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10화 (710/1,277)

##  710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0번. 그리고 이어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

두 곡 모두 너무나 자주 연주되는 곡이라서 프로그램 자체엔 그리 특별할 것이 없었다. 되레 너무 유명해서 요즘은 이렇게 낭만 이전 고전작곡가 두 명을 붙여놓는 일이 잘 없지 않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본질로 회귀하겠다는 듯 보란 듯이 단조 피아노 협주곡 두 곡을 연달아 준비했고, 그 연주는 아주 특별했다.

「…….」

세연은 숨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베토벤에 대해 모르는 연주자는 없다. 세연 역시 이 거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배웠고, 얼마 전 리허설을 견학하면서 따로 공부하기도 했었다.

물론, 그렇게 배운 것들은 아주 작은 편린에 불과했다. 베토벤은 공부하면 할수록 정말 어려운 작곡가였다.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귓병을 얻은 탓에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당시엔 피아노라는 악기가 막 개발되어 보급되며 개량되던 시기라서 하나로 정립되어 있지도 않았다.

때문에 현대의 피아노로 연주하는 베토벤은 현대의 주법으로 연주하는 것과 원전연주처럼 주법을 바꿔 연주하는 것에 대한 차이가 확 난다.

심지어 각 곡마다 쓰인 피아노도 달랐다. 독일제 피아노, 비엔나식 피아노, 영국식 하머클라비어 등 베토벤은 여러 피아노들을 이용해 작곡해왔고 당연히 서스테인sustain 시간이나 음색도 전부 다르다.

베토벤을 연구하는 음악가들이 전부 원전 그대로의 음색을 추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제멋대로 하는 것과 알고 새 해석을 이루어나가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그 때문에 베토벤에 대한 공부는 해도해도 정말 끝이 없을 지경이었다.

‘대단했었지.’

하지만 리허설로 들었던 타티아나의 연주는 그 공부가 이미 거의 완성의 단계에 이르러 있는 것처럼 들렸다.

세연은 그 시절에 가 본 적도 없고, 세상 모든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연주를 들어 본 적도 없지만, 그럼에도 타티아나의 연주가 굉장히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란 확신을 느낄 수 있었다.

울림이 부족하며 섬세한 옛 피아노의 음색을 되살리는가 싶으면 현대 피아노가 지닌 무게감과 부피감은 그대로 담아낸다. 정확한 박자로 구조적인 아름다움을 쌓아 올리고는 낭만적 색채감도 부여했다.

세연은 타티아나가 도대체 뭘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인지 처음엔 잘 알지도 못했다.

하지만 옆에서 계속 리허설을 지켜보면서, 그녀가 어떻게 곡의 완성도를 높여 나가는지 본 뒤엔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타티아나의 연주는 형태가 다채롭게 바뀐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는 전부 엄청난 연구 위에 쌓아올린 것으로, 곡이 지닌 풍경과 감정의 표현, 그리고 몇 단어로 이루어진 메시지를 보다 명징하게 전달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마치 볼록렌즈를 가지고 태양 아래에서 위아래로 초점을 맞추다가, 어느 순간 한곳으로 집중되면 뜨겁게 되어 종이도 태울 수 있게 되는 것처럼.

타티아나는 피아노로부터 주변으로 흩뿌려지게 되는 음악들을 한곳으로 집중시켜서 증폭시키려 한다.

피아니스트로선 정말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의 실력이었다.

세연은 몇 번이고 놀랐던 리허설들을 떠올리며, 오케스트라의 전주에 몰입했다.

장대한 음악을 펼치던 오케스트라는 마치 군악대처럼 발을 맞추어 뒤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물러서고는 줄을 맞추어 선다. 눈앞에 있는 오케스트라가 그대로라는 걸 보지 않았다면 실제로 물러나는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딱 떨어지는 구둣발 소리가 무대를 울린다.

「……!」

모든 오케스트라가 무대 주위를 둘러싼 채 바로 섰을 때 지휘봉이 피아노 쪽을 향했고, 타티아나가 크게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섰다.

