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08화 (708/1,277)

##  708화

1부가 끝나고 다른 단원들보다 먼저 대기실로 들어온 나는 갑자기 몰려드는 직원들 때문에 깜짝 놀랐다.

“훌륭했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밖의 소리 들리십니까? 그칠 줄을 모르는군요.”

“저희 오케스트라가 지휘자도 협연자도 잃었을 땐 어떻게 되나 했었는데 정말…….”

여기저기에서 안도와 감사 그리고 축하의 말들이 빗발쳤다.

홀을 대관한 것이라면 직원들이 이렇게까지 말할 이유는 없겠지만, 프리모르스키 필하모닉이란 체제 아래에서 묶여 있는 상주 오케스트라인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일이라면 홀 직원들 입장에서도 남의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난 가볍게 웃으며 그 인사들을 받아 주었다.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지만 누군가에게, 혹은 음악가들의 세계에 약간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면 정말 기쁜 일이었다.

“물 드릴까요? 수건도 있고.”

“혹시 필요하시다면 물티슈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에어컨 온도는 어떻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시중을 들어주려 하니 조금 난감했다. 난 대접받으려는 생각 같은 건 별로 없었고 그리 까다로운 성격도 아니었다.

그냥 물 한 병만 받아서 마른 목을 축였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0번은 심혈을 기울여 온갖 감정들을 넘나들며 구성해 나가야 하는 곡이었다. 집중한 만큼 머리에 열이 올라 있어서 조금 더웠다.

몸이 시키는 대로 따르자면 물을 전부 마셔 버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이 열을 떨어뜨리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두 모금 정도만 마신 후에 내려놓았다.

내 전용으로 마련된 자리에 앉아서 잠시 어딘가 흐트러진 곳은 없는지 점검하고, 몸 상태도 확인하고 있다 보니 곧이어 지휘자님과 단원들도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분위기 괜찮지 않습니까?”

“아주 뜨겁던데.”

단원들은 저마다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성공적인 연주를 마친 후의 희열, 열기 등이 뒤섞여서 훅 끼쳐 온다.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보자 눈이 마주쳤다. 가장 앞에 있던 시어도어가 다가오더니 내게 말했다.

“멋지게 해냈군요. 타티아나.”

“여러분 덕분이에요.”

나 혼자서 아무리 모차르트에 파고든다 하여도 오케스트라가 시큰둥하게 받아 주었다면 결코 이런 음악을 할 수 없었을 테지.

다 함께 몰입하고 무게를 실어 주었기에 보다 깊은 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협연자로서 그리고 예술감독으로서 일하고 어울리면서 난 협주곡에 대한 묘리를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었다.

수백 명의 청중들의 몰입과 감동을 이끌어내려면 일단 가장 가까운 수십 명의 사람들부터 설득해야 한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이번 증명으로 보다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는 건 누구에게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경력 있는 바이올린 연주자인 시어도어도 짙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저희야말로 타티아나와 함께한 덕에 모차르트에 집중해 본 것 같군요.”

곁에 있던 몇몇 단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많은 연주와 노하우 등을 가진 연주자들에게도 이번 협주곡은 만족스러운 재확인이었던 것 같다.

자연스레 이야기는 방금 전 연주에 대한 내용으로 넘어갔다.

2악장에서 주제를 반전시키며 초점을 외부에서 내부로 옮겨가는 내용은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3악장에서 오케스트라와 함께 떠올린 심상이 제대로 홀 한가운데에 맺혀 있었는지.

우리가 그간 연구하고 리허설했던 부분들을 똑바로 무대에서 펼쳐 냈는가에 대한 감상과 피드백이었다.

“어쿠스틱이 좋아서 그런지 훨씬 더 선명했던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박자도 전혀 흐트러짐 없었고.”

“지휘자님이 정말 열정적이시던데요.”

분위기에 편승해서 좋은 이야기들만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이 사람들은 정말 연주가 별로였다면 그것을 분하게 여기며 2부에 더더욱 최선을 다할 연료로 사용할 음악가들이었다.

방금 전 음악이 우리가 했었던 것 중 가장 완성도 높았던 것이란 데엔 딱히 이의가 없었고, 때문에 어디에서도 아쉬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1부 음악에 대한 자체적인 평들이 마무리되는 때였다.

우리에게 아직 남은 음악들이 있다는 걸 지휘자님이 일깨워 주었다.

“피로는 어떻습니까? 타티아나.”

