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3화
연주회가 끝난 후의 홀. 주변의 실루엣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약한 안내등만이 어슴푸레 시야를 밝히고 있었다.
음악도 사람도 없는 이 공간에서 세연은 홀로 남아 있었다.
팔걸이에 양팔을 올리고 손가락은 허공을 짚는다. 그녀의 얼굴은 앞의 피아노를 향하고 있었지만 흐릿한 초점은 현실만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 음형이 왜 돋보였던 걸까. 악보엔 없었던 부분이었는데.’
그녀의 머릿속에선 아직 음악이 끝나지 않았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0번과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달콤한 맛으로 다가온 리스트의 파가니니 연습곡 2번…….
이 복잡하고도 아름다운 음악들의 향기가 얽히면서 여전히 그녀의 주변에 머물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이 자리에 머무르면 그 일부라도 흡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것들이 사라지기 전에 세연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음악이라는 것은 순간의 예술로서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지금 세연에게 그런 이론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 홀에 앉아 있는 한 시간을 되돌려 얼마 전의 음악들을 되새기며 느낄 수 있었다.
조금 꼴사납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세연이 바라 못지않는 음악의 한 결을 조금이나마 따라 그릴 수 있게 된다면 그런 건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
한동안 세연은 그렇게 흘러간 음악의 발자취를 되짚으며 혼자만의 시간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선 차치하고, 홀을 관리하는 직원 입장에선 이런 손님은 영 달갑지 않다.
“저기, 손님. 음악회는 끝났습니다. 나가 주셔야 합니다.”
모자를 쓴 직원이 세연의 옆으로 와선 정중하게 부탁했다.
갑자기 사람의 목소리가 세연의 머릿속에 맴도는 음악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인간의 언어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으로 신경이 쓰이면서 세연의 집중력은 확 깨어졌다.
지금 누가 민폐인진 명백했으므로 세연은 미안하다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이 순간적으로 짜증을 느꼈다.
「아, 잠시만요…….」
“……?”
{그게 아니라. 죄송, 죄송합니다. 조금만 있다가 나갈게요.}
“…….”
한국어와 영어를 번갈아 쓰면서 횡설수설하자 직원은 조금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았지만, 억지로 세연을 끌고 나가거나 하진 않았다. 이 스와레 연주회를 끝으로 다른 일정은 없으니 조금 정도는 더 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세연의 눈에 맺혀 있는 절실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음악의 신전을 관리하는 직원의 입장에선 어느 정도 공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금 있으면 홀 점검과 청소 등으로 사람들이 올 겁니다. 그 전에 나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세연은 러시아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적당히 있다가 나가라는 뉘앙스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은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곧 등을 돌려 나갔다.
‘아…… 정말.’
탁탁거리며 나가는 발소리마저 거슬린다. 그 소리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한참이나 기다리다가 다시 집중해 보려 해도 잘 되지 않았다.
막 연주회가 끝나고 박수와 환호, 그리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나갔을 땐 정신없이 음악에 빠져 있느라 그마저도 신경 쓰지 않고 있을 수 있었는데.
한 번 이렇게 집중이 깨지고 나니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거의 다 외우고 있는 악보를 억지로 일깨우며 다시 그것을 근거로 음악을 일깨워 보았다. 하지만 뭔가 아리송해져 있었다.
순간의 예술로서 음악은 이렇게 쉽게 증발한다. 산화하고 어수선해진다.
그 사실이 세연은 무척이나 슬펐지만,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던 그 진동의 일부분은 분명 자신의 손끝 어딘가에 스며들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납득하며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였다.
‘어?’
무대 왼쪽 끝. 연주자 대기실로 향하는 곳에서 빛의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누군가가 어두컴컴한 홀로 향하는 문을 연 것이다.
세연이 그쪽을 바라보자, 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
희미하게 빛나는 머리카락과 흰 어깨.
세연이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친구이자, 존경하는 피아니스트이기도 한 타티아나였다.
「!!」
세연은 자기도 모르게 좌석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갔다. 이전 같았으면 손을 흔들며 여기 있다고 불렀을 텐데, 지금 세연은 타티아나가 이쪽을 볼까 싶어 숨어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좌석에 길게 누워 버리고 나서도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계속 여기 앉아 있었을 때도 그녀는 누군가에게서 숨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직원이 와서 부를 때까지 계속 뻔뻔하게 앉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타티아나를 보니 어쩐지 지금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복잡한 마음이 혼란스럽게 세연을 끌어내렸을 뿐이다.
「…….」
좌석에 누워 등허리로만 몸을 받치고, 앞으로 꺾인 목을 꼼짝도 못하고 눈만 동그랗게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내밀고 있던 타티아나는 무대 쪽으로 두어 걸음 내디뎠다.
마치 후광처럼 타티아나는 등 뒤에서 길게 비쳐오는 빛을 휘감고 있었다. 그 빛은 무대 중앙 쪽으로 향하여 피아노 위의 검은 광택으로 흘렀다.
