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12화 (712/1,277)

##  712화

김성조는 지휘자로서 여전히 무대 위에 있었지만 이미 청중이 된 기분이었다.

타티아나는 뛰어난 솔리스트로서 레퍼토리를 수십 가지나 가지고 있었고, 그중 한 곡만을 앙코르로 하기로 사전에 합의했었다. 그러나 어떤 곡으로 할지 김성조와 정확하게 합의해 놓진 않았다.

연주회 당일의 상황과 즉흥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에 따라 타티아나가 선곡하여 연주하기로 한 것이었다.

김성조는 본래 앙코르 곡 역시도 철저하게 기획하고 준비하는 방식을 선호했었지만, 타티아나에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지금 듣는 곡은 그녀와 함께 리허설을 계속 해 왔던 김성조도 처음 듣는 곡이었다.

‘리스트…….’

연주회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타티아나가 꺼내든 곡은 리스트의 파가니니 초절기교 에튀드 2번. 옥타브.

그 선율을 인식한 김성조는 살짝 의아했다.

일반적으로 앙코르 무대는 연주자의 역량을 한껏 뽐내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청중들이 잘 알고 무난하게 바라는 유명한 곡들을 보이는 경향이 짙기 때문이었다.

같이 묶이는 에튀드 중 자주 연주되는 3번 라 캄파넬라와 같은 곡이 앙코르 곡으로 자주 연주되는 이유가 그러했다.

어디선가 들어 보고 잘 안다고 생각하는 선율을 눈앞에 있는 피아니스트가 연주해 줄 때, 청중들은 마치 자신의 리퀘스트를 피아니스트가 받아 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음을 읽고 교감해 준 것 같다는 만족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청중 모두의 리퀘스트를 받을 수 없는 피아니스트가 앙코르로 대중성이 있을 만한 곡을 고르는 건 그러한 배려의 일환이었다.

“…….”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런 걸 잘 알면서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며 음악 하는 것에 대한 행복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피아니스트이면서도, 이번엔 3번 라 캄파넬라가 아닌 2번 옥타브를 올렸다.

니콜로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17번을 피아노로 옮긴 곡으로 이 선율은 청중들에게 그리 익숙하지 않다. 만족할 수 있는 앙코르 곡이 아니라, 흥미를 살짝 돋우는 곡으로 들린다.

하지만 파가니니는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까지 불렸던 이탈리아의 천재였고, 리스트 역시 시대를 풍미한 피아니스트이니만큼 두 천재가 이루어낸 이 작품의 수준은 굉장히 높았다.

그리고 현대의 천재인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는 이 곡의 완성도를 극한으로 끌어내어 재현했다.

결과적으로 세 천재의 향연이 되었다고 해도 무방한 연주는 이 연주회의 피날레로 화려하게 울려 퍼졌다.

‘말도 안 되는군.’

타티아나가 택한 이 곡은 순식간에 청중들을 매료했다.

아름답게 교차되며 막을 연 곡은 귀여운 음색으로 통통 튀며 자세를 가다듬는다. 맑은 냇물처럼 유려하게 흐르는 모습을 가만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 흐름은 깜짝 놀랄 정도로 복잡해져 있었다.

마치 피아노 테크닉을 단계별로 시험하듯 순간순간 다루어야 할 음표들이 늘어나고 자연스레 손도 빨라진다. 그렇게 서서히 어려워지던 음악은 어느 한순간 확 튀어 오르더니 갑자기 무시무시한 속도로 쏟아져 내렸다.

옥타브라는 부제에 걸맞게 양손 옥타브 스케일이 마치 폭포수처럼 내려오는 음형이었다. 귀로 듣는 것만으로도 그 압력이 느껴질 정도로 장대한 연주였는데, 눈으로 보는 테크닉은 기겁할 정도로 빨랐다.

당장 맨 땅에다가 양손으로 아무렇게나 연타해 보라고 해도 저 정도 속도로는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타티아나는 인간을 초월한 것 같은 속도를 보여 주었다.

피아노 건반이 튀어 오르는 작은 탄성마저도 철저히 자신의 것으로 하고 있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일반적으로 물리적 저항을 지닌 악기의 구조란 연주자의 악상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크나큰 걸림돌이다. 때문에 연주자들이 기본적으로 바라는 것이 악기의 구조에 어떻게든 적응하고 익숙해져서 능수능란하게 다루게 되는 것이라면, 타티아나는 이미 그 구조 자체를 완벽하게 이해하며 지배하고 있었다.

테크닉을 중요시하는 연주자들이 지향해야 할 마지막 목표처럼 보이는 기술들을 타티아나는 겨우 열여섯의 나이에 자유롭게 구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

살짝 누그러드는가 싶던 음악은 곧 야수처럼 본색을 드러내며 사나운 기색을 보란 듯이 드러냈다. 옥타브로 연주되는 선율의 흐름은 빠르고 강렬하다.

그러면서도 그 특유의 섬세한 건반 컨트롤과 음색을 다루는 방식은 전혀 빛이 바라지 않았다.