30분이 조금 넘는 연주 동안 집중하느라 피로가 쌓이긴 했지만 이 정도는 끄떡없었다. 난 손목을 까딱거리며 장난스레 웃었다.

“열 곡도 할 수 있어요.”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뜻이라는 걸 이해한 지휘자님은 피식 웃더니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그렇게까진 필요 없습니다. 한 곡만 하면 되니까.”

“그렇죠? 다음 곡.”

“잘할 수 있느냐고 묻진 않겠습니다. 아마 잘하겠죠. 하지만…….”

신뢰받는 연주자라는 건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말씀해 주셔도 되나 싶었는데, 지휘자님은 무어라 더 덧붙이려다가 흐지부지하게 말끝을 흐렸다.

고개를 갸웃거리자 지휘자님은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무대를 가장 기다렸던 건 타티아나일 테니.”

“?”

어떤 연유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진 잘 모르겠다.

난 그저 협연자를 필요로 하는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위해, 그리고 더 작게는 나 개인의 협주곡 경력을 위해, 그리고 더 작게는 이 연주회를 보고 있을 한 연주자를 위해 무대에 서는 것이었다.

어떠한 기대감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사람들 중 제일 기다렸다고 하니까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그렇게 보인 걸까?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니 지휘자님은 그냥 웃기만 했다. 그리곤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듯, 짧게 말했다.

“최선을 다해서…… 마지막까지 잘해 봅시다.”

난 마지막이란 단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연주회가 끝날 때면 난 성취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동시에 공허함 같은 감정 등을 느끼기도 했다. 앙코르를 이어 나가고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조금씩 희석되기는 하지만, 그건 어떠한 후련함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작한 것을 끝내지 않을 순 없었다.

시작이 있다면 끝이 존재하고, 또 끝이 있어야 다시 시작이 있을 수 있는 법이다. 난 지휘자님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휘자님은 믿겠다는 듯 굳은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

홀을 빠져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빠져나오는 와중에도 세연은 방금 들었던 음악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정말 자주 듣는 레퍼토리였다. 프로 피아니스트들의 실황 연주도 몇 번이나 들어 본 적 있었고.

심지어 타티아나 본인의 연주로도 많이 들어 봤다.

「리허설로 그렇게 많이 들었는데…….」

하지만 이런 감상이 드는 건 처음이었다.

견학을 하면서 들었던 것과 홀에서 듣는 것이 차이가 날 것이란 건 이미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지만, 상상한 것 이상으로 차이가 크게 났다.

오늘 타티아나의 연주는 어딘가 세연의 가슴에 콱 틀어박히는 것 같은 부분이 있었다.

아직 공부가 짧아서일까, 정확하게 형언하여 어떤 지점을 짚어 낼 순 없었지만, 세연은 평생이 가도 이 음악을 잊지 못할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동시에 정반대로 이런 생각도 든다.

난 언제쯤 되어야 저런 연주를 할 수 있게 되는 걸까?

「…….」

연주 자체는 지금도 할 수 있었다. 세연은 요 며칠간 견학을 하면서 그저 듣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타티아나가 준 총보를 가지고는 혼자서 빌린 연습실에서 피아노 파트를 연습하며 조금씩 익혀 보았다.

기교적으로 그리 까다로운 부분은 없었고, 타티아나가 워낙 깔끔하게 연구도 잘해 놨을 뿐더러 매일같이 레퍼런스라 할 수 있는 음악을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다 보니 세연의 협주곡 실력은 순식간에 높아졌다.

덕분에 그녀는 벌써 악보를 보면서 어느 정도 연주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올랐다.

하지만 아직 교수에게 타티아나의 총보를 보여 준 적이 없어서 세연은 이 이상으로 레슨을 받지 못했다. 타티아나는 딱히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 총보를 교수에게 보여주면 안 될 것 같단 것 정도는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오로지 세연 한 명에게만 타티아나는 자신의 연구를 보여 주길 허락한 것이다.

연습하면 할수록 확실해졌다. 실력차는 명백하고 혼자선 한계가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일단 새로 악보를 구해서 교수님에게 레슨을…….

「세연아.」

홀에서 나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던 와중 세연은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 교수님.」

「바로 나왔나 보구나.」

보다 뒤쪽 좌석에 있던 교수가 나중에 나온 걸 보니 아마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린 모양이었다.