검은 안개 같은 어둠이 자욱한 홀에서 빛으로 연결된 타티아나와 피아노의 모습은 세연의 시간을 멈추었다. 눈으로 보이는 그 광경은 마치 그림처럼 세연의 기억 속에 인상적으로 새겨졌다.
빛 속에서 타티아나는 당연히 피아노 앞으로 향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두어 걸음 나온 후로 움직이지 않고 고개만을 살짝 돌려 청중석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세연, 혹시 계신가요?}
마이크도 없이 육성으로 발하는 말이었지만 갑자기 홀 안에 세연의 이름이 울려 퍼지자 세연은 적잖이 당황했다.
어떻게 안 거지? 저렇게 묻는 걸 보면 이미 확신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되기 전에 미리 나가서 축하해 주고 정말 좋았다고 말해 줄 걸 그랬다. 뒤늦게 후회하며 세연은 지금 길게 눕듯이 숨어 있는 이 상황을 어찌 수습해야 하나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지금 살금살금 기어서 나가려고 해 봐야 타티아나가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한 그 눈을 속이진 못할 것 같았다.
세연은 어쩔 수 없이 다시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갑자기 청중석에서 세연의 얼굴이 뿅 튀어나오니 타티아나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무, 무엇 하고 계시나요?}
{잠깐 앉아 있었어.}
{……예?}
타티아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이쪽으로 다가오는 대신 안심했다는 듯 어깨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이만 나와 주세요. 세연의 교수님께서 찾고 계세요.}
{응…… 그래?}
{예. 걱정하고 계시던걸요.}
{그래서 너한테 찾아 달라고 하신 거야?}
{아뇨. 전 옆에서 들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말씀하시는 분위기와 세연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만 들어도 알 수 있었죠.}
아마 교수님이 지휘자님과 이야기를 하시는데 옆에서 들었나 보다. 세연은 대충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티아나는 머리가 좋은 편이니까 대화를 대충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테지.
그렇게 듣고 이렇게 찾으러 와 준 건 정말 고마웠다.
{그럼 밖으로…… 나와 주세요.}
하지만 세연은 아무 이유 없이 이렇게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대로 나가 버린다면 왜 계속 앉아 있었는지에 대한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쩍 다시 대기실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려 하는 타티아나를 보던 세연은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타티아나?}
{예?}
{연주회 말야…… 정말 좋았어. 어쩌면 지금까지 들었던 것들 중에 제일로?}
약간 뜬금없는 타이밍의 칭찬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멈칫하기엔 충분했다.
그녀는 다시 멈춰 서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전에 리사이틀 때도 진짜 좋았지만! 그때보다 실력이 더 좋아진 느낌이야. 연습 얼마나 한 거야?}
{연습은…….}
{아, 얼마 못 했지. 옆에서 보고도 이런 소리 한다. 나도 참.}
농담조로 웃으며 말하고 있긴 하지만, 세연은 리허설 동안 타티아나와 오케스트라가 얼마나 치열하게 시간을 쪼개어 사용했는지 똑똑히 본 바 있었다.
그 모든 과정과 오늘의 결과까지.
{근데도 너무 인상 깊었어.}
모든 것들이 세연에겐 또렷한 추억이자 세계를 보는 시야를 넓혀 주는 기억으로 남았다.
세연의 진심 어린 감탄이 저 멀리 무대의 타티아나에게도 전해졌다. 타티아나는 잠시 말없이 세연을 바라보더니, 몸을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고마워요, 이젠 밖에서 이야기해요. 세연. 여긴 너무 어두워요.}
{있잖아, 타티아나.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부탁 말씀이신가요?}
부탁이란 말을 듣자마자 타티아나의 태도가 진지해졌다.
타티아나는 쉽게 사람에게 곁을 내어 주지 않는 거리감을 지닌 냉정한 사람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했다. 그 기묘한 괴리를 세연은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알고도 이렇게 말하고 있자니 가슴이 쿡쿡 찔리는 기분이 든다.
연달아 자꾸 무례하게 굴고 있는 것 같단 자각은 있었다. 아무리 착한 타티아나라도 어느 한도를 넘어서면 자신을 우습게 여긴다고 생각하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연은 입을 열어 부탁했다.
{쇼팽의 독주곡 하나만 연주해 주면 안 될까? 거기에 있는 피아노로.}
귀를 기울이던 타티아나의 분위기가 순간 서늘해졌다.
너무 뜬금없고 황당한 리퀘스트이니 여느 피아니스트든 간에 곤혹스러워 할 만했다. 충분히 이해할 만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타티아나가 느끼는 것은 비단 그런 난감함뿐만이 아닌 듯했다.