미처 보여 주지 못했던 테크닉을 마저 다 보여 주겠다는 듯하면서, 낭만 시대의 화려한 음색 역시 살짝 느끼게 해 주겠다는 의도가 정확히 엿보였다.

그러나 절대 과하게 나가서 본편을 잠식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모차르트와 베토벤 이후의 음악의 흐름을 순식간에 지나가는 파노라마처럼 잠깐 보여 준다.

클래식 음악의 세계가 베토벤에서 끝나지 않고 그 후로도 수백 년 동안 전성기를 누렸음을, 그리고 지금도 건재함을 자랑하듯 보여 주는 완벽한 확인이자 증명이었다.

한순간 소나기처럼 내렸던 음악은 순식간에 거두어지며 맑게 개었다.

‘3부가 당연히 있어야 할 것 같군.’

김성조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며 있지도 않은 리스트나 라흐마니노프로 이루어진 3부 프로그램을 구상하기도 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긴 하지만, 타티아나라면 당장 1시간 정도의 프로그램이라면 앉은자리에서 해낼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다음의 음악은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다른 음악가들이 이어 연주해 줄 차례였다.

자신의 연주를 마친 타티아나는 미련 없이 손을 들어 올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홀이 떠나가라 쏟아지는 찬사와 함성을 한 몸에 담으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브라바!”

“앙코르! 앙코르!”

아직도 음악이 모자라다고 부르짖는 청중들이 수백 명이었다.

만약 리사이틀이라면 그 바람에 응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타티아나는 긴 협연을 마친 오케스트라를 들러리로 뒤편에 세워 놓고 혼자서 앙코르 곡을 몇 곡이나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쉽지만 이만 만족해 주었으면 한다는 모습으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예를 갖춘 그녀는 몸을 돌리곤 무대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후로도 커튼콜이 굉장히 길게 이어졌지만, 타티아나가 모습을 보이지 않고 김성조가 연주회가 끝났음을 알리며 고개를 숙이자 곧 사그라들었다.

청중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김성조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도 대기실로 돌아가자는 손짓을 해 보였다. 단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악기를 챙겨 대기실로 향했다.

“오늘 진짜 완벽하지 않았습니까?”

“연주하던 내가 다 감동했다니까.”

연주회를 마쳤다는 후련함과 만족감 등으로 단원들 역시 잔뜩 들떠 있었다. 그리고 곧 그 열기는 협연자에게 집중되었다.

“최고였어요!”

“인상적인 마무리였습니다.”

“타티아나, 어떻게 그렇게 힘이 남아 있었어요?”

모두들 타티아나 주위로 몰려들어선 떠들썩하게 말을 붙였다. 이 자리의 주연이 누군진 이 상황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그 중심에 있는 타티아나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도 어떻게 들뜨지 않고 차분할 수 있다는 게 이해가 안 갈 정도였다.

그러나 김성조는 이미 그녀가 보통 사람들과는 약간 다르다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렇게 이상하게 보이지도 않았다.

묘한 기분을 느끼며 김성조는 타티아나에게 다가갔다. 지휘자를 발견한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김성조는 지금 해야 할 말이 하나뿐이라는 걸 직감했다.

“함께 해서 영광이었습니다. 타티아나.”

협연자에게 이런 말을 해 본 것이 얼마 만인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보여 준 그 압도적인 실력을 돌이켜보면, 이보다 더한 찬사를 해도 모자랐다.

타티아나는 어깨를 살짝 움찔했지만, 당황하며 그런 말씀 말라고 부인하면 우스워지는 건 김성조 쪽이라는 걸 파악한 듯 보였다. 곧 그녀도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또, 같이 했으면 좋겠어요.”

“그땐 조금 더 시간 여유를 가지고 말입니다.”

“낭만 위주로 해 보는 건 어떨까요?”

“허허.”

앙코르를 들으며 생각했던 것들을 마치 읽어낸 것처럼 타티아나가 말했고, 김성조는 허를 찔린 기분으로 헛웃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예리한 건지 아니면 그냥 모든 걸 알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연주회에 대해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사실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지휘자님, 그리고 협연자님. 기다리고 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직원 한 명이 대기실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그렇게 말했다. 급히 바뀐 연주회이니만큼 사인회 같은 것은 없이 그냥 끝낼 생각이었는데, 그럼에도 쉽게 홀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했다.

김성조는 별생각 없었지만, 이제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타티아나에게 있어선 이런 상황도 중요한 기회였다.

연주가 끝나고 나서 그녀의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들도 몇 있었던 걸 보면 이미 꽤 알려져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지금 이럴 때 팬서비스를 더 해서 나쁠 건 없었다.

“잠깐 얼굴 비추러 갑시다, 타티아나.”

“예.”

타티아나는 별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연주회 후의 행사는 계약된 것이 없었기에 그냥 지휘자님 옆에서 인사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기실을 나와 라운지로 향하자마자 난 어마어마한 인파를 마주하고는 인사도 쉽지 않을 것 같단 기분을 느꼈다.

