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5화
오전엔 손톱 관리 같은 것도 하고, 느긋하게 내 컨디션을 끌어 올리면서 준비했다.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간다.
점심식사를 하고 시간에 맞추어 프리모르스키 콘서트홀로 향했다.
리허설로 계속 왔었던 곳이라 이제 익숙하지만, 오늘은 이곳에서 연주회가 열린다는 생각을 하니 또 색다른 기분이었다.
들어서서 리허설룸으로 가니 지휘자님과 몇몇 단원들은 이미 와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평범한 인사들이 가볍게 오간다. 하지만 어제와 달리 옅은 긴장감이 이곳저곳에 떠다니고 있었다. 웅성거림은 거의 없이 악기를 만지는 소리들만 부스럭거린다.
앉아서 무언가 보고 있던 지휘자님이 고개를 들어 내 쪽을 바라보았다.
“타티아나.”
무언가 살피는 기색. 협연자의 상태가 어떤지 확인하는 건 음악감독으로서의 일이기도 했다. 난 한 번 컨디션을 무너뜨린 적이 있기도 했고.
그렇게 눈을 마주하길 몇 초 정도, 일단 외관으로 보는 컨디션 체크는 통과한 것 같다.
“좋아 보이는군요.”
좋아야 하는 날이니 좋아야 했다. 그러나 지휘자님에게 그런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밝게 웃었다. 지휘자님 역시 웃음으로 화답했다.
난 이번엔 피아노 앞에 가서 앉지 않고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오늘은 바로 리허설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정해진 시간이 되었다.
지휘자님은 일어서서 빠르게 출석만 체크했다. 단원들 모두 빠짐없이 자리에 있음을 확인한 뒤엔 곧바로 설명에 들어갔다.
“그럼 오늘 일정을 다시 확인하도록 하죠. 우선 지금부터 모두 모이는 대로 의상과 무대를 최종 점검 하겠습니다. 리허설은 그 후의 드레스 리허설 한 번만 예정되어 있습니다.”
의상을 갖춰 입은 상태로 청중이 없는 무대 위에서 하는 드레스 리허설은 상황에 따라서 한 번만이 아니라 두세 번 하기도 하지만, 우린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았으므로 오늘 한 번만 하고는 곧바로 본 무대였다.
상당히 빡빡한 일정. 하지만 일정관리와 체력관리 모두 신경 쓴 최적안이었다.
“질문 있으면 받겠습니다.”
여기 있는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내로라하는 프로 연주자들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일정에 대한 큰 이견 같은 건 없었다. 의상을 다른 곳에서 받아 와야 하는데 나갔다 와도 되냐는 등의 질문이 있었을 뿐이다.
곧 주위가 조용해졌고 질문도 다 받았다는 것이 확인되자, 지휘자님은 손을 휙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자, 준비합시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단원들은 각자 악기를 들고 우르르 일어섰다. 아직 연주회까진 시간이 남았지만 벌써부터 행동들이 하나로 모여들고 있는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나 역시 그 무리에 하나로 섞여들었다.
다들 악기를 들고 있는데 나만 손가방을 들고 움직이니 약간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피아노 연주자들은 으레 겪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단원들과 의상실로 향하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다가와선 내 어깨를 톡톡 쳤다.
“타티아나.”
“아, 밀라.”
저번 일요일부터였을까. 밀라는 가끔 내가 괜찮은지 살피며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난 밀라가 이전에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화를 내며 정면으로 지휘자님에게 항의한 적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기에 그녀에게 살갑게 굴기도 했다. 그녀가 화를 내 주길 바란 건 아니지만, 날 생각해서 대신 나서 주었다는 건 감사한 일이었다.
“기분은 어떠니? 긴장되진 않아?”
“괜찮아요. 후후, 긴장은 되지만…… 이건 기대감에 따라오는 긴장일 거예요.”
“참…… 원래 잘 해왔다는 건 알지만 정말 대단하다니까.”
사실 긴장감 같은 건 잘 모르겠고 그저 무대에 서고 싶을 뿐이었지만 밀라는 날 보며 신기하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이야기를 나누며 복도를 걷기도 잠시, 의상실에 도착했다.
다른 단원들과 달리 내 의상은 드레스룸에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밀라는 손을 흔들며 내게 말했다.
“네 드레스 봤어. 색감 너무 좋더라. 네가 입으면 정말 예쁠 것 같아.”
“감사해요.”
“이따 대기실에서 봐.”
난 감사의 뜻으로 눈인사를 보내고는 바로 옆의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기다리던 직원들은 미리 세팅해 둔 하늘색 드레스를 가지고 왔다.
