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6화
유럽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스페인에서 여행을 시작한 마테오는 수많은 나라를 거쳐 이곳 극동의 도시에 도착했다.
본래 여행을 좋아하는 그에게 있어서도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여행은 굉장히 고되고 긴 여정이었다. 하지만 드디어 이 기나긴 여행에도 끝이 보였다.
그 기념으로 마테오는 오페라 티켓 한 장과 피아노 협주곡 연주회 티켓 한 장을 구매했다.
그간 많은 유럽 도시들을 건너오면서도 돈을 아끼기 위해 음악회 등을 관람하는 일은 없었지만, 지금은 남은 돈도 적당히 있었고 그리 부담되는 가격도 아니라서 여행의 마무리로 괜찮겠단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러시아에 와서 클래식 연주회를 놓친다는 건 큰 손해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먼저 보게 된 것은 블라디보스토크 마린스키 극장에서 열린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였다.
원래 마린스키 극장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것으로만 생각했던 마테오는 사실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이곳에 지어진 곳도 생각했던 것보다 굉장히 크기도 하고 그 수준도 뛰어나서 감동적이었다.
오페라 관람을 만족스럽게 마친 마테오의 기준은 급상승해서 피아노 협주곡 연주회에 대한 기대감은 굉장히 높아져 있었다.
게다가 미리 알아보니 연주회를 이끄는 지휘자와 협연자인 피아니스트는 러시아에서도 굉장히 유명해서 더더욱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그가 잔뜩 기대했던 연주회는 시작도 하기 전부터 삐걱거렸다. 아니, 삐걱 정도가 아니라 우지끈하며 부러져 버렸다.
지휘자가 지병으로 지휘봉을 놓았고, 피아노 연주자는 그 지휘자를 보고 온 것이라면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어 버리니 기대가 컸던 만큼 김이 새 버렸다.
당연히 연주회가 취소될 거라 생각한 마테오는 환불절차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콘서트홀 측에 문의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변은 기가 막혔다. 다른 지휘자와 연주자를 구해서 연주회를 속행한다는 것이었다.
‘이래서 되겠냐고…….’
마테오는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취미로 즐길 정도로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연주회를 2주도 안 남겨 놓고 중요한 기둥이 두 개나 빠져 버렸는데 얼른 갈아 끼우고 그대로 진행한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심지어 바뀐 객원 지휘자는 둘째 치고 협연 피아니스트는 겨우 열여섯 살이었다.
장난치는 거냐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물론 실력이 없는 피아니스트는 아니고, 최근 이력을 보면 청소년 콩쿠르에서 우승하기도 하고 러시아의 송년 콘서트에 출연하기도 하는 등 이런저런 활동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긴급하게 땜질할 피아니스트를 찾아 넣은 것이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러시아인들은 일처리를 이렇게 하나?
달리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는 피아니스트에 대해 더 찾아볼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마테오는 그냥 티켓을 취소하고 좋은 기억만 가지고 돌아갈까 생각하다가, 이왕 이렇게 된 것 한 번 보기로 마음먹었다.
‘어떨지 궁금하긴 하니까.’
딱히 좋은 마음으로 기대하는 건 아니었다. 약간은 삐딱한 시선. 러시아가 아무리 클래식 강국이라지만 이런 식으로 연주회를 해도 잘 할 수 있는지 직접 보고 싶었다.
‘여기 다들 비슷한 생각 하고 있을걸?’
좌석을 찾아 앉은 마테오는 다리를 꼬고 앉아선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연인이나 부부끼리 온 것 같은 사람도 있고 자신처럼 혼자 온 사람도 있었다. 저마다 약간씩 기대를 하고 있긴 하지만 그건 미지에 대한 기대감에 가까웠지 앞으로 무대에 오를 연주자에 열광하는 기대감이 아니었다.
이런 기대는 그 미지가 실망감으로 바뀌면 한순간에 싸늘하게 바뀔 것이다. 겨우 열여섯 살짜리 협연자는 포스터에서 보니 여리여리해 보였는데, 무대에서 싸늘한 반응이라도 받으면 어떻게 될지 걱정될 지경이었다.
여행객인 그가 알 바 아니긴 하지만.
