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01화 (701/1,277)

##  701화

한동안 우왕좌왕하던 세연은 비로소 이 분위기에 적응할 수 있었다.

팔의 상처 때문에 교수님과 타티아나에게 동시에 혼날 땐 정말 정신없고 괜히 겉옷을 벗었나 싶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혼난 덕분인지 한결 나았다.

그런데 뭔가 한소리 듣고 나서야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나 진짜로 약간 이상한 거 아닌가?

{이렇게 전해 주세요.}

혼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타티아나가 세연을 불렀다. 세연은 귀를 쫑긋 세우고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그대로 교수님에게 통역해서 전해야 할 말이었다.

타티아나는 우아한 태도로 찻잔을 내려놓더니 말했다.

{아직 미숙해서 잘 해내진 못하지만…… 제게 맡겨진 무게를 알고 진지하게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궁금하신 점은 성심껏 대답 드리고, 조언해 주실 부분이 있다면 새겨듣겠습니다.}

세연은 방금 들은 말을 어떻게 해야 가감 없이 통역할 수 있을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어마어마한 재벌가에서 자라서 그런지 격식을 차려 예스럽게 말할 땐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귀티가 흘렀다. 이것도 영어라서 조금 덜한 수준이었다.

뭐라고 전해야 하지?

생전 쓰지도 않던 온갖 단어들이 마구 뒤섞이며 머리를 어지럽힌다. 한참이나 머리를 굴리던 세연은 결국 바보처럼 말했다.

「그…… 열심히 하고 있대요.」

「세연아. 통역은 있는 그대로 전해야지.」

「아, 정말 교수님도 똑같은 말씀 하시네!?」

「다 듣고 있으니까 제대로 하려무나.」

「…….」

교수는 영어를 듣고 이해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세연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느 정도 하시는 건 그리 이상하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게 영어가 아닌 다른 나라 언어들은 몇 개씩 하신다고 들었으니까…….

그런데 이러면 세연만 불리했다. 통역을 잘하면 본전이고, 멋대로 하면 혼나기만 할 상황.

뭔가 잘못 걸린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며 두 분이 번역기를 쓰는 건 어떻겠냐고 말하려는 순간, 세연이 말할 틈을 주지 않고 교수가 물었다.

「그래…… 내가 보니 메인 프로그램이 바뀌었던데, 어떻게 바꾼 거지? 김 지휘자와 어떻게 상의했는지 궁금하구나.」

이번 주 토요일에 있을 연주회에 대해서 이미 어느 정도 파악한 교수님은 정말 본격적인 질문을 건네 왔다.

세연이 일단 들은 대로 전하자 타티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악장과 상의하여 오케스트라의 레퍼토리를 받은 뒤에 지휘자의 검토를 거쳐 곡들을 추리고, 그중 타티아나가 할 수 있는 곡들을 뽑은 다음 다시 검토하고 하나하나 리허설을 해서…….

간단히 말하자면 협연에 참가하는 모든 음악가들이 연주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곡의 교집합을 찾아내는 일이었지만, 하루에 4-5시간씩 리허설을 한다는 걸 들으니 듣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질 정도였다.

세연은 아직도 제대로 협연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대체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과 연주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런데 계속 모르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내년에 국제 콩쿠르를 노린다면 솔리스트로서의 능력뿐만이 아니라 협연자로서도 뛰어나야 했다. 솔직히 세연은 그 부분이 심히 걱정스럽기도 했다.

타티아나가 벌써부터 예술감독이라는 직책까지 맡아선 철두철미하게 할 일을 해내는 것을 통역하면서, 지금 굉장히 멀리 느껴지는 거리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까지 하느라 머리가 복잡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가까스로 통역을 마치고, 다시 교수가 하는 말들을 타티아나에게 전하고…… 그렇게 서너 번 정도 정신없이 통역사로서 역할에 충실했더니 이윽고 교수는 새우를 한 마리 쿡 찍으며 말했다.

「내가 알기론 김성조 그 사람이 그렇게 할 사람이 아닌데…… 분명 실력으로 납득시켰겠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구나.」

교수가 듣기엔 타티아나가 그렇게 쉽게 진행시켰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실력으로 납득시켰다는 말. 또 당연하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세연은 정말 부러웠다.

이제 겨우 열여섯 살이라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일들도 타티아나에겐 실제로 가능하다는 걸 세연 또한 충분히 알고 있었다. 불 꺼진 홀에서 성공적으로 연주를 한다든지…… 정말 기적 같은 일들이 많았다.

「교수님은…… 이 애가 어떤 음악을 연주하는지도 잘 알고 계시죠?」

「스피커로 들은 것으론 잘 안다고 할 수 없지.」

직접 실황 연주를 들어 본 세연과 달리 교수는 영상으로만 보긴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느껴지는 높은 수준의 기술과 음악성은 교수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으리라.