세연은 살갑게 다가가선 교수와 함께 잠시 쉴 곳을 찾았다. 다행히 빈 창문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자리를 잡고 창문을 열어두니 저녁바람이 시원했다.

교수는 잠시 말이 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무엇을 보는진 모르겠지만 무엇을 생각하는진 알 것 같았다. 교수도 세연도 피아노 협주곡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분위기를 살짝 환기할 겸 세연이 말했다.

「아, 샴페인이 있네요. 가져다 드릴까요?」

「네 건 가져오면 안 된다.」

농담조로 이야기하는 말에 방긋 웃으며 화답한 세연은 얼른 샴페인 리셉션이 있는 곳으로 가선 티켓을 보여 주고 한 잔을 받아왔다. 원래는 이것도 다 돈을 주고 사 와야 하는데 이번엔 무슨 이벤트인지 한 잔은 무료로 준다고 했다.

샴페인을 받아 온 세연이 교수에게 그것을 건네주자 교수는 그것을 바로 마시지 않고 손에 들곤 살짝 흔들었다. 계속 무언가 생각중인 것 같았다.

「교수님.」

「그래.」

「어떻게 생각하세요? 방금 연주.」

생각을 말로 하실 수 있게 화두를 던지는 게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기도 했고, 어차피 이대로 있다간 거꾸로 교수가 세연에게 물어볼 것이 뻔했다.

「글쎄다…….」

교수는 샴페인 잔을 슬쩍 흔들며 말끝을 흐렸다. 이전부터 느끼곤 했지만 교수는 타티아나의 연주에 대해선 말을 꽤나 아끼는 편이었다. 아마 같은 세대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세연의 앞이기에 그런 태도를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엔 직접적으로 연주회를 본 터라 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제대로 평을 할 때의 교수는 굉장히 단호하다.

「기교에 대해선 할 말이 없을 정도구나. 나보다 낫겠어.」

「하, 아하하. 설마요. 교수님.」

「나도 늙었으니까.」

교수는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50년에 가까운 나이 차이는 압도적인 연륜의 격차를 가져오지만, 만년의 테크닉은 결국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교수는 무대에 오르지 않은 지 오래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고.

타티아나는 그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교를 자랑하는 피아니스트였다. 스포츠 분야로 치자면, 선수가 감독보다 빠르고 강한 건 당연한 일이다. 교수가 객관적으로 그렇게 평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음악가로서의 실력은 다만 기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뛰어난 기교로 하고 싶은 말들을 많이 감추더구나. 그런 스타일의 피아니스트들도 있지.」

교수는 보다 분석적으로 타티아나라는 피아니스트를 평했다.

세연에게 그 분석은 조금 의아했다. 평소 생각하던 것과 약간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 그래요? 전 타티아나가 자기주장이 확실한 게 부럽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자기주장이 없는 피아니스트가 있겠니. 하지만 그게 다일까.」

같은 음악을 들었지만, 세연이 듣는 것과 교수가 듣는 것은 달랐다.

세연으로선 상상도 못 할 정도로 깊은 통찰로 교수는 음악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약간 아쉽다는 듯 교수가 말했다.

「협주곡이 아닌 독주곡이었다면, 모차르트가 아닌 쇼팽이었다면 조금 더 많은 것이 들렸을지도 모르겠구나…….」

중얼거리듯 말하던 교수는 이내 샴페인 잔을 한 번에 다 비워 버렸다. 그리고 세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쉬움을 느끼거나 혼자 생각하는 건 아무 의미 없다는 듯한 표현이 와닿았다. 세연이 뻣뻣하게 고개를 들자 교수가 말했다.

「세연아.」

「네?」

「언젠가 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도 들어 보고 싶구나.」

생각지 못한 말이었지만, 세연은 그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기다리고 있던 말이었단 것을 깨달았다.

타티아나 같은 엄청난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듣고도 교수는 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세연이 얼마든지 그만큼 해낼 수 있다는 듯 믿어 주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세연이 자신이 별로 없을 때도, 교수는 누구보다 먼저 확실하게 믿어 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세연은 그런 교수를 도저히 배신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연습 조금씩 하고 있었어요.」

「그래? 다행이구나.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고 했다면 돌아가서 야단을 칠 생각이었는데.」

「…….」

멍하니 견학만 하고 연주회만 보고 돌아갔다간 교수에게 얼마나 혼났을지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연습하길 잘했어……. 세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교수와 함께 만들어 나갈 모차르트를 고대하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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