‘언제 시작하는 건데?’
그렇게 마테오는 연주회에 집중하기보단 그 여파 등으로 관심이 분산되어서 딴 생각을 하며 무대를 보고 있었다.
잠시 후 웅성거림이 사그라들더니 무대의 조명들이 꺼졌다.
한 남자가 무대 옆으로 올라왔다. 거의 자동적으로 박수가 그에게 향했고, 마이크를 잡은 그가 말했다.
“□□□□ □□□ 안녕□□□□.”
인사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겠지만 그 이상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인내하며 기다리길 얼마나 지났을까. 사람 이름이 몇 번 불리는 것 같더니 곧 관중들의 박수 소리와 함께 오케스트라가 무대 위로 입장했다.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엔 손색이 없었다. 이곳에선 가장 유명한 오케스트라이기도 하고, 이렇게 봐도 여유 있고 익숙하게 무대 위로 자리를 잡아나가는 것이 보였다.
문제의 지휘자와 피아니스트가 뒤이어 입장했다.
조명을 받으며 무대 한가운데에 선 지휘자는 한국 출신이지만 주로 러시아에서 활동하며 잔뼈가 굵다고 했다. 지금 보니 단원들도 그를 존중하는 것 같았고, 생각보다 뛰어난 지휘자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피아니스트는 전혀 학생 같아 보이지 않았다.
“□□□ □□□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
알 수 없는 언어 사이에서 한 이름만이 정확하게 귀에 꽂혔다.
단순히 보자면 160cm를 조금 넘길까 하는 키에 앳된 얼굴. 멀리에서 봐도 눈에 띌 정도로 예쁘장한 소녀였다.
하지만 그건 외견만 보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사뿐히 무대 위로 걸어나오는 태도에서 이미 평범한 소녀가 아니란 직감이 확 들었다.
체형은 가늘지만 꼿꼿한 자세는 분명 전문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무대를 내려다보던 눈빛이 슥 돌아 청중석을 한 번 돌아본다. 별로 긴장한 것 같지도 않았다.
마테오는 마린스키 극장에서 본 발레리나들을 떠올렸다.
백조의 모습을 흉내내던 발레리나들은 꼭 저런 눈빛으로 관객들을 보며 춤을 추고 있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저 피아노 쪽으로 걸어가고 있을 뿐인데도 우아한 백조처럼 느껴졌다. 고고한 존재감은 외견뿐만이 아닌 전체적인 분위기로부터 나온다.
“…….”
말문이 막힌 마테오가 멍하니 보고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타티아나는 지휘자와 악수를 나누고 이어 악장과 손을 잡고 있었다.
가볍게 친애를 표시하고 신뢰를 나눈 그들은 다시 각자의 위치로 흩어졌다. 악장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앞으로, 지휘자는 포디움 앞으로. 그리고 피아니스트는 피아노 앞으로.
마치 잘 짜인 연극처럼 부드러운 움직임들이었다. 저 세 사람이 만난 지 불과 이주일도 안 되었다는 게 안 믿길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과 관계없이 같은 음악을 공유하는 음악가들이 얼마나 동화되어 하나가 될 수 있는지 마테오는 미처 간과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에 대한 증명이 곧바로 시작되었다.
‘모차르트…….’
미리 본 프로그램 북에 올라와 있던 곡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0번.
지휘자와 피아니스트가 한 번에 바뀌어 버리면서 당연히 프로그램도 바뀌었기에 불만스럽게 생각했던 음악이었지만, 오케스트라가 뿜어내는 음악을 듣자마자 그 불만은 강제로 잠재워졌다.
장대한 서사시의 막이 서서히 열렸다.
비극을 노래하는 오페라와도 같이 미처 저항할 수 없는 강대한 무언가에 대한 절망이기도 하고 찬가이기도 한 음악.
인간의 언어로 하면 그저 장황하고 복잡하기만 했을 관념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전해져 온다. 마테오는 그것을 언어로 재해석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오케스트라가 그려 놓은 배경 위에서 타티아나가 연주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열여섯 살이라고?’
클래식 음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이게 저 나이에 다룰 만한 음악이 아니라는 데엔 동의할 것이다.
