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4화
한정된 하루하루는 순식간에 흘러간다.
내 일과는 크게 달라짐 없이 고정되어 있었다. 오전엔 피아노 연습, 오후엔 오케스트라 리허설. 저녁엔 예술감독으로서의 연구와 피드백.
온종일 오케스트라 관계자들과 연주회에 대한 생각밖에 안 하는 평범한 일과였지만, 가끔은 관계자가 아닌 사람이 끼어들기도 했다.
{벌써 내일이구나…….}
{그렇네요.}
호텔 라운지에 있는 카페에서 난 세연과 만나 티타임을 가졌다.
요 며칠간 그녀와 마주하는 건 거의 리허설룸에서뿐이었다. 가까이에 있으니 식사 정도는 매번 같이 할 법도 했지만, 그녀는 내 시간을 과하게 뺏지 않겠다는 약속을 정말 지켜 주었다.
그러나 오늘은 마지막이니만큼 세연이 직접 호텔로 찾아와서 차를 마시게 된 것이다.
“…….”
난 그간 그녀가 견학하는 모습을 계속 보긴 했지만 무엇을 느끼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선 듣지도, 물어볼 기회도 없었다. 때문에 한 번쯤은 이런 자리를 가지고 싶기도 했다.
누군가를 따를 필요는 없지만 혹시 필요하다면 협주곡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은 되었는지, 앞으론 어떻게 할 것인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차를 홀짝이던 세연이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 저녁에 교수님 만나서 협연 이야기 했었다?}
{견학한 부분에 대해 평가하셨나요? 어떤 이야기가 오갔을지 조금 궁금하네요.}
{아니! 그건 첫날이었고…….}
난 고개를 갸우뚱했다. 교수님과 할 이야기가 그것 외에 무엇이 있지?
세연은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듯 잠시 머뭇거리더니 결국 솔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협연 하고 싶다고 했어.}
{아.}
그녀에게서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리허설 도중 가끔 세연을 보면 그녀는 열렬한 눈빛을 내 쪽으로 보내오곤 했다. 난 그 열기가 내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세연의 내부로 향하길 바랐다.
감상자가 아닌 연주자가 되기 위해서라면 타인의 음악이 아닌 자신의 음악에 집중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세연이 연주자의 천성을 타고났다는 건 느끼고 있었지만 확신이 없었는데, 내 착각만으로 끝나진 않은 것이다.
그녀는 분명히 오롯한 연주자의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 사실을 내가 얼마나 기껍게 여기는지 그녀가 알까.
난 감정을 숨기며 조용히 찻물로 입술을 적셨다.
{그런가요.}
{응. 내년 콩쿠르 나갈 거면 협연도 확실히 할 줄 알아야 하기도 하고…… 8월이라 좀 늦은 것 같기도 하지만.}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내년 5월. 1년도 남지 않은 시간이라 촉박하다면 촉박하지만, 난 그녀라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전혀 늦지 않았어요.}
{그럴까?}
{저도 협연자로서의 역할에 비중을 주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어요. 크게 다르지 않아요. 결국 피아노 연주자라는 건 같으니.}
이미 솔리스트로서 세연은 또렷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피아노라는 악기를 다루는 기술자로서의 역량은 갖춰져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협주곡이라고 해서 연주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음악을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만 걷어내면 된다. 그녀라면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겠지.
{세연이라면 협연도 잘 하실 거예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제가 장담할게요.}
{……장담까지?}
{예.}
독선적인 나보단 세연 쪽이 협연자로선 훨씬 더 나으리라 생각한다.
사교적이고 밝은 그녀는 주변에 잘 녹아들며 조화를 이룬다. 좋은 음악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내려는 습관도 지니고 있었다.
클래식 음악이라는 같은 시스템을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세연 같은 협연자와 음악을 하는 건 굉장히 쉬우리라.
게다가 그녀는 그러면서도 인상적인 음악을 다루는 연주자였다.
어떻게 보아도 잘 할 것 같아서 그렇게 확신을 주었더니, 세연은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말해 주니까 막 용기가 샘솟는 것 같아. 고마워.}
{……다행이에요.}
그 후로도 우리는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많은 작곡가들과 곡들의 이름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가 내려가길 반복했다. 세연은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의욕도 충분한 연주자였다.
하지만 수백 년간 쌓여 온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밤새도록 할 순 없었다.
찻잔을 다 비우고 나자 약속이라도 한 듯 세연이 의자를 살짝 뒤로 뺐다. 방금 전까진 테이블에 붙어 있듯 했다면 지금은 바로 떠날 것 같은 가벼운 태도였다.
