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07화 (707/1,277)

##  707화

김성조는 양손 끝으로 지휘봉을 길게 잡고 오케스트라를 바라보았다.

하나로 일치된 음악가 집단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전율이 일 정도로 훌륭했다. 완벽한 대열을 갖추고 무장한 군인들의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언제든지 청중들을 향해 음악을 쏘아 보낼 준비가 되어 있는 베테랑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웅장한 오케스트라들의 에너지를 상쇄하듯, 그의 뒤에서도 강렬한 무언가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 앉혀 놓으니 더하군.’

천천히 그 무언가를 느낀다. 우아하게 떠다니는 백조 같기도 하고, 수풀 속에서 포악하게 발톱을 휘두를 준비를 하고 있는 사자 같기도 하다.

이 동물적인 인기척을 어깨 뒤로 두고 있으니 소름이 돋는다. 김성조는 현실에서 동떨어진 기분을 만끽하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

그곳엔 이 음악가 집단 사이에서 가장 어린 한 연주자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음악의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1악장이 끝난 후의 빈틈마저도 그녀에겐 음악이었다.

청중들은 바스락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모두 공기 중에 녹아 있는 것처럼 조용했다.

김성조는 헛웃음을 흘렸다. 방금 전까지 느꼈던 감각과 눈으로 보는 현실이 너무나 다르다.

타티아나의 음악은 정말 한 번에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그 깊이와 저변이 넓었다.

그녀는 감성적인 연주를 한없이 하는 스타일인가 하면, 음악이 멈춘 시간마저도 자신의 것으로 취하는 철저히 계산적인 타입이기도 했다.

피아니스트로선 정말 이상적인 형태였다. 김성조는 미하일이 피아니스트로서의 타티아나에 대해선 전혀 걱정하지 않던 것이 생각났다. 다만 아직 많이 어리기에 불안정한 부분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불안정함마저도 무대 위에 올라와 오롯이 피아니스트만으로 있을 땐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타티아나가 곧 고개를 들었을 때, 김성조는 음악에 집중해야 함을 느꼈다.

“…….”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제 20번. K.466 그 2악장이 시작되었다.

온화한 음색. 1악장이 허무주의자들의 다과회라면 2악장은 그보다 훨씬 더 희망찬 메시지를 노래하고 있었다.

좌우로 까딱이는 듯한 동작. 길게 오르내리는 스윙. 타티아나는 이 악장을 두고 줄이 긴 그네를 타는 이미지로 그려 내길 바랐다. 그 해석은 상당히 독특했지만 김성조는 따라 주었고, 오케스트라 역시 매끄럽게 타티아나의 그네가 되어 주었다.

발을 구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바람이 그네를 밀어준다. 질량이 없는 것처럼 아무 저항도 하지 않는 타티아나는 그대로 바람에 실려 떠오른다. 그네는 점점 높게 오르며 풍경을 넓고 광대하게 보여 주다가, 어느 순간 하늘에서 멈추었다.

체공하는 시간감각을 그리듯 불규칙하게 늘어지는 박자로 타티아나가 건반을 연주했다. 건반이 단 0.1초 늦게 눌려지면 공중에 뜬 채 체감되는 시간은 열 배는 더 길어졌다.

고전음악답지 않은 까다로운 박자였지만 타티아나와 오케스트라는 하나가 된 것처럼 아주 정교하게 서로의 화성을 짜 맞추었다.

김성조는 피아노 소리에 양 팔을 맡기며 그 음색과 박자를 눈에 보이도록 했다. 플루트 쪽에 정확한 지시를 주며 구조를 탄탄히 했다.

발을 구르지 않고, 바람이 잦아들자 그네는 힘을 잃으며 서서히 다시 내려왔다.

‘지금.’

오케스트라의 투티로 시작되는 2악장의 2번째 주제는 지금까지의 부드러운 분위기를 반전시키며 펼쳐졌다.

바로 뒤따른 타티아나는 푸르게 그려 나가던 캔버스를 갑자기 회색으로 덧칠해 버리고는, 그 위를 손으로 스치며 덮어 버렸다.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캄캄해졌다. 음악의 초점은 외부에서 내부로 좁혀졌다. 심상이 압축되며 숨구멍을 틀어막고 소용돌이친다.

귀로 들려오는 뚜렷한 시각적 이미지에서 무언가를 회상하듯 펼쳐지는 강렬한 음악으로 변모했다.

사람 한 명을 뒤흔들며 폭풍 속에 빠뜨리기 위해선 굳이 그 몸 전체를 휩쓸리게 할 필요 없었다. 단지 몸 안에 한 줌의 바람을 밀어 넣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내적 폭풍은 꽤나 복잡하고 당황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마술 같은 음색은 선명하게 내외적 심상의 구분을 해낼 정도여서 이 악장이 추구하는 바를 정확하게 표현해 냈다.

갑작스럽지만 유연하게, 독자적이지만 분리되지 않도록.

