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14화 (714/1,277)

##  714화

세연은 숨죽인 채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멀리 떨어져 있기에 정확하진 않지만, 자신이 지금 타티아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전혀 그럴 의도가 없다고 해서 잘못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지금 타티아나는 세연을 벌주려 할지도 모른다. 그녀가 피아노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세연은 이미 몇 번이나 봐 왔다.

압도적인 연주 실력으로 기를 죽이는 것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타티아나가 행사할 수 있는 건 상식적인 선을 한참이나 넘어서 있는 강압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 예선전에서 타티아나가 연주했던 쇼팽의 영웅 폴로네이즈는 자유자재로 형태를 변화하며 머릿속 레퍼런스를 무너뜨리고 연습과 연구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찰나의 순간을 뒤트는 리듬감각과 음색의 변화는 그대로 손톱 밑에 박힌 가시가 되어, 자신만만하던 피아니스트 그리고리를 침몰시켰다.

먼저 연주했던 세연도 뒤늦게 휘말려서 혼란스러움을 느낄 정도로 강렬하고 공격적인 의도가 명확한 연주였다.

어쩌면 타티아나가 지금껏 쇼팽을 잘 연주하지 않는 건, 자신이 쇼팽을 연주할 때면 그런 경향이 짙게 드러나곤 한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쉽게 조절할 수 없다면 아예 밖으로 내지 않는다. 그녀는 그만큼 책임감 있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

그러나 지금 어둠 속에서 타티아나는 그런 배려를 서서히 내려놓고 있었다.

조금 무섭다.

어둠의 일렁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타티아나는 이미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그 무언가가 자신의 음악관을 뒤틀어놓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두렵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요 몇 년간 피아노에 매진해 온 세연에게 있어서 쇼팽의 공부란 굉장히 소중한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질지도 모른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래도 세연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어둠을 직시했다. 잘 보이진 않지만,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전부 보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세연은 분명 타티아나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음을 느꼈다.

귀기 어린 무언가, 망설임, 운명에 대한 체념 등의 어려운 감정들. 그런 것들이 느껴져 온다.

“…….”

만약 그녀가 본 실력을 낸다면, 세연은 저항해야만 했다. 지금까지 공부해 온 쇼팽에 확신을 지니고 강한 정신력으로 지켜 내야 한다.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는 건 아는데, 세연은 마음속에 빗장을 걸 수 없었다.

‘안 될 것 같아…….’

물론 담담하게 들으려 해 봐야 타티아나가 작정하고 음악으로 흔들어 버리려 한다면 아무 소용 없겠지.

하지만 그런 것보다, 세연은 지금 이 상황에서도 기대를 느낄 정도로 타티아나를 좋아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쩔 수 없었다. 타티아나가 쇼팽을 연주한다면 언제까지고 그 곡에 영향을 받게 될 것 같았다. 그만큼 타티아나라는 피아니스트는 이미 세연에게 있어서 중요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세연은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며 이 자리에 앉아 있다.

무례라는 걸 알면서도 쇼팽을 요청한 주제에 이제 와서 안 듣고 무시하려는 건 우스운 일이기도 하고.

「…….」

세연 역시 많은 것을 내려놓고 온 감각을 열어 두었다.

타티아나가 무엇을 하든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세연을 타이르는 목소리를 내어도 괜찮았고, 정말로 화가 나서 쇼팽을 무기로 한다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반쯤 생각하길 포기한 세연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타티아나가 움직였다.

느릿한 실루엣은 스륵 움직이더니 피아노와 하나 된 듯 달라붙었다.

무대 위에서 뭉친 검은 덩어리의 존재감은 아무 소리를 내지 않아도 시시각각 커져 갔다. 세연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 옴을 느꼈다.

잠시 후, 생각치도 못한 음악이 어둠을 파고들었다.

‘……?’

공기의 진동이 느껴지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던 세연은 그 진동이 굉장히 익숙하고 부드럽다는 것에 놀라며 허리를 폈다.

빗방울처럼 톡톡 떨어지는 라르게토larghetto의 적당한 템포. 울적한 애수를 품고 있지만, 상냥한 목소리로 길게 속삭이는 노래.

쇼팽의 녹턴 op.9의 1번.

밤으로부터 선율을 내려 받아 만들어진 이 곡은, 공간을 둘러싸 인공적인 어둠을 조성하는 이 홀을 아름다운 밤하늘로 변화시켰다.

“…….”

비가 내리는 밤 창가에 앉아 부르는 노래이기도 하고, 울적하게 흥얼거리는 읊조림이기도 하다.

세연 역시 너무나도 잘 아는 곡이었다. 이 곡이 4분의 6박자로 구성되었으며 개성 있는 리듬과 루바토로 그린 밑그림 위에 흩뿌려지는 오른손 선율은 33잇단음표나 되는 긴 호흡으로 이루어진다는 것도.

하지만 그런 분석적인 공부는 이 음악 앞에서 모두 흐릿하게 사라져 버린다.

타티아나가 그리는 녹턴은 그런 숫자로 된 확신 없이도 너무나 분명하고 찬란하게 반짝이는 별과 빗방울을 그린다. 세연은 마치 자신이 이 음악을 연주하며 함께하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느꼈다.

따스한 밤의 선율이 흘러갔다.

‘타티아나…….’

