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2화
오케스트라 리허설룸. 미리 온 단원들이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면서 김성조는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빠지진 않겠지 설마…….”
그는 여러 오케스트라에서 객원 지휘자로서 연주회를 이끌어 본 경험이 많기에 정말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이라 할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와의 갈등은 정말 수도 없이 겪었고, 협연을 해야 할 연주자와 문제가 생기거나 예상하지 못한 사고 등이 생기는 경우도 많았다. 때문에 어지간해선 유연하게 상황에 맞추어 노련하게 대응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요 며칠간은 불안감을 조금씩 느꼈다.
“…….”
오늘 타티아나는 오전 피아노 연습을 하러 나오지 않았다.
어제도 타티아나는 오전엔 호텔에서 푹 쉬다가 왔는지 리허설 약속 시간에 딱 맞추어 나와선 그럭저럭 평범하게 리허설을 하고 돌아간 상황이었다.
예술감독이라는 직책에 대한 부담감이나 본래 다른 사람에게 갈 예정이었다는 것에 대한 생각은 하루간 정리를 한 듯 보였지만, 저번 주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어딘가 약간 빛이 바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저번 주에 타티아나를 처음 보자마자 김성조는 자신이 여기에 없더라도 저 피아니스트라면 능히 이 오케스트라를 끌어내어 반드시 무대에 올리고 말 것이란 확신을 받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타티아나가 보인 능력과 정열은 인상적이었다.
첫 인상이 그렇게 좋았기 때문이었을까, 김성조는 혹시나 그녀가 흔들리고 있다면 전부 자기 책임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홀에 오자마자 바로 혹시나 싶어 피아노가 있는 곳들을 모두 돌아보았으나 어디에서도 타티아나가 보이지 않았을 때, 김성조는 전화라도 해 봐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연주자들이 정규 리허설 전의 오전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는 자유재량이었으므로 그가 간섭할 일이 아니었다.
사실 그가 정말로 걱정하는 건 오전 연습을 안 함으로서 생길 역량 저하 등이 아니라, 타티아나가 혼자 무엇을 하고 있을지, 정신적으로 무리하고 있진 않을지 하는 부분이었지만…… 이걸 어떻게 오해받지 않고 말할 수 있을지도 난감했다.
되레 악영향이 더 가기라도 한다면 아무것도 안 하느니만 못하다.
“흠…….”
역시 세상에 완벽이란 없는 건가.
김성조는 타티아나의 실력을 떠나서 거의 완성된 연주자라 내심 평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겨우 열여섯 살이 감내하기엔 버거운 짐들이 많았던 탓이었을까, 그가 처음 내렸던 평가는 점점 내려가는 중이었다.
딱히 연주자로서 타티아나를 재려고 한 것도 아니고 실망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현실적으로 보면서 자연스럽게 욕심을 내려놓자 자연스레 타티아나에게 향하는 기대치도 내려갈 뿐이었다. 게다가 어떻게 보더라도 타티아나는 여전히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그렇게 협연자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기다리길 얼마 지나지 않아, 정확히 리허설 10분 전에 타티아나가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담백한 인사와 함께 들어온 타티아나를 보자마자 김성조는 일단 안심했다. 오전 연습이야 어쨌든 그녀는 리허설에 지장이 가게 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뒤에 붙어 있는 또 한 명의 아이를 보고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
김성조가 타티아나의 뒤편으로 시선을 보내자 그 시선을 받은 아이는 약간 멈칫하더니 곧 결심했는지 타티아나의 옆으로 나와서 섰다. 한눈에 봐도 고등학교에 다닐 만한 나이대의 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타이밍 좋게 타티아나가 그녀를 소개했다.
“여긴 제…… 친구인 임세연이라 해요. 지휘자님께서도 들어 보신 적이 있을 거예요.”
“임세연? 어…… 아! 박 교수님 제자라 했던 그 아이?”
“예. 맞아요.”
타티아나는 세연 쪽을 살짝 돌아보았다가, 왜 리허설로 곧 진지해질 이곳에 친구를 데리고 온 것인지 설명했다.
