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1화
16분 30초가량. 1악장의 길이였다.
팔이 지치거나 자세에서 힘이 빠지진 않았다. 아직 체력은 충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워낙 담고 있는 주제를 표현하기 어려운 곡이다 보니 집중하며 신경 쓰느라 정신적 피로함이 느껴졌다.
베토벤이 느꼈을 한탄과 절망의 감정은 음악을 통해 내게 와닿았다. 난 그런 감정에 쉽게 물들 수 있었다.
심지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지금도 어느 순간 갑자기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게 될 것 같다는 끔찍한 공포가 내 심장을 틀어쥐고 있었다. 연주 중 인대 부상이나 입스yips 등이 닥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난 언제나 그런 공포들이 있음을 알지만, 검은 새와 운명이 허락한다면 아직은 괜찮으리라 믿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깊게 파고들어서 어두운 감정을 너무 많이 끌어내어 버리면 음악적 균형이 어그러지고 만다.
어디까지나 적당히. 이 고통마저도 음악적 향신료로 쓸 수 있도록 냉정함을 유지해야만 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쓸모없진 않았는지, 마무리하고 난 연주는 꽤 괜찮은 형태로 내 마음에 자리 잡았다.
결국 무너지지 않고 운명의 멱살을 틀어쥔 베토벤의 모습을 제대로 그려 내는 데에 성공했음을 분명히 느낀다.
이 음악과 함께 한 다른 사람들도 모두 받아들였으리라 믿는다.
그런 희망을 느끼며 난 다음 악장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내 의지와 본능 그리고 노력에 따라 움직여주는 손가락은 정확한 타이밍에 건반을 살며시 터치했다.
‘보다 울리도록…….’
악장지시는 라르고largo. 아주 느린 템포로 음악을 이어 나간다.
1악장에서의 연주를 페달을 아끼며 보다 또렷하게 음악의 심상을 이루려 했다면 이번엔 현대 피아노이기에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음악에 밀어붙일 수 있었다.
성당을 연상케 하는 신성한 울림.
예배 중인 성당의 어느 한 시점만을 떼와서 이곳에 펼쳐놓는 것은 어렵겠지만, 종교적 색채가 느껴지는 음향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마음속에 각자 느끼는 퀄리아qualia가 공명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내 연주의 목적이었다.
그렇게 비슷한 것들을 느끼는 사람들에게선 비슷한 분위기가 피어나고, 그렇게 되면 이 공간은 정말로 사람들이 동시에 느끼는 그 공간이 될 수 있다.
콘서트홀처럼 성당 역시 어쿠스틱에 굉장한 신경을 쓰며 지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두 건물은 같다고도 할 수 있었다.
큰 차이가 없음을 음악으로 설득하며, 난 더욱 자신 있게 건반을 연주하며 이미지를 그려 나갔다.
어느 순간, 공기의 색이 달라졌다. 1악장의 열기가 가라앉으며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오색찬란한 빛이 홀 안을 가득 채운다.
그렇게 내가 준비를 완료시키자 지휘자님이 천천히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음악을 흘려보냈다.
“…….”
약음기를 낀 오케스트라의 소리는 감미롭게 울려 퍼졌다.
이 사운드의 세팅에 대해서도 난 지휘자님 그리고 악장 시어도어와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부 약음기를 하거나, 아니면 관악기만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일부만 하고 일부는 하지 않거나.
정말 다양한 옵션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그만큼 다 시도해 볼 수밖에 없었다. 시어도어가 앞서 이끌며 할 수 있는 연주를 거의 다 해 주었고, 그렇게 결정된 것이 지금 첼로와 콘트라베이스, 호른, 그리고 제2 바이올린들만 약음기를 쓴 상태였다.
그리고 이렇게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악기를 섬세하게 재조율하여 준비된 음악은 보다 뛰어난 구조적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다.
분리되어 들리는 선율은 공간감을 살려 주며 풍성함을 더해주었고 홀을 더욱 크게 느껴지게 하기까지 했다. 물론 단원들의 실력이 그만큼 받쳐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 역시 거기에 뒤떨어질 순 없었다.
