바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바람일 테니.
가루가 되어 폐 속에 쌓인 무언가가 보잘 것 없는 목소리를 내려 해도 무시할 수 있었다. 이조차 편협한 독선이라 할지라도…… 난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았다.
{타티아나?}
{…….}
난 고개를 들고 세연을 바라보았다.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내가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할 수 있다는 게 자랑스럽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만 교수님이랑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심심하지, 미안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방법이 있으면 좋을 텐데.}
{괜찮아요. 모쪼록 많은 말씀 나누세요.}
가볍게 웃으며 말하자 세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요리가 나왔다. 내가 주문한 건 조개구이였다. 담백하게 조리되어 나와서 먹기에 좋았다.
테이블 분위기는 처음보단 자연스럽게 풀어져 있었다. 세연을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간 덕분인 것 같았다.
식기를 들고 각자 요리들을 먹으며 교수님과 세연이 이야기를 나누길 잠시, 교수님이 이쪽으로 슬쩍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모처럼이니 타티아나에게 하나 물어봐도 괜찮을까.」
그 목소리에 반응하듯 고개를 들자 교수님이 물었다.
「김 지휘자와 같이 하는 예술감독 일은 어떤지 조금 궁금한데. 세연아. 물어봐 주겠니.」
세연이 말했던 것처럼 교수님은 내가 예술감독까지 맡아 겸임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난 모든 사정을 차치하고 일반적인 경우를 상정했다. 여전히 편하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시간이 조금 흐르기도 했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 주시는 덕분인지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런데 세연은 말을 바로 전해 오지 않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교수님, 그거…… 타티아나가 약간 불편해할지도…….」
「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으면 하는데.」
「그렇긴 한데요…….」
세연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 눈치를 보았다.
그런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에서 내가 불편함을 느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정말 원하는 건 내가 음악가로서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란 걸 안다. 그럼에도 이렇게 신경 써 주는 건 고마웠다. 난 식기를 살며시 내려놓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교수님께서 제게 무언가 물어보신 건가요?}
{응, 그게…….}
{있는 그대로 전달해 주세요. 통역이란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정말 통역 취급하는 거야!?}
{후후후.}
난 나지막이 웃었다. 지금 세연의 입장은 주선자이자 통역이겠지. 그리고 내 입장은 그런 그녀가 원하는 음악가이자 친구의 모습으로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