특별한 기교는 없다. 단지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서 건반을 누르는 모습. 그러나 홀을 울리는 소리는 방금 물러선 오케스트라와 대등할 정도로 웅장하고 힘이 느껴졌다.

언젠가부터 세연도 쓸데없는 몸동작을 많이 삼가는 편이었지만, 타티아나는 정말로 필요한 동작만 취했다.

그렇다고 감정 없는 인형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곧 따라붙은 오케스트라와 합을 맞추어 연주하던 타티아나의 팔이 높게 튀어 오르더니 건반을 내리찍었다. 소위 스완 다이브swan dive라고도 불리는 주법이었다.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같은 거장의 시그니처라 할 수 있는 주법이니만큼 아무나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연이 저런 식으로 건반을 누르면 미스 터치도 생기거니와, 쨍 하는 듣기 싫은 소리가 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내리찍은 건반에서 생겨난 소리는 강력하게 청중석에 몰아닥쳤다.

「…….」

렌즈가 이쪽으로 향한다. 타티아나가 음악을 집중시키는 만큼, 청중들 역시 타티아나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한 번의 연주로 그 누구도 눈과 귀를 뗄 수 없게 되었다.

세연 역시 눈을 크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음악은 오케스트라와 빠르게 커져 나가기도 하고, 어느 한순간 툭 빠져나와 피아노 혼자 노래를 하기도 하면서 진행되었다.

휩쓸리고 깎여 나가고 짓눌리지만 그럼에도 무언가에 저항하며 일어서는 에너지가 거기에 있었다.

세연은 베토벤의 절대음악성을 훼손할 생각이 없었지만, 이 음악에서 운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특별한 해석은 아니었다. 애초에 19세기 초의 그 시기엔 베토벤이 다단조로 작곡한 곡들이 많았는데 모두 하나같이 다 명곡으로 손꼽히는 작품들이었다.

비창 소나타라는 부제를 지닌 피아노 소나타 8번, 코리올란 서곡, 그리고 교향곡 5번. 운명 교향곡.

그 모두가 다단조로 구성되었으며 어두우면서도 힘있게 느껴지는 감정을 표현해내고 있었다. 세연은 베토벤이 사용하는 다단조야말로 베토벤이라는 작곡가를 가장 잘 드러내는 조성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타티아나와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해석은 그 부분을 조명하며 뚜렷하게 드러냈다.

‘이게 베토벤…….’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난폭하게 서랍을 여닫기도 하고, 책상 위의 물건들을 와르르 쏟아내기도 한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일어나선 뛰쳐 나간다. 희열과 환희.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심장이 뛴다. 고개를 번쩍 들고 위를 바라보니 소리는 하늘에서부터 내려오고 있었다.

그대로 무릎을 꿇고 앉아선 모든 것을 적어낸다.

문장과 기호들은 마치 모래 위에 스며들듯 스르륵 사라졌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이 땅에 남아 있을 것이다. 처음 하늘에서 땅으로 기호를 옮겨 온 것이 사람이듯, 이곳에 사람이 남아 있다면 영원히.

“…….”

세연은 자신의 온몸에 이 음악이 새겨지는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리허설룸에서 들었던 음악엔 이 정도의 힘이 없었는데, 콘서트홀이라는 렌즈를 통해 집중된 음악은 세연을 불태우기에 충분했다.

새파란 화염이 서서히 세연을 집어삼켰다. 어두운 암시와 충동. 그리고 그에 대비하듯 치솟아 오르는 섬광. 모든 것이 너무 강렬하기만 한데, 그럼에도 세연은 기분 좋은 충격이라 느꼈다.

이 순간의 감상은 세연의 내적 음악성을 한층 더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세연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이렇게…….’