콘 소르디노con sordino, 그리고 센자 소르디노senza sordino 등의 약음 관련 지시는 베토벤이 정확하게 해 놓았다. 난 그 음악적 흐름을 떠올리고,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놓은 배경에 맞추어 피아노를 컨트롤했다.
피아노는 본래 오케스트라와 완전히 동화될 수 없는 악기였다.
그만큼 구조적으로 잘 섞여드는 방법을 구사할 필요가 있었고, 난 일부러 튀어 나가거나 먹혀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오케스트라 사이로 파고들었다.
오케스트라는 부드럽게 내 주변을 둘러싸면서 자리를 내어 주었다.
마장조로 흘러가는 선율은 어느 순간 오케스트라가 잠잠히 사라지면서 카덴차로 변했다. 하지만 난 여전히 배경에 오케스트라가 깔려 있음을 상상하며 연주했다.
나 홀로 연주 중이지만 이전까지 따라오던 음악적 구조가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청중들이 그 모양을 정확하게 그릴 수 있게 천천히 건반을 짚는다.
조용히 피아노의 카덴차만 기도를 끝마치던 중 오케스트라가 서서히 소리를 깔며 다가오고, 호른이 퇴장을 알리는 긴 나팔처럼 따라 불며 2악장은 따뜻한 목소리로 끝났다.
“…….”
3악장 론도 알레그로rondo allegro.
다시 다단조로 돌아온 음악은 독립적인 음형을 그리며 달려 나간다.
오케스트라의 신경을 쓰지 않고 솔리스트처럼 나의 베토벤을 연주했다.
베토벤이 이 곡의 첫 초연을 할 당시, 곡의 피아노 파트가 전혀 완성되지 않아서 거의 모든 부분을 즉흥으로, 기억나는 대로 연주했었다 한다.
물론 난 이후 완성된 악보를 정확하게 암보해서 연주하고 있지만, 기억 속의 선율을 이 순간의 즉흥적인 악상에 이끌리듯 풀어놓았다.
협주곡 3악장 치고는 굉장히 자유롭고 바람과도 같은 악장이었다. 난 무대 한가운데에서 양팔을 벌리고 빙글빙글 도는가 하면 멋대로 휘파람을 불기까지 했다.
협주곡은 론도였다가 한순간 폴카였다가 어떨 땐 그냥 흘러내리다가 올라가기도 하며 다채롭게 변화했다. 대위법적인 성향마저도 옅어지며 모두 한 음악에 녹아내렸다.
무거운 운명의 주제는 이미 뒷전으로 물러나 있었다. 운명이 잔혹하다 한들 머릿속의 선율까지 빼앗아 갈 순 없었다.
그 음악을 보란 듯이 펼쳐놓는다.
평생 권위를 싫어했던 베토벤이라면 응당 이런 연주 역시 즐겨 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제어되지 않는 음악을 하는 것은 내가 극도로 꺼려 하는 일이었지만, 200년 전 살았던 희대의 천재의 음악과 함께라면 어쩐지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자유롭게 곡을 연주한다는 것은 이 곡이 최대한으로 가지고 있는 범위를 유연하게 사용한다는 의미였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바이올린을 쥘 수 없는 것처럼, 피아노 연주자에게 주어진 모든 자유를 활용했다.
지금까지 해 온 모든 음악적 수업을 한순간에 모으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단 하나의 음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모아 쥐었다. 모두 정확하게 이 음악의 구성요소로서 이루어져 있었고 그 뒤로 오케스트라까지 함께했다.
“…….”
지휘자님이 이끄는 오케스트라가 내게 장난을 걸어오고, 난 가볍게 받아넘기다가, 양손으로 옥타브를 내리찍어 겁을 주기도 한다. 거기에 반응하며 오케스트라는 깜짝 놀란 척을 하더니 다시 슬그머니 바닥에서부터 올라왔다.
나와 모든 단원들은 음악가로서 가능한 모든 역량을 매순간마다 뿜어냈다. 리허설을 그렇게 많이 했었는데 이 정도까지 가능했었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지막 순간은 뮤지컬의 한 장면을 선보이는 기분이었다. 모두가 하나의 역할을 바라보고 똑같은 동작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제각각의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로 움직이지만 결국은 모두 하나의 무대 위 작품으로 보인다.