「그래도 아시는 거잖아요?」

「……안다는 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구나.」

「저 애가 쓰는 리듬과 화법에 흥미가 있으신 것 아닌가요?」

이젠 예술감독까지 맡은 협연자로서의 능력까지.

이왕이면 두 사람이 직접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세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나 직접 인사시켜 주고 싶었지만, 이렇게 중간에 끼어들고 보니 괜히 제대로 대화도 안 되는 것 같았다.

교수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

「세연아, 네가 그런 말 한 적이 있었지. 저 아이가 네 또래 중에 가장 유망한 피아니스트라고.」

팔을 긁히고 종혁에게 레슨을 받은 직후였다. 세연은 교수에게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겠다고 생각하며 전화를 걸어 국제 콩쿠르 출사표를 던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주목하는 건 다름 아닌 건너편에 있는 백금발의 피아니스트, 타티아나였다.

이렇게 보면 서늘한 인상의 도도하고 얌전한 애로만 보이고 실제로도 그런 편이다. 하지만 세연은 그녀가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한 피아니스트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세상은 아직 에르네스트를 더 주목하고 있지만, 세연은 머잖아 그 평가가 격변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말이 틀리진 않겠지. 지금 이곳에서 저 아이가 하는 것을 보면…… 러시아가, 아니 세상이 만들어 내는 중인 피아니스트일 테니.」

그 말은 마치 대적하기조차 어려운 존재를 칭하는 것처럼 들린다. 실제로 세상에 존재하는 음악적 유산과 자산 등은 타티아나에게 이끌리며 집중되고 있었다.

하지만 교수는 세연을 좌절시키기 위해 그런 말을 꺼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는 없단다.」

너무 반짝반짝 빛나서 안간힘 쓰며 무시하려 해 봐도 눈에 들어오고 마는 아이를, 교수는 간단하게 무시해 버리면서 세연을 돌아보았다.

그 눈빛엔 단단함 확고함이 차 있어서 세연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교수를 마주 보았다.

「내 머릿속엔 널 어떻게 하면 세계 최고의 콩쿠르 무대에 올릴지, 오로지 그 생각밖에 안 들어 있으니까. 알겠니?」

「…….」

타티아나가 어디까지 가 있는지 교수는 분명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번쯤 세계무대에서 마주하고 싶다고 기세 좋게 이야기한 세연을 응원하고 지지해 주려 한다.

세연은 목이 메임을 느꼈다. 물론 당사자이기도 한 타티아나를 앞에 두고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정말 실례이기도 하지만, 말을 이해하지 못할 테니 괜찮다는 생각 정도는 있었다.

일단 이상한 기색은 보이지 말아야지. 세연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피아노에 목숨을 걸고 한 번쯤 제대로 마주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보여 줘야지. 다시 한번 그녀는 굳게 다짐했다.

교수 역시 기분 좋은 미소로 세연을 바라보며 새우를 입안에 넣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런 의미에서 궁금해진 게 있는데.」

「저한테요? 뭔가요?」

「내가 내준 과제는 다 했겠지?」

「앗.」

흠칫하며 세연은 교수로부터 몇 cm 정도 떨어졌다. 우려했던 질문이 갑자기 이런 타이밍에 튀어나올 줄은 미처 몰랐다.

교수의 눈이 가늘어지기 시작하는 걸 보면서, 세연은 급히 건너편에 덩그러니 앉아 있던 타티아나를 찾았다.

{타티아나. 어, 그러니까…… 교수님은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하는 것 같다고 하시네.}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나요?}

{응? 응. 정말이야.}

{후후, 알겠어요.}

여전히 이 자리가 그리 편하지만은 않을 타티아나는 불만을 말하거나 하지 않고 상냥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세연은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타티아나가 보는 앞에서 세연을 혼내는 건 그리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교수는 작게 말했다.

「……오늘은 쉬고 내일 이야기하자꾸나.」

「예…….」

큰일 났네 정말……. 세연은 한숨을 내쉬며 오늘이라도 연습실을 하나 빌려서 연습을 좀 해 둬야 하나 고민했다.

그런 세연을 보던 교수는 테이블 건너 타티아나 쪽으로 시선을 넘기며 말했다.

「그리고…… 타티아나에게 부탁 하나 해도 될지 모르겠군.」

교수와 눈이 마주친 타티아나는 물끄러미 이쪽을 보고 있었다.

세연은 자연스럽게 교수의 말을 전해 주었다.

{저기, 교수님이 부탁하고 싶은 게 있으시다는데.}

{무엇인가요?}

그 말을 다시 전하자 교수가 말했다.