정말 어려운 흐름임에도 타티아나는 노련하게 그 모든 것을 하나도 허투로 하지 않고 피아노로 그대로 그려 냈다.

김성조는 여기에서 오케스트라를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고 그저 타티아나를 보조할 정도로만 일깨우고 부추기는 역할을 했다. 호른을 제어하고 오보에를 붙인다. 각 주자들은 지시에 따라 움직여 주었다.

급하게 빨라지거나 앞서서 나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그렇게 폭풍의 기억을 되짚어 보다가 눈을 뜨면 다시 산들바람에 삐걱대는 그네만이 존재했다.

눈을 크게 뜨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외엔 아무것도 없다.

피부로 감지되는 산들바람이 선선하다. 훨씬 현실적이고 분명한 음악을 마주하는 느낌.

하지만 방금 전까지 몰아치던 내적 폭풍이 결코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소멸하지 않았음을 모두가 안다. 그 존재를 인식하고 있기에 조금 전까진 없었던 긴장감이 마음 한구석에서 고개를 들고 뚫어져라 이쪽을 보고 있음을 느낀다.

모차르트의 천재적인 협주곡은 잔기술을 부리지 않는다.

불협화음 등을 섞어 넣어 장난을 치거나 리듬에 변화를 주는 기교를 부릴 필요도 없었다. 그저 처음 그리던 그네를 그대로 그리고 있을 뿐이지만 이미 이 음악은 단순한 놀이를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시대를 호령한 천재 작곡가에 대해 떠올리던 김성조는, 그 유산을 완벽하게 현실에 다시 재림시킨 연주자가 있음을 깨닫는다.

‘무대에서 최고로 잘 한다는 게 말이 쉽지…….’

타티아나는 어느 수준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다음 완벽을 찾아나서는 연주자였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무한정 발전해 나갈 수만은 없는 일이다. 여러 이유로 인해 리허설에서 가장 좋은 음악을 만들어 놓고도 무대 위에선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인 것이다.

리허설 때의 80%만 해내더라도 큰 문제 없는 경우가 많다. 90%면 대단한 것이고. 100%를 해내는 연주자들도 흔치 않았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당연한 듯이 거기에서 한 발자국을 더 내딛었다. 충분한 합의 위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더 세심하게 해내는 것이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김성조는 지금까지 이 20번 협주곡을 수십 명도 넘는 피아니스트들과 협연해 왔다. 그런 긴 경험으로 김성조는 이 곡의 특징이나 해석 등을 면밀하게 꿰고 있었다.

나이가 어린 연주자들이 이 곡을 접했을 때 풀어나가는 방식을 보자면 또랑또랑하게 연주하다가도 어느 순간 집어삼켜져서 지나치게 감정을 불어넣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아주 원숙하고 금욕적으로 이 곡을 대하고 있었다.

수준 높은 몰입으로 임하지만, 얼굴부터 앞세워 곡에 맞부딪히지 않고 발끝과 손끝으로 그 표면에 파문을 만든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김성조는 너무나 잘 알았다. 나이 많고 경험도 많은 피아니스트들도 이렇게 모차르트를 능숙하게 다루긴 쉽지 않았다.

리허설 때도 몇 번이나 느낀 바이지만 타티아나의 음악적 완성도는 이질적일 정도로 출중한 부분이 있었다.

그런 생각을 다시 할 즈음, 타티아나가 2악장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고개를 돌린 김성조는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

방금 해낸 연주에 대한 성취감이나 만족 등은 없었다. 아직 음악 속에 있는 그녀에겐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김성조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타티아나는 다시 피아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3악장 알레그로 아사이allegro assai가 이어졌다.

‘빠르게…….’

타티아나의 손놀림은 피아노 건반을 치는 것이 아닌 깃펜으로 편지를 쓰는 사람처럼 유연하게 움직였다. 좌우로 움직이며 글자를 적는 것처럼 긋고 구르며 그 끝을 흐린다.

낭만적이면서도 우아한 손길에 따라 선율이 음악을 이루고 두어 번 흔들리다가 내려온다. 빠른 속도였지만 그 어디에도 급한 느낌은 없었다.

원래 필체도 정갈한 것이 음악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김성조는 그런 생각을 하며 타티아나가 편지를 다 쓰기까지 기다렸다가, 가을 단풍과 함께 날아든 편지를 받아보고는 그 답장을 오케스트라를 통해 보냈다.

“…….”

고풍스러운 느낌으로 답인사를 보내며 오케스트라는 주제를 보다 극적으로 폭발시켰다.

김성조는 거대한 붓을 휘두른다는 느낌으로 지휘봉을 앞으로 향했다. 두 명의 바순 주자에게 넓고 거대한 편지지를 준비시키고 플루트로 색을 입힌다. 수십 개의 현악기들이 그의 지휘봉을 따라 정확한 각도로 움직이면서 색이 입혀진 편지지에 짧은 시를 읊는다.