{왜 쇼팽이죠?}
{어…… 그냥? 그냥 듣고 싶어졌어.}
{그냥이라는 건 아무 이유가 되지 못해요.}
{이유가 있어야만 음악을 할 수 있는 거야?}
{…….}
사실 이유가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들었던 그녀의 쇼팽은 그야말로 음악을 가지고 논다고 해도 될 정도로 뛰어났었는데, 그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도 평소 쇼팽을 잘 연주하지 않는 것에 대한 궁금증.
그리고 타티아나의 연주를 들어 본 교수가 쇼팽의 독주곡이라면 조금 더 많은 걸 들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던 것.
방금 전 들었던 모차르트와 베토벤에 이어 쇼팽을 들어보고 싶다는 음악가로서의 욕구 등.
너무 많은 이유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데다가, 그걸 하나하나 설명하다 보면 타티아나에게 분명 실수를 하게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고 있어서 세연은 이러쿵저러쿵 설명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바는 분명 있었다.
{세연.}
타티아나가 조용히 말했다.
그제야 세연은 볼 수 있었다. 대기실에서부터 드리운 빛은 후광처럼 타티아나를 감싸고 있기도 하지만, 그만큼 길고 어두운 그림자를 무대 위로 드리우고 있다는 것을.
그 그림자의 끝 역시 피아노에 닿고 있었다.
화를 내지는 않는다. 그보단 회한과 체념의 감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세연은 타티아나가 곧잘 운명을 입에 담는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간 전 세연에게 잘해 주려고 했어요. 그리고 절대로 무언가 요구하고 싶진 않았죠.}
꽤나 직접적인 어투. 그 말대로 타티아나는 무엇이든 세연에게 잘해 주려고만 했었다.
{그런데 제가 요구하길 바라시는 건가요?}
그러나 이 말은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방금 쇼팽을 요구한 것은 세연이었는데도 타티아나는 반대로 말하고 있었다.
타티아나의 영어가 미숙한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알아듣는 세연의 문제인지, 그것은 다시 따져보지 않는 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세연은 지금 말로 오가는 이야기는 그리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말로는 잘 모르겠어. 난 뭐가 뭔지 잘 모르니까…… 바보라서 그런가?}
{……세연이 다니는 고등학교는 한국에서도 높은 성적을 받아야만 다닐 수 있는 곳 아니었나요?}
세연이 다니는 인문계 고등학교는 다니는 것만으로도 부러움을 살 정도로 좋은 곳이었다. 그녀는 공부도 곧잘 하는 편이어서 성적도 좋았다.
평범한 학생들이라면 얽매여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 건 인생에 전혀 도움이 안 되더라구.}
그러나 세연은 홀가분하게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났다.
타티아나는 조용히 세연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자유롭게만 보이는 세연이 사실 그렇지도 않다는 걸 꿰뚫어본 눈빛이었다.
{음악은 도움이 되나요?}
{응? 응.}
세연을 완벽하게 옭아매고 있는 것은 바로 음악이었다. 지금 그녀는 그것 외의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많이.}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이니 타티아나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빛을 뒤에 두고 곧게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타티아나는 같은 또래의 아이가 아니라 인간이 아닌 무언가인 것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세연은 그녀에게 바라는 것을 말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몇 초 정도. 가만히 서 있던 타티아나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전 쇼팽을 연주하지 않은지 너무 오래되었어요. 그러니…… 어떻게 할지 저도 잘 몰라요.}
{쇼팽이 섭섭해하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작곡을 너무 잘한 것이 쇼팽의 잘못은 아닐 테니.}
이 또한 이상한 말이었다. 타티아나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하곤 했다.
하지만 세연은 이제 조금씩은 그 이면을 읽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곡을 너무 잘 연주하는 것도 네 탓은 아닐 거야.}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음…… 글쎄? 그냥 직감?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난 네가 쇼팽을 잘 연주하지 못해서 감추고 있는 거라곤 상상도 못 하겠어.}
너무 잘해서 감춘다는 것도 우스운 말이겠지만, 세연이 추리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타티아나가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 준 것도 여기까지였다.
“…….”
타티아나는 뒤로 휙 돌더니 발걸음을 옮겼다.
그대로 나가 버리나 싶더니, 열려 있던 대기실 문손잡이를 잡고는 밀어 닫아 버렸다.
무대 위로 길게 뻗치던 광선이 점점 좁아지더니 이윽고 완전히 사라졌고, 안내등만이 비치는 어슴푸레한 어둠이 다시 홀 전체를 짓눌러 왔다.
그 어둠 속에서 타티아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또각거리는 소리는 무대를 통해 들려왔다. 가슴께가 섬찟한 느낌이 든다.
무대 중앙까지 향하는 데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검푸른 실루엣은 거대하고 새카만 형체를 한 피아노 앞에 가서 섰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 옆을 짚더니 허리를 굽히곤 무언가 고뇌하듯 서 있었다.
하지만 곧 다시 그 실루엣이 허리를 폈을 때.
그곳엔 세연의 상상 속에 있던 세상에서 제일 강인한 피아니스트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