원래는 보라색 계열을 입으려 했지만, 어두운 색으로 비슷하게 섞여드는 것보단 이번엔 밝은 색이 어떻겠냐고 지휘자님과 여러 감독님들이 제안해서 그렇게 정했다.
딱히 큰 상관은 없었다. 되레 하늘색 드레스를 보니 신선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2년 전 가을, 중앙음악학교의 입학 실기 시험을 치러 갔던 날을 난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때도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음악계에 다시 첫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이번에도 첫 도전을 하는 기분이었다. 물론 협주곡 연주 경험은 몇 번 있었지만, 챔버 오케스트라와 하는 특별 연주회나 리허설이 아니라 이렇게 2관 편성의 대형 오케스트라와 하는 연주회는 처음인 까닭이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드레스 입는 것 도와드릴게요.”
“부탁드려요.”
직원 몇 명이 다가와서 날 도와주었다. 혼자서는 입는 것도 벗는 것도 버거운 드레스이지만 몇 명이 도와주자 금방이었다.
의상을 갖춰 입곤 대기실로 향했다. 이미 정장 차림의 단원들이 메이크업을 각자 직접 하거나 직원의 도움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중 한 명이 내 쪽을 바라보더니 손가락을 튕기며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오늘의 주인공 입장하십니다.”
“와우, 잘 어울려요.”
“무대가 아니라 곧바로 런웨이에 오르는 건 아니겠죠?”
칭찬이 조금 과하신 게 아닌가 싶지만…… 안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보단 나았다.
드레스는 곧 연주자들의 정장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연주복으로서의 기능성만 따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대에 오르는 이상 모든 연주자들은 곧 연기자이기도 했다. 보이는 것도 중요한 것이다.
난 모두가 보내오는 칭찬에 감사를 보내고는 안내에 따라 헤어스타일링과 메이크업도 받았다. 머리는 자연스럽게 내리되 방해되지 않도록 하고, 드레스가 밝으니 화장도 너무 어둡고 진하지 않고 옅게 하기로 했다.
연기자로서의 모습도 천천히 완성되어 갔다.
“시간 되었습니다. 모두들.”
의상까지 준비된 단원들이 저마다 시간을 보내며 집중력을 갈무리하고 있자, 대기실 문이 열렸다.
깔끔한 슈트 차림의 김성조 지휘자님은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오랜 시간 함께하진 않았지만 그간 강도 높은 리허설을 하면서 단원 한 명 한 명 모두의 성격과 특색 등을 정확하게 파악한 사람의 눈빛이다. 그 눈빛이 얼마나 정확하고 예리한지 잘 아는 단원들은 모두들 자세를 바로 하며 기다렸다.
이윽고, 지휘자님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보니 정말 멋지군요. 여러분이 제가 함께 할 분들이라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하하하, 지휘자님도 쿨합니다. 그 넥타이가 포인트입니까?”
“딸이 사 준 거라서.”
“따님이 안목이 좋네요.”
농담이 오가면서 분위기가 풀어지고, 지휘자님은 그 한가운데로 들어오셨다.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있던 단원들의 집중력은 자연스레 지휘자님에게 향했다.
저렇게 능숙하게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카리스마를 갖추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걸까. 아니, 어쩌면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저런 카리스마가 있기에 지휘자를 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바라보고 있자, 지휘자님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저벅저벅 이쪽으로 걸어오셨다.
내가 올려다보니 지휘자님은 허리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타티아나. 오늘 정말로 돋보일 겁니다. 모든 것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으니…….”
이러저런 수사가 붙는 칭찬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휘자님은 내가 어떤 말을 듣는 걸 가장 바라는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유감없이 실력 발휘해 주시길 바랍니다.”
“…….”
“할 수 있겠죠?”
눈에 띄는 의상과 태도로 사람들의 시선을 잠깐 받을 순 있겠지만, 음악이 시작되면 귀를 사로잡을 줄 알아야 연주자라 할 수 있다.
난 오로지 그 부분만을 생각하며 지난 시간들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오늘만큼은 자신 있어야 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내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지휘자님은 경쾌하게 몸을 돌리고는 모두를 향해 말했다.
“드레스 리허설이지만 실제라 생각하며…… 음, 이런 이야기는 안 해도 잘 알겠죠?”
프로들에게 긴 말은 낭비다. 지휘자님은 피식 웃더니 한 손을 들며 손짓했다.
“갑시다.”
그 말을 기다리고 있던 음악가 집단은 모두 동시에 발을 내디뎠다.
