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03화 (703/1,277)

##  703화

시어도어는 악장으로서 지휘자 김성조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앞으로 며칠 안 남은 연주회에 대한 스케줄 관리나 단원들의 연주 역량, 컨디션 케어 등이 주된 내용이었으나, 최근엔 대부분 타티아나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두 사람의 의견은 거의 일치했다.

타티아나라는 어린 피아니스트의 실력은 가늠이 잘 안 될 정도로 탁월하다.

하지만 그 시기가 조금 일렀다. 눈이 먼 욕심 많은 어른들이 그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맡기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앞으론 최대한 부담을 줄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 것이 옳다.

오케스트라의 큰 기둥 중 두 사람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리허설에 임하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얕보고 있던 기둥은 그렇게 물렁물렁하지 않았다.

‘……악보를?’

타티아나는 가지고 온 악보를 친구에게 줘 버리곤 피아노 앞에 앉았다. 악보 없이 리허설에 들어가는 건 프로들 사이에서도 흔한 일이 아니었다.

연습 역시 실전처럼 하라는 건 고금을 막론하고 통용되는 진리이지만, 타티아나에겐 주어진 시간도 짧았고 맡겨진 일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어도어가 이대로 할 거냐며 눈짓을 아무리 해 봐도 김성조는 모종의 확신이 있는지 그대로 리허설을 감행했다.

“…….”

시어도어는 지휘에 맞추어 바이올린의 지판을 짚고 활을 움직였다. 이미 몇 번이고 반복하여 통일시킨 오케스트라의 화음은 어김없이 화려하게 뿜어져 나왔다.

프로 음악가들의 거대한 음악. 음향적 조건이 완벽하지 않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리허설이지만 거기엔 전혀 자비가 없었다. 무겁고 장대하다.

저 멀리 있는 임세연은 가까이에서 보는 오케스트라의 합주에 잔뜩 얼어붙어 있었다. 연주자가 아님에도 압도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주변 모두를 하나의 오페라로 끌어들이는 전주가 준비되고, 그 거대한 무대 위에 빈손으로 올라온 타티아나가 손끝을 세웠다.

‘이 얼마나…….’

오페라 속의 주인공처럼 등장한 타티아나는 가볍게 건반을 터치해 나간다. 웅장한 오케스트라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고 연약한 목소리.

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한 방울의 울적한 페이소스는 음악의 표면에 떨어지자마자 파문을 그리며 이어 전체를 울렁이게 만들었다.

한순간에 모든 음악의 흐름이 타티아나에게 종속되었다.

안개처럼 구석구석 파고드는 음색과 무시무시하게 예민한 통제력. 모순될 것 같은 두 요소가 어떻게 공존하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다.

시어도어는 이 작은 피아니스트가 얼마나 뛰어난 솔리스트였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

드레스도 아닌 편안한 사복 차림인데도 타티아나는 이미 무대 위에 선 것처럼 그 역량을 드러내고 있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주일간 단원들과 연습하며 착실하게 쌓아올렸던 음악적 완성도, 주요 주제의 포인트나 보완점, 오케스트라와의 합의 등은 이미 모두 타티아나라는 피아니스트의 안에 들어가 있었다.

평면들이 집합인 악보와 달리 그녀의 머릿속은 유연하게 그 모든 것을 해부하고, 정렬하고, 합친다.

그 모든 것의 총망라라 할 수 있는 한 지점을 그녀는 피아노로 선도하고 있었다.

솔리스트로서의 최대한의 능력을 활용해서 예술감독의 일까지 완벽하게 해내고 있는 것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활을 움직이며 시어도어는 전날 리허설을 떠올렸다.

타티아나는 제 시간에 와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긴 했다. 어떠한 부담을 내려놓고 일단 연주회에 최대한 집중하겠다는 분위기가 확실하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그녀의 초점이 음악 자체가 아니라 연주회에 향해 있음을 김성조와 시어도어는 놓치지 않았다. 음악적 완성도로 자연스레 성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망치지 않으려 애를 쓰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못해 넘칠 지경이었지만, 이전처럼의 폭발력은 아무래도 옅어졌다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늘 타티아나의 집중력은 다시 부활했다.

어떤 이유가 있는진 확실하지 않다. 오늘 데리고 온 친구에게 무언가 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다만 어떤 것이든 간에, 이유를 찾은 타티아나는 지금까지 시어도어가 만나 본 그 어떤 피아니스트보다도 절실하고 맹렬하게 음악에 몰두하고 있었다.