그래도 아쉬움은 있는지 세연이 말했다.
{찻잔이 작은 게 아쉽네.}
{잠깐 쉬다가 가시겠어요?}
{아니, 가야지.}
방에 올라가서 조금 더 이야기를 해도 괜찮겠지만, 세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벌떡 일어나며 작별을 고했다.
{오늘은 푹 자! 그리고 컨디션 관리 잘 해. 타티아나.}
{…….}
{내일 봐.}
내일은 홀에서 보게 될 테니 오늘 미련 가지지 않겠다는 것 같았다. 그녀는 휙 돌아선 발걸음을 옮겼다.
난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불러 세웠다.
{세연.}
{아니, 아니야. 노는 건 여기까지. 붙잡지 마.}
{가방 가지고 가셔야죠.}
{……?}
내 쪽을 돌아본 세연은 내가 가리키는 의자에 그녀의 가방이 그대로 있는 걸 발견하고는, 빨갛게 된 얼굴로 후다닥 돌아와서 가방을 챙겼다.
{내 정신 좀 봐…… 어…… 고마워.}
가벼운 미소로 세연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왜 빨리 떠나려 하는지, 그러면서도 허둥거리다가 가방은 왜 놓고 가는지 그 마음을 약간은 알 것 같았다.
난 그녀와 아주 친한 친구가 될 순 없었다. 하지만 꼭 그런 관계로만 마주해야 하는 것은 아닐 테지.
“…….”
세연이 떠나고 카페에 혼자 남게 된 나는 찻잔에 약간 남은 찻물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
새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다. 토요일 오전 7시. 오늘은 그간 내가 이곳에 있었던 이유를 보이고 증명하는 날이었다.
“음.”
신중하게 몸 상태를 확인하면서 하나하나 생각을 짚어 나갔다.
준비는 어떻게 되어 있지? 어제 리허설에서 만들어 갱신해 놓은 음악을 떠올려 본다. 단기간에 이룩한 결과임에도 꽤 만족스럽다. 이젠 그것을 무대에 올려 청중들 역시 만족하길 바랄 뿐.
무대의 관제에 대한 것도 확인하기 위해 스테이지 매니저도 만났었고, 피아노의 상태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조율사에게 면밀하게 부탁했다. 뵈젠도르퍼를 오랜 기간 만져오셨다고 하니 믿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무대 외적인 부분도 확인했다.
김성조 지휘자님은 음악감독으로서의 역할도 빈틈없이 해내셨는데, 갑자기 변동된 연주회를 맡아서도 아무 문제없이 노련하게 모든 것을 처리해 놓으셨다. 티켓에 대해선 환불된 것이 거의 없었고, 심지어 환불된 것도 곧바로 모두 팔렸다고 한다.
가격에 대한 할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내 경력이 일천한 것과 별개로 이 연주회의 주력은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였기에 그 부분에 있어선 변화가 없었다.
때문에 내게 주어진 옵션은 본래 기획되었던 연주회만큼 잘 해내는 것, 단 하나뿐이었다.
“후후…….”
참 어려운 연주회였다. 부담스럽기도 하고. 하지만 난 어려운 조건을 마주할수록 기뻤다. 한계를 뚫고 착실하게 한 계단 오르는 기분은 쉬운 일들만으로 겪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궁금했고, 이 역시 그 일환이기도 했다.
“…….”
박 교수님과 세연이 보고 있으리란 생각은 우선 차치했다. 신경을 쓰다가 내 실력을 제대로 못 내면 그만큼 바보 같은 일도 없었다.
어차피 이미 섞일 대로 섞인데다가 몇 번이나 최선을 갱신해 나가며 새롭게 덧씌운 내 음악적 지문은 이제 과거의 박제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물론 이렇게 갱신한 궤적도 과거에서부터 향해온 외삽이기에 하나하나 추적한다면 뉘앙스 정도는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교수님이 배신자의 음악을 기억하고 계실까?
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으앗.”
연주회가 아닌 잡생각을 한 탓일까. 스트레칭을 하다가 옆으로 기우뚱 넘어가 버렸다. 침대 위로 풀썩 누워 버린 나는 한동안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양 팔로 밀치며 일어났다.
양손으로 공중에 뜨는 빅토르처럼 말도 안 되는 짓은 할 수 없지만, 이렇게 번쩍 일어나는 것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었다.
가볍게 씻고, 오늘은 오후쯤 나갈 계획이라 룸서비스를 뭘 시킬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 타티아나, 일어났니?
“깜짝 놀랐어요…… 예, 방금이요.”
