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09화 (709/1,277)

##  709화

토요일 프리모르스키 스와레 콘서트의 2부가 곧 시작될 차례였다.

콘서트홀의 직원 오를로프는 바짝 긴장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직접 무대에 오르는 음악가는 아니었지만, 연주회를 이루는 관계자 중 한 명이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음악가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없는지 살피며, 문제가 있다면 빠르게 보고하고 조치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런 일을 하다 보면 정말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보통은 평범하게 대기하다가 무대로 올라가지만 가끔은 특별한 모습을 보이는 음악가들도 있었는데, 그의 기억에도 몇몇 사람이 남아 있었다.

대기실에 장미꽃 300송이를 세팅해 달라고 부탁한 피아니스트나, 줄넘기를 가지고 와선 땀이 뻘뻘 날 때까지 줄넘기를 하다가 무대에 오른 첼리스트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나 본 것은 그에게 있어서 상당한 자부심이 되는 일이었다. 까탈스러운 조건 등을 맞춰 줘야 할 땐 스트레스가 되기도 했지만, 이젠 산전수전 다 겪어 보았다는 마음으로 차분하게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

그런 오를로프가 보기에 타티아나는 정말 대하기 편한 음악가였다.

베르체노바라는 성을 처음 들었을 땐, 그냥 눈앞이 아득한 기분이었다. 몇 년 전, 콧대 높기로 유명한 피아니스트를 상대하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런 경험에 비추어 오를로프는 타티아나도 까다롭고 고압적일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타티아나를 직접 마주한 오를로프는 생각을 곧바로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고정관념에 갇혀 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타티아나는 정중하고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음악가로서의 모습부터가 인상적이었다. 타티아나는 피아노에 관련된 사항들을 맡겨 놓고 나중에 탓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알아서 꼼꼼하게 알아보고 확인하면서 진지하게 책임을 다했다.

거기에 타티아나는 그저 협연 피아니스트로만 이 연주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술감독이라는 직책까지 맡아선 무대 전반의 어쿠스틱이나 큐시트에 맞춘 연출에까지 신경을 썼던 것이다.

그렇게 여러 부분에 손을 대면서 분주하게 연주회 준비를 하다 보면 분명 어느 한구석에선 불만이 나올 만도 한데, 타티아나와 만나 본 사람들은 그 누구도 안 좋은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홀에서 종종 마주할 때마다 인사를 먼저 해 오는 것도 타티아나 쪽이었으며, 단 한 번도 강압적으로 무언가 지시하듯 말하는 법도 없었다.

매사 차분하고 올곧게 무대를 완성시킬 생각뿐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협조하지 않을 직원은 이 홀에 없었다.

“…….”

때문에 오를로프 역시 타티아나에게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대기실에서도 음악가로서 임하는 타티아나는 무언가 특별히 요구하거나 지시하는 일 없이 홀로 자신의 음악을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그 점에 오를로프는 훌륭하다고 찬사를 보내고 싶다가도, 섣부르게 입을 열 수 없었다.

“…….”

소리가 사라져 간다.

여전히 대기실 안엔 에어컨이 작동하는 소리나 다른 직원들이 돌아다니며 무언가 물어보고 확인하는 소리 등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집중하고 있는 타티아나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무언가는 그 모든 진동을 잡아 짓누르고 있었다.

가까이에 있는 오를로프는 숨죽인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필요한 게 있다면 힘껏 도와주고 싶다거나 나이가 어린데도 존경할 만한 부분이 있다는 생각 등이 들다가도, 일순 머리 한편에선 경외감이 무섭게 찾아들기도 했다.

타티아나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무릎 언저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동도 않는 모습은 마치 조각상처럼 느껴진다.

조각상에게 말을 거는 미친 사람은 없다.

어린 소녀에게 합당한 감상인지는 차치하고, 그 때문에 청중들이 객석에 모두 앉고 오케스트라도 무대 위에 자리한 채 때를 기다리고 있는 이 상황에도 오를로프는 쉽게 말을 걸지 못했다.

주변의 소음은 곧 완전히 사라지며 고요 속에서 타티아나만이 오롯이 앉아 있었다.

“저…….”

침묵의 무게가 일정 수준에 도달했다. 오를로프는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생각하며 가까스로 입을 열어 그녀를 불렀다.