“이쪽 좀 봐요!”

“사진 찍어도 됩니까?”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어딜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곳저곳에서 직원들이 사진을 제재하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스마트폰이 곳곳에 솟아나와 있었다. 저걸 다 막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어색해 보이지 않도록 미소를 지으며 살짝 손을 흔들어 주자 카메라가 더 많이 이쪽으로 향했다.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누군가의 피사체가 된다는 것에 부담감을 느꼈겠지만, 이젠 꽤 익숙해져서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이런 방식으로도 누군가에게 남을 수 있다는 건 기쁜 일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계획에 없던 포토타임이 지나가고 조금 분위기가 잠잠해지자 지휘자님이 마이크를 받아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 이렇게 찾아주신 여러분들께 우선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저희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자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가 연주회를 준비하고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청중 여러분들의 사랑과 관심이 있었던 덕분…….”

대본 하나 없이 줄줄 나오는 인사말이었다. 이런 부분에서도 하나하나 노련미가 드러나는 것 같았다.

한동안 혼자서 그렇게 인사를 하던 지휘자님은 곧 살짝 이쪽을 바라보았다. 무작정 내게 인사를 시키지 않고, 어떻게 할 거냐며 의향을 묻는 눈빛이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자 지휘자님은 마이크를 건네주셨다. 난 조심스레 마이크를 받아 입가에 가져갔다.

“너무나 기쁘고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제게 이런 시간을 허락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려요.”

피아노 건반을 눌렀을 때처럼, 주위가 모두 조용해졌다. 모두가 내 말을 경청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피아노가 아닌 말로 무언가를 전하려 하니 긴장되기도 했지만,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 제 마음을 보여 드리고자 노력했으니…… 오늘 연주회에서 함께 한 음악과 기억들이 여러분들과 오래토록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진지한 마음으로 이야기한 난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저에게도 이 순간이 오래 남을 것 같아요. 보내 주신 성원, 감동적이었어요. 열정적인 블라디보스토크 여러분, 그리고 먼 곳에서 오신 분들. 모두 잊지 않을게요.”

“또 오세요!”

“후후, 감사합니다. 또 올게요.”

마이크를 내려놓자 다시 여기저기에서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주변이 다시 왁자지껄해진다. 그러나 이제 정말로 모든 일정이 끝났음을 이해하는 분위기가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저마다 남은 저녁 시간을 즐기기 위해 돌아간다.

가만히 그 뒷모습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몇몇 사람들은 마지막 인사처럼 이쪽을 바라보기도 했다. 난 작게 손을 흔들어 주는 것으로 그들을 배웅했다.

그러면서 난 혹시 그 사이에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찾기도 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특정한 몇 명을 찾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곧 사람들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김성조 지휘자.」

눈이 마주치자마자 슬슬 괜찮다고 생각하셨는지, 박 교수님은 이쪽으로 다가오시며 지휘자님을 불렀다.

청중의 입장으로 연주회를 지켜보았던 교수님은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지휘자님이 바라보자마자 진심 어린 칭찬이 있었다.

「훌륭한 연주회였네.」

칭찬을 듣고도 지휘자님은 아직도 교수님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듯 조심스러운 태도로 맞이했다. 연주회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에 드셨습니까?」

「내가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게 있겠나. 이미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알잖나. 완벽했다는 걸.」

마음에 둘 것 없다는 태도로 교수님은 뒤편을 손짓하며 쿨하게 말씀하셨다.

「자네 선택이 옳았네.」

그 말은 완전한 인정이었다. 김성조 지휘자님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지휘자님은 이미 음악가로서 경력이 상당한데도 교수님의 인정을 높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다음으로 교수님의 시선은 내 쪽으로 향했다. 지휘자님의 선택으로 난 교수님 대신 예술감독을 맡게 되었다. 그 부분에 대해선 분명히 인정하고 칭찬해 주셨지만, 내겐 그 외에 할 말이 있으신 듯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러시아식으로 정확하게 부르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교수님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연주였습니다.”

아마 러시아 연주자들과 함께 하면서 익혔을 짤막한 칭찬. 분명 경력도 실력도 뛰어난 프로 연주자들에게 향했을 칭찬인 그 말은 쉬운 인사치레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난 교수님에게도 내 연주가 좋게 들렸다는 것에 대해 감사를 느끼고, 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것에 안도를 느꼈다.

“……감사합니다.”

천천히 대답하자 교수님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주위를 두리번거리시더니 고개를 갸웃거리신다. 그 모습이 의아했는지 지휘자님이 물었다.

「누구 찾으십니까?」

「음…… 세연이도 인사하라 하고 싶었는데, 어디 있는지 모르겠군. 바로 나가진 않았을 텐데.」

세연은 내 연주회를 보겠다며 온 사람이었다. 지금 교수님 옆에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그녀가 없다는 것에 나 역시 조금 궁금증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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