그간 메시지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주고받았지만 전화는 꽤 오랜만인 기분이었다. 아나스타샤의 목소리가 무척 반가웠다.
그나저나 모스크바는 지금 자정을 넘긴 시간일 텐데, 내 쪽 시간을 신경 써서 전화 주었다는 것이 기뻤다.
아나스타샤는 오늘이 어떤 날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가벼운 안부를 물어왔다.
- 컨디션은 어떠니?
“좋아요. 잠도 잘 잤고요.”
- 다행이야. 정말로.
웃음소리가 잠시 들렸지만, 곧 아나스타샤는 나지막이 말했다.
- 지금이라도 가면 어떨까…… 하고 지난 며칠간 고민했었어. 하지만 세연 임이 있다고 하니까, 그 애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하길 바랄게.
아나스타샤는 내가 세연의 음악에서 무엇을 바라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게 내가 종종 부리는 선생님 같은 태도나 오지랖의 일종이라 생각하는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해해 주고 있는 건 확실했다.
참 이상하다고 생각할 만도 한데,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게 고마웠다.
“열심히 할게요. 아나스타샤.”
몇 분 정도 아나스타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내 연주회를 응원해 주고 싶었을 뿐이었으므로 길게 대화할 건 그리 없었다. 모스크바는 늦은 시간이기도 했고.
자고 일어난 뒤에 마저 이야기하기로 마무리를 짓고, 전화를 끊은 나는 연락처를 쭉 둘러보았다.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해도 몇 명 안 되지만 적어도 오늘 일을 알려야 할 사람들이라면 확실히 있었다. 일단 아버지나 루슬란 오빠.
두 사람은 내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동안 한두 번 정도밖에 연락해 오지 않았지만, 그게 내 독립적인 행동을 존중하고 응원하는 뜻이라는 걸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존중받고 있다면 반대로 내가 알아서 해야 할 일도 있었다. 적어도 연주회 당일 메시지 정도는 해야 하는 것이다.
난 오늘 컨디션도 좋고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메시지를 아버지와 오빠에게 각각 보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니 전화는 나중에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에게도 답장이 날아왔다.
[노력한 만큼 네게 축복이 있기를 바라마. 타티아나.]
아버지는 언제나 그렇듯 믿고 있으니 잘 해내라는 짧은 메시지였는데, 오빠의 메시지는 아침인사였다.
[좋은 아침. 타티아나.}
[잠자리에 안 들고 계셨나요?]
[일할 게 있어서.]
이 시간까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요즘 부쩍 바쁘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있었다.
[나나 아버지나 주말에 왜 더 바쁜지 모르겠어. 동생 연주회도 못 가고. 글러먹었지?]
약간 자조적인 느낌이 드는 메시지였다. 난 너무 그러진 않았으면 하는 심정으로 답장을 보냈다.
[마음만으로도 충분해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 다음엔 무슨 일이 있어도 갈게.]
[무슨 일이 없을 때 오세요.]
[그게 맞나?]
클래식 음악은 여유가 있어야 잘 감상할 수 있으니까 그게 좋다고 생각한다. 만사 제쳐놓고 연주회를 보러 오면 제대로 감상도 못 하지 않을까? 물론 오빠의 관심사는 음악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렇게 응원을 들으니 조금 더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따가 전화할게요. 주무세요.]
[알았어. 걱정 않고 잘게.]
[걱정은 해 주시고요.]
[내가 계속 말을 잘못하는 건가? 아니면 네가 날 가지고 노는 건가. 잘 모르겠네…….]
말꼬리 끝에 농담을 붙여 던지자 오빠는 질색했지만 저 멀리에서 킥킥거리며 웃고 있을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막 메시지를 마무리 지었을 때였다.
[연주회 잘 해.]
늘 그렇듯 간결하고 담백한 메시지. 에르네스트였다.
아나스타샤는 그가 늘 이렇게 짧게 메시지 하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표한 적도 있었다. 그때 난 그런 불만을 크게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짧은 메시지에 길게 답장해도 뭔가 이상했고, 그렇다고 잘 하겠다고 짧게 답장해도 뭔가 어색한 사람들끼리 메시지 하는 느낌이 들어서 별로였다.
무언가 더 하실 말씀 없어요?
난 한참이나 메시지 창을 노려보다가, 결국 깜짝 놀라는 표정의 이모티콘만 하나 보냈다.
[뭐야 그건?]
이모티콘 같은 건 전혀 쓰지 않는 내가 갑자기 보낸 게 이상한지 에르네스트는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난 숨죽여 웃으며 화면 위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