조각상이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한 얼굴에 일순 떠오른 의아함이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단지 차가운 인상 때문이 아니었다. 특별한 강압이나 억지 없이도 타티아나는 자신의 의사를 드러낼 줄 알았다. 그것이 음악을 다루는 전문가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지체 높은 가문에서 교육받은 덕분인지 오를로프는 잘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피아니스트 타티아나는 겨우 열여섯 살의 나이에도 카리스마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소름 끼치는 기분을 느끼며 오를로프는 간신히 말했다.

“나가실 때입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예.”

타티아나는 긴말 없이 천천히 무릎을 일으켰다. 가까이에 있던 오를로프는 몸에 밴 습관적인 에스코트로 자신도 모르게 손을 반쯤 뻗다가 머뭇거렸다.

혹시라도 타티아나가 유지하고 있는 집중이 깨어질까 싶었다. 음악가들을 무대로 올려보내고 나면 할 일 없이 지켜보는 게 전부인 오를로프와 달리 타티아나는 지금부터 너무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진 이런 생각을 해 본 적 없었는데, 타티아나를 앞에 둔 오를로프는 어쩐지 행동 하나도 쉽게 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

근처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모습이 이상해 보였는지 타티아나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오를로프는 무언가 지시라도 받은 사람처럼 반걸음 물러섰다. 그렇게 뒷걸음질 치고 나서야 그는 이게 기분이 상하게 할 수도 있는 행동이라는 걸 깨달았다.

사과를 하기에도 이상하고, 그냥 입을 여는 것 자체가 어색한 상황에서 오를로프는 꼼짝도 못 하고 서 있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타티아나는 갑자기 환한 미소를 만면에 띠며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청해 오는 악수는 받아 주어야 한다는 조건반사적 행동으로 오를로프는 간신히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막 손을 쥐기 직전, 그는 다시 멈칫하며 손을 멈추었다. 타티아나가 의아하다는 얼굴을 한다. 오를로프는 변명하듯 빠르게 말했다.

“그…… 연주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네…… 그러니까…….”

“…….”

무대를 앞둔 이 손을 쥐어도 되나? 그런 생각이 든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손에 얼마나 큰 가치가 매달려 있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오를로프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그는 지금까지 다른 연주자들에겐 한 번도 이랬던 적이 없었다. 그러니 무대에 오르기 직전이란 변명은 말이 안 된다.

타티아나에게서 느낀 어떤 분위기 때문인 걸까. 하지만 어떤 이유이던 간에 지금 모습이 얼마나 바보같이 보일진 안 봐도 뻔했다.

겨우 악수 정도로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며 오를로프가 작게 한숨을 쉴 때, 그런 그를 가만 지켜보던 타티아나가 작게 말했다.

“저는 약간 예민한 편이에요.”

“……네?”

“건반을 다루다 보면 하룻밤 손톱이 자란 것도 가끔 거슬리게 느낄 때가 있거든요.”

오를로프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루에 손톱이 자라 봐야 얼마 자란다고? 하지만 타티아나가 얼마나 세심하게 피아노를 연주하는지 이미 본 터였다.

그만큼 정교한 연주를 하는 손은 정밀기계처럼 예민한 게 당연했다. 도저히 악수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대를 30초도 안 되게 앞두고 있으니 더더욱.

그러나 타티아나는 그렇기에 지금뿐이라는 듯 말했다.

“하지만 악수로 전해 받을 수 있는 게 훨씬 많다는 걸, 이젠 알아요. 그러니 악수해 주세요. 오를로프.”

“제 이름을…….”

며칠 전 이름을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오를로프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조각상이나 기계를 떠올리기엔 너무 작고 연약한 손이었다. 하지만 피아니스트이기에 지닐 수 있는 강렬한 기개와 카리스마가 거기에 분명하게 존재했다.

미소를 짓고 있는 타티아나를 보며 오를로프는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제가 뭘 드릴 수 있는지 모르겠군요.”

“왜 없나요? 물도 가져다주셨고, 멍하니 있는 절 깨워 주기도 하셨는걸요.”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타티아나는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한순간 어린 소녀다운 모습이 돌아온다.

하지만 눈을 깜빡인 순간, 앞에 있는 건 앞으로의 시간을 양손으로 거머쥘 피아니스트였다.