지금은 당연히 감상자로서 얌전히 집중하여 듣는 게 에티켓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특히 타티아나는 세연이 정말 좋아하는 피아니스트였기에 그녀의 연주라면 단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본능 어딘가에 잠들어 있는 무언가가 공명하며 꿈틀거리는 것을 그저 참아 내기만 할 순 없었다.

쉴 새 없이 허공에 오른 손가락을 까딱이며 세연은 무대에 집중했다.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손의 움직임과 함께 멎자 마치 저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옆에서 누군가 본다면 조용히 감상하지 못하고 휘적이는 이상한 애처럼 보이겠지만, 세연은 신경 쓰지 않았다. 매순간 세연은 협연의 방식을 익혀 나가고 있었다.

비단 기술적인 부분만이 아니었다.

‘타티아나가 쓰는 저 피아노, 뵈젠도르퍼의 모델이라고 했었지.’

원래도 타티아나는 음색을 정말 다채롭게 다룰 줄 아는 피아니스트였다. 그런 그녀가 주법이나 터치를 넘어서서 피아노까지 교체하며 음악적 퀄리티를 추구하자 그 수준은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높아져 있었다.

피아니스트는 단순히 손가락을 빨리 놀리는 기교만이 아니라 음악성을 추구해야 한다. 그 말은 쉽지만 공부가 얕은 세연은 그저 아티큘레이션을 조금 더 세심하게 다루는 것 말고는 마땅한 방법을 잘 모른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피아니스트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몸소 제대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었다.

세연은 지금까지 뵈젠도르퍼를 연주해 본 적이 없었지만, 돌아가면 꼭 한 번쯤 만져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 피아노의 음색을 느끼고 기억해 둔다면 분명히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것 말고도 타티아나는 어쿠스틱이나 오케스트레이션에 대해서도 꽤 알고 있었다. 세연은 그것들도 가능하다면 조금씩이나마 공부해 볼 생각이었다.

그냥 피아노만 잘 연주한다면 피아노 기술자일 뿐이다. 뮤지션musician이 되기 위해선 음악에 대한 다방면적 공부가 필요하다.

세연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음에도 타티아나를 보며 그런 것들을 많이 느끼고, 깨우쳐 갔다.

「…….」

넘실거리며 무대와 청중들을 불태우던 청색 불꽃은 1악장 클라이맥스에 다다르자 더더욱 맹렬해졌다. 베토벤 특유의 무게가 느껴지는 화성이 쌓여 가며 불길을 키워 나간다.

그 불길 속에서 한 그림자가 흔들거린다.

제대로 볼 수 없는 그 무언가를 향해 귀를 기울이자, 잠시 바람이 그치며 불길이 잦아들었다. 땅 위에 음악을 그리던 사람이 고개를 든다.

타티아나와 오케스트라가 크게 음악을 쏟아붓자 장대한 열정의 불꽃이 더더욱 화려하게 타올랐다.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불꽃에 휩싸여 있던 사람은 허리를 굽히며 무너지는가 싶더니, 서서히 그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똑바로 두 다리로 섰을 때, 주위에 가득 찬 열기가 내려앉아 홀의 모든 곳에 스며들며 음악이 끝을 맺었다.

「…….」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세연은 팔을 쓸었다. 방금까지 허공에 있던 음악이 정말로 불길로 화해서 스며든 기분이었다.

기분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에서 쉽게 느낄 수 없는 무언가를 마주하고 피부로 직접 느끼는 것은 꽤나 섬뜩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살짝 벌린 입으로 가느다란 탄성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크게 환호하거나 박수를 쳐서 음악을 끝내지도 못했다. 음악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무대 위에선 타티아나가 침묵을 지키며 피아노를 바라보고 있고, 현악과 금관 주자들이 각각 악기에 약음기를 세팅하고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그 단합된 행위는 그들이 무언가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었고, 보는 사람들을 하여금 기대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준비는 길지 않았다.

단원들이 악기를 들었고 지휘자가 지휘봉으로 허공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가만히 지켜보는 타티아나를 가운데에 두고, 주변에서부터 서서히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의 2악장이 시작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