***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저녁. 블라디보스토크의 거리는 각자의 저녁을 즐기기 위해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붐빈다.
세연 역시 오늘 저녁의 목적이자, 이 도시에 온 목적을 보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목적지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프리모르스키 콘서트홀. 블라디보스토크의 시내 한복판에 있는 콘서트홀이었다. 겉보기엔 그리 크지 않지만 옛 양식으로 지어진 내부의 600석짜리 홀은 그야말로 클래식 음악의 역사와 함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입구로 막 들어서려던 세연은 세워져 있는 포스터 앞에서 멈춰 섰다.
러시아어를 읽을 수는 없었지만 익숙했다.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스와레soiree 콘서트 포스터였다. 이렇게 보는 타티아나의 사진은 그녀 또래의 친구가 아니라 이미 프로 피아니스트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가면서 몇 번 봤던 포스터였지만 오늘은 이 연주회를 본다는 실감 때문이었을까, 세연은 한동안 그렇게 읽지도 못하는 포스터를 바라보다가 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안에서 세연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 사람을 찾아냈다.
「교수님, 여기예요!」
앉아 있던 박성재 교수는 세연을 보고는 웃으며 일어섰다. 세연은 빠른 걸음으로 교수에게 갔다.
아직도 어린애를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세연을 바라보던 교수가 말했다.
「늦게 않게 시간 맞춰서 잘 왔구나. 세연아.」
「제가 몇 살인데요.」
「몇 살이었지?」
「정말!」
세연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배를 타고 왔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교수는 그것을 잘 알면서도 농담을 건넸다.
그렇게 교수와 농담을 주고받던 세연은 나란히 자리에 앉아선 물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그래, 조금만.」
「저도 그래요.」
저녁에 하는 스와레 콘서트는 가볍게 식사를 하고 오는 편이 좋으니 두 사람이 함께 먹어도 괜찮았겠지만, 교수는 오늘 저녁에 볼일이 있다며 따로 콘서트홀에서 만나자 말했다.
함께 여행을 온 것도 아니라서 교수와 계속 같이 붙어 다닐 수도 없는지라 세연은 약간 아쉬운 마음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며 티켓을 꺼냈다.
「어…… 혹시 좌석은 어디세요?」
「음, 파르테르parterre석의 3-9이구나.」
「와, 완전 좋은 자리. 전…… 윽, 뒤편이에요.」
지휘자에게 직접 받은 티켓과 세연이 나중에 구한 티켓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세연이 또 다시 한 번 아쉬움을 느낄 때였다.
「!?」
갑자기 교수가 재빠르게 세연이 들고 있던 티켓을 낚아채고는 자신의 티켓으로 바꿔 주었다.
너무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아무 반응도 못 했던 세연은 티켓이 바뀌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며 교수를 불렀다.
「교수님!?」
「네가 앞에 가서 보거라.」
「아니, 전…….」
「괜찮으니까.」
평소와 같은 인자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세연은 혹시 또 가까이에서 견학하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부터 할 수밖에 없었다. 리허설과 본 무대의 차이도 가까이에서 비교해 보면 좋겠지.
그러나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교수는 지금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안다는 투로 말했다.
「친구의 연주회는 멀리에서 보면 재미가 없지.」
「…….」
세연에게 있어서 타티아나는 하나로 말하기 어려운 관계였다. 교수의 입장에선 더더욱 그럴 테고. 하지만 교수는 이번엔 다른 것을 따질 필요 없다는 듯 친구라는 관계를 우선시하라 말했다.
물끄러미 티켓을 내려다보던 세연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신경 쓰지 말려무나.」
교수는 가볍게 말하며 휙 돌아 시간을 확인했다. 사람들의 분위기도 어느새 조금 바뀌어 있었다. 사람들의 열기가 서서히 느껴진다.
「슬슬 시작하려나 본데. 가 보자꾸나.」
「네.」
앞장서 가는 교수를 따라 걸으면서 세연은 수백 명의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에 서서히 동화되어 갔다. 앞으로 펼쳐질 연주회에 대한 기대감이 차오르며 세연을 들뜨게 했다.
이미 리허설을 몇 번 견학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세연은 무대를 예단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며칠 동안 타티아나와 오케스트라는 세연이 듣기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굉장한 속도로 음악의 완성도를 발전시켜 나갔다. 처음에 완벽했다고 느꼈던 음악은 그 완벽을 넘어 더 완벽해지고, 또다시 그 완벽을 넘어섰다.
그렇게 준비된 음악이 리허설룸이 아니라 콘서트홀에서 펼쳐지면 대체 어떻게 느껴질지 상상할 수도 없는 건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