“자, 여기까지.”

리허설 1회차를 마친 김성조가 지휘봉을 내려놓자 여기저기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시어도어는 단원들이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어깨 힘을 빼고 임했다가 큰코다친 기분이겠지.

그러나 김성조는 이 정도 수준의 리허설을 예상했다는 듯 악보를 슥 보더니 타티아나에게 말했다.

“우리가 했던 여러 연주들 중 가장 앞서 있는 것 같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예술감독.”

정열적이면서 동시에 잔인하리만큼 욕심 많고 가혹한 지휘자는 다시 타티아나를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옆으로 바로 앉은 타티아나 역시 그만큼 엄격한 음악가였다.

“나아가지 않으면, 의미가 없죠.”

“하하, 맞습니다.”

혹자는 수백 년 된 음악들을 되풀이하는 클래식은 정체되어 있다고 평한다.

그러나 예술의 본질을 캐내어 선보이는 것은 장르의 변화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이하고 현대적인 장르는 다만 방향을 달리하고 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인간은 어째서 음악에 감동하는가.

이 본질에 기준을 두고 음악에 깊이 파고드는 이들은 인류가 운 좋게 잡아낸 몇 가지의 진동들이 생명의 심장을 뒤흔듦에 집중하며, 그 진동을 보다 깊고 강렬하게 만드는 방법을 연구한다.

수많은 장르에서 수많은 음악가들이 시도 중이지만, 시어도어가 보는 타티아나는 클래식 분야에서 다른 그 무엇보다 본질에 손끝을 향하고 있는 음악가였다.

“그럼 조금 더 나아가 볼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김성조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는 자신이 욕심이 많았음을 시인하고 앞으론 편하게 타티아나를 케어하겠다고 말하기까지 했지만, 이렇게 뛰어난 음악가 집단을 앞에 두고 그럭저럭 하려고 하는 지휘자는 이 세상에 없다.

타티아나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무쪼록.”

“3악장의 두 번째 주제 이후의 솔로 말인데…… 보자, 몇 페이지냐면…….”

기억에 남는 소절이 있는지 김성조가 악보를 뒤적거렸고, 시어도어 역시 빠르게 보면대 위의 악보를 넘기면서 기억을 되살렸다. 전부 좋았었는데, 어딜 말하는 거지?

그런데 악보가 휙휙 넘어가는 소리만이 가득한 와중, 타티아나의 목소리가 해답을 내놓았다.

“44페이지에서 3페이지 더니까 47페이지겠네요.”

“……네?”

“맞을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얼빠진 목소리를 낸 김성조는 타티아나가 말하는 대로 악보를 확인했고, 다시 한번 크게 눈을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다 외우고 있는 겁니까?”

타티아나는 이제 와서 뭘 묻는 거냐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제 일이잖아요?”

협연자로서 피아노 연주를 완벽하게 해 주는 일, 그리고 예술감독으로서 정확하고 빠른 피드백을 하기 위해 총보를 숙지하고 오케스트라에 익숙해지는 일.

타티아나는 그 전부를 단 하나도 내려놓지 않고 양손에 꽉 쥐고 있었다.

“…….”

고집스럽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시어도어는 결국 이 완고한 음악가에게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

세연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타티아나가 이 먼 곳에서 이 대단한 음악가들과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두 눈과 두 귀 그리고 피부 전체로 똑똑히 알아들었다.

‘상상은 했지만…….’

타티아나가 이 사이에서 보여 주는 존재감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열여섯 살이라고 해서 지휘자나 악장에게 어수룩하게 끌려 다니거나 연주를 실수해서 리허설 진도를 제대로 못 나가는 일은 전혀 없었다.

타티아나는 그 누구보다 앞서서 정리된 음악을 펼쳐 들었고 거기엔 어떤 의심도 머뭇거림도 없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연구와 집념이 지금 타티아나의 음악을 이루고 있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저 애가 이곳에 온 건 일주일도 안 되지 않았던가?

“…….”

하지만 감탄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세연은 온 신경을 집중해서 리허설을 견학하고, 그중 일부는 확실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물론 혼자선 그저 감상이나 하다가 끝났겠지만, 타티아나가 건네준 악보는 그녀를 감상자가 아니라 견학자의 위치에 정확하게 앉혀 놓았다.