“고마웠어요. 이젠 저에게 맡겨 주세요.”

무엇을 맡기라는 것인지 구태여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수백 명의 인원이 준비해 온 시간을 그림자에 매달고, 타티아나는 무대로 열린 문으로 향했다.

***

구두 소리가 등 뒤에 따라붙는다.

많은 사람들의 기대 그리고 염원.

연주회 때마다 느낄 수 있는 이 모든 것들은 내가 무대에 서는 이유이자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꼭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니겠지만, 운명이 맡겨 놓았을지도 모르는 일.

그것이 끝나기 전까지 난 늘 무대에 오를 테지.

“…….”

천천히 생각을 갈무리하며 무대로 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그 전부가 순식간에 눈앞에 펼쳐졌다.

“타티아나!”

쏟아지는 박수 소리. 누군가 내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까지 들려온다. 가볍게 활을 흔들거나 하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날 반기는 단원들도 보였다.

허리를 세우고, 어깨를 내린다. 자연스레 턱이 당겨지며 주변 모든 것들이 잘 느껴지게 되었다.

난 천천히 앞으로 나가 청중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지휘자 그리고 악장과도 악수와 인사를 나누었다.

“2부도 잘해 보죠. 타티아나.”

“예, 시어도어.”

시어도어는 씩 웃더니 손을 놓고는 활을 들었다.

각자의 위치로 흩어진 우리는 전체적인 균형을 다시 잡으며 음악을 준비한다. 청중들 역시 음악을 준비하며 침묵을 조성해 주었다.

“…….”

적막 속에서 피아노 앞에 앉은 나는 건반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오케스트라를 바라보았다.

순간의 경직마저도 모두 일치된 듯한 오케스트라는 곧 지휘봉이 휘둘러짐과 동시에 음악을 뿜어내었다.

‘3번.’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 다단조.

총 5곡인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중 유일하게 단조로 만들어진 곡이며, 비로소 베토벤이 진정한 작곡가로서의 발돋움을 한 계기가 되어 주었다고 평가되는 곡이었다.

당시 세상에 단조 협주곡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27개나 되는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해 낸 모차르트도 단조 협주곡은 20번과 24번 단 두 곡만을 써 낸 것이다.

하지만 그 단조 협주곡들에 영향을 받은 베토벤이 뒤를 이어 자신의 음악을 표출해 내기 시작했고, 덕분에 이 피아노 협주곡 3번은 200년을 뛰어넘은 최근에도 세계 음악회 통계상 연주 횟수 1위를 자랑하는 곡으로 남게 되었다.

막을 여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천천히 감상하면서 난 이 곡에 빠져들었다.

“…….”

서서히 다가오며 주변에 쌓여 가던 음악은 곧 천장에 닿을 만큼 커져 가며 장중함을 쏟아내었다.

얼핏 듣기엔 화려하고 세련되었다. 하지만 길게 늘어붙는 그림자가 짙고 어두움을 알 수 있었다.

1790년 즈음부터 베토벤은 청력 손상을 느끼기 시작하며 절망과 좌절을 느끼고 있었다.

피조물을 하찮은 불운에 노출시켜 시들게 하는 창조주를 저주한다는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평범한 사람들보다 청력이 더 중요한 음악가에게 청력 손상은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난 한참 전 인물인 베토벤이 어떤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을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베토벤은 서서히 악화되는 청력을 느끼며 종국엔 유서까지 남기며 삶을 거의 포기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작곡 활동은 쉬지 않았고, 결국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던 음악의 신에게 구원받게 된다.

강렬한 음악적 영감을 느끼고 친구인 프란츠 베겔러에게 보낸 편지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운명의 멱살을 틀어쥐고 말겠다. 비록 완전히 굴복시킬 수는 없겠지만.

바로 그 시작이 되는 곡이 바로 이 피아노 협주곡 3번이었다.

“…….”

절망과 저주. 운명을 상대로 화려한 승리를 거둘 순 없을 것이란 비관. 그러나 꺾이지 않은 불굴성이 드러나는 음악을 오케스트라가 연주한다.

3분가량의 연주는 그 자체로 베토벤의 일기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 일기가 모두 연주되었을 때, 난 피아노 건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면의 무언가가 내 손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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