모차르트를 연주하는 손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거나 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단 4개의 건반을 순서대로 눌렀을 뿐인데, 느껴지는 깊이가 달랐다.
다른 피아니스트들이 1cm남짓을 누른다면 타티아나는 족히 그 두 배, 아니면 피아노를 뚫고 무대 바닥까지 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바닥을 딛고 오른 음악은 마테오의 전신을 휘감는다.
두 눈으로 지켜보는 것과 들리는 것에서 느껴지는 괴리가 너무 커서 현실감각이 무뎌질 정도다. 환상 속에서 헤엄치는 기분으로 마테오는 음악에 휩쓸렸다.
“…….”
상심, 그리고 처절한 애원.
이 모차르트의 음악은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느껴 보았을 절실이라는 감정에 손을 대고 있었다.
분노나 기쁨처럼 자주 느끼는 감정은 아니지만, 단 한 번이 강렬해서 좀처럼 잊을 수 없다. 기억 속 깊이 아로새겨져 있던 절실했던 순간들의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음악과 함께 너울거린다.
곧 환희에 찬 음색으로 노래를 부르고 찬미하는가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가라앉으며 우울하게 뇌까린다. 막연한 희망에서 비롯되는 허무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질 뿐이다.
인간은 단순했다. 슬픈 음악을 들으면 슬퍼지고 기쁜 음악을 들으면 기뻐진다.
순간적으로 여러 가지 음악이 드러나며 교차할 때도 그러한 감정 변화는 매우 빠르게 따라간다. 눈앞에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수십 가지의 그림들이라면 잔상으로 흐릿하게 보일 뿐이지만, 귀는 눈보다 훨씬 예민하고 정확했다.
다양한 감정들이 튀어나와 쌓이면서 기억을 건드리기도 하고 생각을 뒤흔들기도 했다. 그 모든 순간순간을 파악하기 어려운 와중에도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이 음악의 중심엔 타티아나가 있었다.
음악의 수준이 낮아서 감정을 건드리지 못할 정도라면 그냥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우스운 음악일 뿐이겠지만, 그녀가 다루는 것은 하나하나가 날카롭게 폐부까지 파고드는 예리함을 갖추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한 사람의 연주자가 이런 연주를 할 수 있는 것인지 쉬이 납득이 안 갔다.
“…….”
휘몰아치는 감정들의 폭풍우가 흘러간 후엔 타티아나의 솔로 카덴차가 이어졌다.
피아노 소리뿐인데도 타티아나가 직접 목소리를 내어 말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만약 러시아어를 알아들을 수 있다면 지금 저 뜻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어이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테오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 답답함 위에 타티아나가 전달해 오는 회색빛의 음악이 차곡차곡 쌓이며 마테오의 머리를 흔들어 놓았다.
이대로 있다간 숨이 막힐 것 같단 생각을 할 때쯤, 순간적으로 오케스트라가 폭발하며 주변의 세계를 확장시켰다.
크기를 키운 음악이 호수 위에 뜬 달처럼 홀을 밝혔다.
그 아래에서 타티아나는 다시 홀로 고고하게 노래를 부르다가 날개를 펴고는 날아가 버렸다.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그녀를 추모하듯 오케스트라가 크게 출렁이며 음악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백조가 날아가 버린 호수엔 파문이 일지 않는다.
끝끝내 그 노래를 전부 다 하지 못하며 끊어지듯 미약하게 토해 내고, 천천히 사그라들면서 가늘게 숨을 내쉬다가 음악은 마무리되었다.
‘……하.’
마테오는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치려다가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면 안 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반쯤 들어 올린 손을 간신히 내려놓았다.
처음의 삐딱한 자세는 이미 완전히 집중하는 자세로 바뀐 지 오래였고, 마테오의 눈은 피아니스트만을 좇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허리를 바로 편, 정갈한 자세였다. 반쯤 내리깐 눈이 건반을 내려다본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음악에 집중하고 있었다.
주변은 고요했다.
그러나 이 고요 속에서 들끓는 것이 얼마나 뜨겁고 맹렬한지, 마테오는 알 수 있었다. 바로 자신의 속에도 똑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