“교수님에게 부탁받은 일이기도 하고, 저도 도와주고 싶어서 그런데…… 오늘 리허설을 견학할 수 있게 해 주어도 괜찮을까요?”
“견학?”
고개를 끄덕이는 타티아나를 보면서 김성조는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다.
견학 자체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리허설에 집중하게 되면 옆에 한 명 정도 더 있는 건 아무 신경도 쓰이지 않기도 하고, 그에 비해 견학생이 얻게 되는 것은 정말 많다. 딱히 손해 없이 플러스될 일만 많으니 좋은 일인 것이다.
하지만 교수에게 부탁받았다는 게 이해가 안 갔다.
대체 언제? 저 아이가 박 교수의 제자라 했었으니까, 밖에서 다시 연이 닿게 된 건가?
심지어 교수가 예술감독인 타티아나에게 일종의 부채감을 내려놓을 명목으로 세연을 맡겼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니면 어떠한 교섭이었을지도 모르고.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대체 어떤 이야기가 오갔을지 상상도 잘 안 갔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안 그래도 힘들 타티아나가 어떤 기분을 느끼고 왔을지도.
김성조는 타티아나를 관찰했다. 괜히 유심히 바라보는 티를 냈다간 안 될 것 같아서 잠깐 본 것이었지만, 그렇게 나빠 보이진 않았다.
아무래도 다른 당사자에게 물어봐야겠다.
「어…… 보자, 한국인이라면 말이 쉽겠군. 그렇죠? 세연 양?」
「아! 예. 맞아요.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김성조가 한국어로 묻자 세연은 빠릿하게 대답했다.
이미 분명한 두각을 보이며 음악가들 사이에서 이름이 오르내리는 타티아나와 달리 임세연이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실력을 따지기 전에 우선 그 태도는 합격점이었다. 김성조는 보다 자연스럽게 물었다.
「너무 격식 차릴 건 없고. 박 교수님과 제가 잘 안다고 해서 따로 연습을 시켜 주긴 어렵겠지만…… 견학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냥 보는 걸로도 상관없는 것 맞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가만히 있을게요.」
「하하하, 그렇게까지 할 건 없고.」
웃음으로 분위기를 조금 풀어내면서, 김성조는 비로소 긴장을 누그러뜨리고 미소를 짓고 있는 세연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세연 양.」
「뭐든 물어보세요!」
「박 교수님이 타티아나에게 직접 부탁했다고요? 혹시 다 같이 만났습니까?」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은 그것뿐이었다.
원래 세연과 타티아나는 친구였다고 들었으니까, 어떤 아주 자그마한 우연만 있다면 세 사람의 인연이 한곳에 모이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세연은 신발 앞 코로 바닥을 슥슥 그으며 말했다. 약간 머쓱해하는 분위기였다.
「예, 그…… 제가 좀 멋대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와 버려서…….」
「그래서요?」
「음…… 타티아나를 보자고 해서 만났는데 제가 교수님도 같이 보면 좋겠다고 해서…… 아, 어떤 일이 있었는진 알아요.」
「안다고요?」
「이 애가 말해 줬어요. 그래서 불편해할까 싶었는데 괜찮다고 해서…….」
김성조가 세연에게 가지고 있던 약간 좋았던 첫인상은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세연이 아무것도 모르고 타티아나를 다시 박 교수에게 데리고 갔다고 해도 열불이 날 판인데, 심지어 불편해하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고?
하지만 김성조야말로 무책임하게 먼저 그렇게 타티아나를 인사시키려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무어라 할 수도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우스워질 뿐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답답함에 말문이 막혀 왔다. 점점 표정 관리가 잘 안 된다.
어쨌든 이제 와서 이미 준 직책을 억지로 도로 거두는 건 정말 최악의 방법이니 그저 박 교수와 마주하지 않게 하는 게 최선이겠다고 생각하며 신경 쓰고 있었는데…….
“안 될까요? 지휘자님.”
그런 김성조를 보며 타티아나가 다시 한번 조심스레 물었다. 세연의 견학 신청이 거절될까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타티아나.”
김성조는 지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단순하게 박 교수의 제자인 세연을 견학시키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마음의 빚을 내려놓고 있는 건가?