지나쳐 간 필적들은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뇌리에 쌓이다가,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끝맺음을 맺는 순간 하나로 합쳐지며 정돈되었다.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압도적인 실력은 피아니스트와 지휘자의 의도에 따라 확실한 음악을 그려 내며 홀을 차츰 점령해 나갔다.

‘다시…….’

답장을 받은 타티아나 역시 다시 깃펜을 들었다. 건반 위를 스치듯 지나가는 손가락은 마치 달라붙은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정확하게 음의 형태를 그리고 있었다.

이야기가 심화되며 오케스트라가 서서히 다가왔다. 교차되는 교류가 아닌 하나가 된 음악으로 치솟아 오르다가, 다시 조용히 멀어져 가길 반복한다.

김성조는 심혈을 기울여 오케스트라의 위치를 정확하게 조절했다.

반걸음만 더 다가가도 균형이 무너져 내린다.

리허설룸과 달리 이곳엔 수백 명의 청중들도 있으므로 무게중심은 어느 한곳이라 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순간 변화했다. 그는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모든 것을 파악하며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이 협주곡을 이루도록 이끌었다.

타티아나 역시 노련하게 그 흐름에 따라와 주었다. 욕심을 내어 앞서 나가거나 반대로 뒤로 숨어 버리지 않는다. 적당히 자신의 얼굴을 보여 주면서 궁금증이 일 때쯤이면 슥 물러난다. 굉장히 정교한 균형감각이었다.

하지만 그저 순종적이란 뜻은 아니었다. 일견 오케스트라와의 협조에만 신경을 쓰는 듯하던 그녀는 자신에게로 무게중심이 오는 순간이 오자 놓치지 않고 그대로 낚아채어 그 위에 피아노의 무게마저 얹었다.

순간 덜컥 하면서 무대가 그녀에게로 향한다. 수백 킬로그램이나 나가는 피아노는 모든 오케스트라의 악기보다 무겁다.

속절없이 끌려가는가 싶으면 툭 놓아준다.

김성조는 빠르게 다시 균형을 되찾으며 오케스트라를 일으켰다. 이 순간의 줄다리기는 곡의 텐션을 팽팽하게 하는 훌륭한 양념이 되어 주었다.

타티아나는 함께 하는 연주자들의 수준에 따라서 더더욱 강해지는 피아니스트였다. 지금 그녀는 프로 연주자들에게 맞추어 자신의 실력을 가감 없이 뿌려 대고 있었다.

“…….”

강렬한 옥타브 아르페지오 상승과 오케스트라의 하이라이트, 그리고 타티아나의 카덴차가 이어졌다.

맹렬하면서도 고상한 카덴차는 짧게 치고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이 타티아나라는 피아니스트에 모든 조명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고전적인 화성은 그렇게 특별할 것이 없는데도 연주 자체는 너무나 특별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깃펜을 든 타티아나가 작별인사를 써 내려가고, 오케스트라는 밝은 화성으로 그 옆에 화려한 장식들을 덧붙인다. 그리고 아껴 놓았던 모든 에너지를 폭발시키듯 모든 악기들이 피날레를 향해 내달렸다.

모차르트의 두 개뿐인 단조 피아노 협주곡 중 하나인 제20번 협주곡은 고뇌와 회상을 거쳐 기쁨과 환희로 끝맺음되었다.

“!”

열렬한 박수 소리가 마치 3악장에 이은 4악장처럼 터져 나왔다. 어마어마하게 큰 호응이었다.

김성조는 등 뒤에서 울리는 소리에 마주하며 고개를 숙였고, 곧 피아노 앞에 있던 타티아나 역시 일어나 찬사에 답례를 보냈다.

타티아나를 바라보고 있던 김성조는 그녀의 모습이 다른 연주자들과는 사뭇 다르기도 함을 느꼈다. 박수 소리를 그저 즐기거나 자신이 이룬 성과에 대한 보답으로 받아도 될 텐데, 그녀의 태도는 더할 나위 없이 정중하고 진지했다.

타고난 것 같은 성실함과 점잖음. 그녀는 어떠한 숭고를 따르는 것처럼 음악에 열중하며 앞을 바라본다. 그 모습은 마치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고상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는 어떠한 비애가 검게 흐르고 있음을 느낀다.

감성과 이성의 길항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며 한 사람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이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질적인 모습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는 것이다.

“…….”

하지만 피아니스트로선 완벽에 가깝다.

인간적인 모습은 조금 내려놓을 수 있어야 그 분야의 정점에 설 수 있게 된다고, 평소 그런 생각을 종종 해 왔던 김성조는 멍하니 타티아나를 바라보다가 자조적인 헛웃음을 흘렸다. 이 또한 낡은 욕심의 일부이리라.

고개를 돌린 타티아나가 감사를 표하는 무구한 눈빛에 그는 생각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단지 계속해서 피아노를 연주해 나갈 그녀가 언젠가 원하는 안식을 찾길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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