유려한 필체로 악보에 적혀 있는 기호들은 정갈하고 그 의미가 뚜렷했다. 러시아어로 적힌 메모도 많았는데, 무슨 뜻인지 몰라도 음악을 들으면 그 뜻이 절로 해석될 정도였다.

음악의 설계도이자 해석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악보 덕분에 세연은 타티아나의 연구를 먼발치에서나마 조금 따라가면서 수많은 것들을 습득할 수 있었다.

박 교수가 왜 협주곡 연습을 견학으로 시작하라고 했는지, 세연은 단 30분 만에 확실하게 알아 버렸다. 혼자서 아무리 협주곡 연습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 30분만큼의 공부를 하기엔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걸 당연하다는 듯이…….’

세연은 잠자코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분명 같은 나이다. 그리고 피아노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나이도 그렇게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고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이 격차는 대체 어디에서 벌어져 있는 건지 모르겠다.

러시아라는 세계 최고의 음악강국이라는 환경? 엄청난 투자를 자연스럽게 해 줄 수 있는 베르체노프라는 배경? 타고난 재능? 혹은 그 전부.

교수가 말했듯 타티아나는 세상의 음악적 자산들을 끌어 모으고 있는 피아니스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바라보던 중 세연은 타티아나와 눈을 마주했다.

“…….”

타티아나는 말이 없었다.

조금 차갑고 우울해 보이는 인상.

그 성정은 정말 상냥하고 다정한데도 타티아나는 일견 어두운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그 어두움마저도 음악가의 무기로 제련해낸다. 뜨거운 용광로에 집어넣곤 망치로 두들기고 차가운 기름에 담가 단단하게 만든다. 타티아나는 자신의 모든 것을 끌어내어 피아노의 강철 현을 울리게 하는 방법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강인하고 무결한 피아니스트로 보이는 타티아나의 눈빛엔 아주 미약한 미련이 남아 일렁였다.

그녀는 세연에게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였다. 바로 저 눈빛 때문에 세연은 타티아나를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왜 나일까.’

무엇을 원하는진 그리 헷갈릴 건 없었다.

타티아나가 바랄 만한 건 하나뿐이었고, 리사이틀에 초대하거나 지금 악보를 준 것처럼 꽤나 분명한 태도를 보여 주기도 했으므로.

세연이 음악적으로 일가를 이룬 어엿한 피아니스트가 되어 마주 보는 것. 타티아나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왜 그 대상이 세연인진 모르겠다.

물론 그녀가 가까운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 같은 다른 친구들에게도 비슷한 태도를 보이는진 모르겠지만, 세연은 타티아나가 자신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기대를 가지는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실력도 눈에 안 찰 텐데.

“…….”

하지만 세연은 이런 상황에 이미 익숙했다. 교수가 세연의 엉성한 연주를 듣고도 그녀를 거두었던 것부터가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다.

생각은 복잡하지만 이제 와서 따지고 들거나 변명거릴 찾을 궁리는 하지 않았다.

세연은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의심보다는 믿음으로, 부정보다는 긍정으로. 세연은 할 수 있다는 확신을 목에 두르고 허리를 바로 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한다.

‘그냥 한 번 협연을 해 보는 게 방법일지도…….’

직접 견학으로 보고 나니 비로소 갈피가 잡힌다.

이런 건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차근차근 협주곡 레퍼토리를 늘려서 될 일 같지도 않았다. 세연에겐 그만큼의 시간이 없다.

정확한 목표를 눈앞에 두고 전력질주를 해도 될까 말까다. 세연은 협연을 한번 잡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돌아가면 박 교수님에게 물어봐야지. 세연이 혼자선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교수가 도와준다면 도전할 수 있는 범위는 무궁무진하게 늘어난다.

그 도전에서 어떻게 성과를 거두어야 하는지 역시 타티아나가 간접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여러 가지가 다르고 모자라지만, 세연은 자신 역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고였어.}

여전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타티아나를 향해 세연은 작게 입을 열어 말했다. 순수한 감탄과 진지한 각오로 고양된 기분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런 세연을 본 타티아나는 눈을 깜빡였다.

서늘하던 얼굴엔 곧 다채로운 감정들이 깃들었고, 그것들은 곧 옅은 미소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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