“오늘 이렇게 리허설 괜찮겠습니까?”
급기야 김성조는 그렇게 불안한 심정을 내보였고, 타티아나는 지체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물론이에요. 저 애가 보고 있으니 더더욱 잘 해내야겠죠.”
리허설에 대한 긍정적인 포부이기도 하지만, 어딘가 약간 위화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친구가 보고 있기에 잘 해야 한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목소리엔 과시욕 등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되레 후배나 학생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겠다는 분위기.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김성조는 지금 타티아나가 무언가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이곳에 서 있음을 느꼈다. 약간 흐릿해져가던 불빛이 다시 제 색을 되찾고 있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시어도어에게도 물어보도록 하죠.”
당연히 오케스트라의 의사도 들어 봐야 하기에 대표인 악장의 허락이 필요했다. 대화를 듣고 있던 악장 시어도어는 가볍게 허락했다.
그렇게 관계자 모두의 허가로 세연은 견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김성조는 그녀에게 지시했다.
「세연 양은…… 저쪽 빈 의자에 앉아서 보시죠. 리허설 중에 소리를 내거나 일어나서 돌아다니거나 하지만 않는다면 자유롭게 행동하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
맑게 웃으며 감사를 표하는 세연을 보며 김성조는 여전히 감정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아무 말도 않고 있으니 무어라 하지 않고 가만히 보고 있을 뿐이었다.
세연은 바로 지정된 자리에 가서 앉지 않고 타티아나를 돌아보았다.
{나 조용히 견학할게. 타티아나. 오늘 고마워 정말.}
{도움이 된다면 좋겠네요. 그리고…… 잠시만요.}
타티아나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하더니 가지고 온 가방을 열었다. 그녀의 가방은 가죽으로 씌워진 사각형의 고급스러운 서류가방이었다.
그 안에서 꺼낸 악보를 확인하고, 타티아나는 몇 개를 세연에게 건넸다.
{가져가세요.}
{악보……?}
{오늘 리허설하는 곡들의 총보예요. 보면서 견학하시길 추천드릴게요.}
멍하니 악보를 받아든 세연은 몇 장을 넘겨 보더니 울상이 되었다.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정말 미안하고 창피한데, 나 이거 읽을 줄 몰라…….}
{그래도 보세요.}
엄격한 태도로 타티아나가 가방을 탁 닫았다. 그 소리에 세연은 고개를 들고 타티아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타티아나는 성정이 상냥하고 부탁을 잘 받아 주곤 하지만, 음악에 있어서만큼은 타협이 없고 꼿꼿하다.
{독보 공부를 충실히 하셨다면 읽어지는 것들이 있을 거예요. 이곳엔 선생님도 도슨트도 없어요. 그 유일한 지도를 가지고 세연이 따라와야 해요.}
그 말대로였다. 여기 모인 음악가가 수십 명이 넘지만 그중 세연을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무언가 얻어 가고자 한다면 직접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악보마저 없다면 정말 깜깜해진다. 타티아나는 그 점을 신경 써 준 것이다.
태도는 엄격했지만 그 마음씀씀이가 전해졌는지 세연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 네가 하라는 거니까…… 해 볼게. 그런데 이걸 날 주면…… 네 건?}
{전 이미 암보해서 괜찮아요.}
타티아나는 태연하게 이야기했고, 세연도 납득하는 것 같았다. 무대에 오르는 피아니스트가 악보를 암보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김성조는 안심할 수 없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타티아나는 악보를 보고 있었고, 심지어 피아노 파트뿐이라면 모를까 예술감독으로서 음악 전체를 바라보고 의견을 내기 위해선 총보가 필요했다. 그건 지휘자인 김성조도 당연히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걸 세연에게 줘 버리고는 맨손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박거리는 구두소리가 몇 번 울리고, 그녀는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
당연히 자신의 자리라는 듯 피아노 의자에 앉아선 이쪽을 바라보는 타티아나를 보며 김성조는 이대로 진행할 수밖에 없음을 느꼈다.
그리고 준비를 마친 오케스트라를 확인하고 지휘봉을 휘둘렀을 때, 그는 타티아나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목이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