제일 가운데에 있는 나는 경쾌하게 베토벤을 밀어붙였다.
다단조로 시작되었던 곡은 어느새인가 다장조로 바뀌어있었고 찬란한 음악을 흩뿌리기에 제일 좋은 풍경으로 펼쳐져 있었다.
템포 역시 프레스토presto. 제일 빠른 속도로 쏘아보내며 모든 악센트마다 최고로 강한 음을 때려 넣었다. 내 소리에 올랐는지 오케스트라도 빠르게 따라붙는다. 이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쏘고, 받고, 끌어올리며 마무리 지었다. 내 파트를 마무리 지은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오케스트라 쪽을 바라보았다.
마치 마지막 골인 지점을 향해 달려가듯 간 오케스트라는 샴페인을 터트리는 것 같은 투티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와우!”
“브라바!”
단원들의 표정엔 굉장한 만족감이 떠올라 있었다. 마지막 피날레에서 나와 눈이 마주쳤던 몇몇 단원들은 당장 이쪽으로 뛰어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마음은 나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나 역시 준비한 두 곡의 협주곡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다는 것에 대한 만족을 느끼기도 하고, 이 멋진 음악가들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했으니까.
며칠이나 함께 해 온 시간들이 2시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끝난다는 건 아쉬운 일이지만, 그래도 수개월에서 수년 동안 준비하여 10초 만에 모든 것이 끝나는 단거리 육상 선수 등에 비하면 우리 클래식 연주자들은 꽤 오랜 시간 동안 만끽할 수 있는 직업이란 생각이 든다.
여러 이야기가 하고 싶지만, 그보다 먼저 할 일이 있었다.
“좋았어요.”
폭발적인 성원 속에서 나는 일어나 지휘자님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먼저 이런 말을 해도 될까 싶었지만, 다른 이견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지휘자님은 손수건을 꺼내 쥐더니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내가 가볍게 악수를 받자 지휘자님이 웃었다.
“감동적이었습니다. 타티아나.”
“후후.”
악수를 마친 난 이어 시어도어와도 악수를 나누었다. 시어도어는 장난스레 웃어 보이기만 했다. 딱히 말로 안 해도 알잖냐는 의미 같았다.
마지막으로 난 청중석을 향해 돌아섰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이 시간에 함께 해 준 사람들에게 감사와 보내며 고개를 숙인다.
“타티아나!”
내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와 박수 소리가 뒤섞여 울렸다.
그사이 사람들 사이에 일정한 리듬이 자리했는지 여기저기에서 울리는 소리에도 균형이 잡혀 있었다. 그 사실에 난 쿡쿡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잘 해냈다면, 음악이 가지는 힘은 이후에도 남아 저 사람들과 함께해 줄 것이다. 짧게는 곧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니 10분가량. 길게는 며칠 정도.
어쩌면 그보다 더 길게.
그 시간 동안 음악이 축복으로서 사람들의 곁에 머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바라는 건 없었다.
“…….”
그렇지만 만약 조금 더 욕심을 내도 된다면.
시선을 조금 돌려 청중석 앞의 한 자리를 바라보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잘 보이지 않지만, 난 그곳에 한 사람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날 의식하는 기운이 분명히 느껴진다. 지금은 아직 미약하지만 기세가 죽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 착하고 상냥한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심하고 무능하진 않다. 강렬한 에너지가 이상을 품고 있는 연주자였다.
난 그녀가 이 음악에서 축복 외의 다른 것을 느꼈으면 한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또 그 너머에선 무엇을 찾을 수 있는지.
테이블을 놓고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아서 하는 간접적인 대화로는 그런 이야기를 제대로 하기 어렵다. 때문에 난 그녀가 이 직접적인 대화를 잘 이해해 주었으면 했다.
분명히 그렇게 되리라 믿는다.
“앙코르 할게요.”
난 무대 뒤로 나가서 커튼콜을 즐기는 스타일이 아니고 에르네스트처럼 앙코르를 잘 안 하지도 않는다. 그저 음악을 필요로 하는 목마른 청중들이 있다면 지금 당장 더욱더 많은 음악을 쏟아낼 뿐이다.
지휘자님은 내가 나갔다가 들어올 거라 생각했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피식 웃더니 지휘봉을 보면대 위에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