「오늘 리허설을 견학할 수 있도록 해 달라 물어보거라.」

「견학이요?」

「그래.」

바로 타티아나에게 부탁하기 전에 세연은 그런 부탁을 해도 되는 것인지 의문부터 들었다. 오케스트라 리허설 현장은 관계자 외엔 출입금지인 거 아닌가?

하지만 교수는 음악을 다루는 세연이라면 관계자라 해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 정도면 견학하는 것만으로도 그 흐름이나 구조를 파악하는 데에 정말 큰 도움이 되겠지. 앞으로 협연에 대한 공부도 많이 해야 할 텐데, 오늘부터 시작하려무나. 타티아나의 리허설로.」

그렇게 당연한 듯 기회라 여겨도 되는 거예요?

세연이 눈빛으로 그렇게 질문해도 교수는 담담하게 말할 뿐이었다.

「저 아이가 거절할 것 같진 않구나.」

「…….」

어떠한 확신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세연은 오케스트라의 시스템 자체를 잘 몰랐다. 견학을 부탁하는 게 사실 그렇게 실례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교수님도 그런 생각으로 말씀하셨겠지 싶어 세연은 타티아나를 불렀다.

{타티아나.}

{예.}

{혹시…… 오늘 리허설 견학 신청해도 될까? 그런 게 가능하다면 말야.}

타티아나는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고개를 까딱였다.

{가능할 거예요.}

{정말?}

역시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나? 사실 리허설을 하는 동안 구석에서 보고만 있는 게 전부일 테니 딱히 불편할 일은 없을 것 같기도 했다.

비어 있던 오후 일정에 계획이 또 생겼다. 세연이 막연히 그 광경을 상상하고 있을 때, 문득 타티아나가 말했다.

{두 분 정말 좋은 사제지간이신 것 같아요.}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세연과 교수에게 말했다.

먼저 말을 하지 않던 타티아나가 칭찬하는 것 같은 말을 하자 기분이 좋아진 세연이 물었다.

{그렇게 보여?}

{예. 서로를 생각하며 노력하시는 게 느껴져서 보기 좋네요.}

교수가 부탁한 것 때문일까. 세연은 타티아나에게서 조금 더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 이상 말하진 않고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어떤 상황인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세연에게 있어서 난 목표로 삼을 만한 피아노 연주자였고 교수님도 비슷하게 보시는 듯했다. 언젠가 세연이 딛고 올라서야 할 벽.

실력을 분석하려면 미리 알아 둬야 할 필요가 있으니 흥미가 있긴 하지만, 세연에게 향하는 것만큼은 아니다.

“…….”

이 또한 내가 바라왔던 위치이기도 했다. 내가 맡을 수 있는 유일한 자리 중 하나겠지. 그 사실이 난 정말 기껍다.

다른 건 허락되지 않는다. 자격도 없을뿐더러 내게 필요한 건 적합한 자리이지 욕망이 앞선 자리가 아니다.

언젠가 읽었던 책이 떠올랐다.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중에서도 꽤 오래 전 읽었던 것이지만 그 내용은 지금까지도 생생한 감상으로 남아 있었다.

주인공 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니코프는 초인주의에 심취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그는 스스로 범인인지 초인인지 시험하기 위해 살인을 행한다.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능히 해낼 수 있어야 한다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그 후로 로지온은 지옥과도 같은 죄책감에 시달리며 착란을 일으키기도 하며 방황한다. 그 끝은 편해지기 위한 자수와 시베리아 유배였다.

난 보통의 사람들과 많이 다르다.

피아노에 미친 망령이며 스스로를 죽이고 끊어 냄에 거리낌이 없다. 역설적으로 그 덕분에 지금 이곳까지 올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범인이 아니라 하여 초인이라 할 수 없음은 명명백백했다.

두 가지의 죽음이 공존하며 기억과 죄 그리고 책임을 지고 있을 뿐이다. 이런 걸 초인이라 할 순 없었다. 난 그걸 몇 번이고 자각하고 깨달았다.

그러나 되다 만 무언가라 하더라도 그것이 멈춰 서서 울며 좌절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어두운 방에서 길을 찾아 나가듯, 실수한 것은 보강하고 스스로를 일깨워 발을 내디디며 한계에 다다르면 뚫고 나간다.

옳음을 찾아 따르면 그로 말미암아 결국 모든 것을 옳게 만드리라 믿으며, 난 세연을 돌아보았다. 천진한 눈빛이 나와 마주하더니 미소를 머금었다.

{들어가죠, 세연.}

{나 좀 떨리는데…… 인사 잘 해 줘야 해?}

{물론이죠.}

프리모르스키 콘서트홀 문 앞에서 난 그녀에게 다시 한번 확답을 주었다. 김성조 지휘자님이 그녀를 30분 내에 좋아하게 되리란 데에 난 이곳에 가지고 온 모든 것을 걸 수도 있었다.

그렇게 난 세연과 함께 오케스트라 리허설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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