지금까지 세연은 타티아나의 연주를 몇 번이나 봐 왔다.

무대 위에 선 타티아나는 연기자로서 완벽에 가깝다.

그녀는 음악을 통해 분노에 찬 여왕을 연기하다가도 책과 시를 좋아하는 소녀가 되기도 하고 괴팍한 노인의 걸음걸이를 따라 하기도 했다.

혼자서 몇 개나 되는 배역을 다채롭게 소화하면서도 한 번도 엉키거나 헷갈리지 않고 연주하는 모습은 한 인격을 지닌 사람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이 보였다.

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스스로를 내려놓고 타인을 연기할 수 있는 것인지 경이롭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쇼팽의 녹턴은 다른 누가 아닌 타티아나 본인의 목소리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

어쩌면 타티아나가 자신을 혼쭐내려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게 부끄러워졌다. 잔뜩 실력을 뽐내면서 다신 까불지 말라고 윽박지를지도 모른다고, 세연은 그렇게까지 생각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목소리로 조용히 이야기하는 타티아나는 세연에게 그렇게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한 면을 보여 줄 뿐이다. 그녀의 고뇌와 어려움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는 미처 알 수 없지만, 세연은 그런 그녀에게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문득 연주하기 전 타티아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무언가 요구하길 바라는 거냐고……?’

쉽게 이해는 안 가지만, 지금은 어쩐지 조금씩 알 것 같았다.

세연은 타티아나가 은연중에 바라고 있는 것이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고, 그럼에도 절대로 타티아나가 그것을 뻔뻔하게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알았다.

하지만 그것이 이 음악에 녹아 있음은 듣자마자 알 수 있었고, 세연은 그게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타티아나가 구사하는 이 음악은 세연이 바라는 최종적인 목표와 굉장히 흡사하게 닮아 있었다.

이 곡이 이상하리만치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는 쇼팽의 첫 번째 녹턴이 익숙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타티아나라는 피아니스트가 다루는 음악적 형태가 굉장히 친숙하게 다가오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대체 얼마나 멀리 있는지 가늠이 어려울 정도로 수준 높은 음악이었지만, 적어도 방향이 일치한다는 것 정도는 확신이 가능했다.

정갈하게 갈무리된 감정의 흐름과 절제된 음색. 그리고 무엇보다 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루바토에서 비롯되는 리듬은 그 무엇보다 세연이 추구하던 것이었다.

세연은 그제야 확신했다.

그녀는 단순히 타티아나의 음악이 좋아서 따르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엔 훨씬 더 근본에 가까운 음악적 에센스가 닮아 있었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머리로는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하지만 귀로 들려오는 음악엔 거짓이 없었다.

심지어 이 곡뿐만이 아니었다. 수천 피스로 이루어진 퍼즐 중 몇 개를 제자리에 꽂아 넣은 완성품을 본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자마자 세연은 자연스레 다른 녹턴 작품들까지 쉽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리고 녹턴에서 그치지 않고 그 음악적 영감은 마주르카를 거쳐 증폭되어 스케르초와 소나타에까지 닿았다. 순식간에 몇 천개나 되는 퍼즐들이 맞춰져 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 애는 이걸 알고 있었던 걸까.’

전혀 비슷할 만한 구석이 없는데도 닮아 있다.

그래서 거리를 두면서도 계속 신경 쓰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하고, 음악을 가르쳐 주려고 하기도 하며, 이렇게 배워 보라고 요구하기도 하는 걸까.

등이 저릿거리는 기분을 느끼며 세연은 주먹을 꼭 쥐었다.

사실 지금 느끼는 이 기분은 그리 좋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 단 한 곡이 아니라 여러 곡에까지 타티아나에게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일 테니까.

타티아나가 이 음악을 배우길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면 저항할 수 없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연주자로서 이렇게 쉽게 누군가의 음악에 공명하여 영향을 받는다는 건 결코 칭찬받을 일이 아니다. 나약하고 무책임하기까지 하단 뜻이기 때문이다.

“…….”

하지만 한편으론 조금 더 단순한 생각이 든다.

이 또한 일종의 기회로 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만약 쇼팽이 살아 돌아와서 피아노를 치고 있다면 세상 누가 그것을 배우고 싶지 않을까.

물론 타티아나는 쇼팽이 아니고 세연에게 그걸 배울 실력과 자격이 확실히 주어져 있는 것도 아니지만, 보다 가까운 쪽이 먼 쪽을 이끌어 주는 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세연은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할 생각도 없었다.

‘피아니스트는 기계가 아니니까.’

만약 쇼팽에게 직접 피아노를 배우더라도 올곧게 그것만을 따를 필요는 없었다. 현대 피아니스트들의 손에는 쇼팽 이후의 수많은 음악들 역시 쥐어져 있기 때문이다.

세연에게도 여러 사람들의 음악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가 할 일은 그 모든 것들을 취합하여 자신만의 음악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타티아나가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 역시 그런 것이겠지. 그 점을 세연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높게 치솟는 선율을 따라 시선을 올리면서, 세연은 그 끝을 읽고 더욱 높은 곳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

라운지에서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던 김성조는 뒤편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누군가가 홀 안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폐쇄된 홀은 음악 역시 효과적으로 차단해 주지만 단련된 지휘자의 귀를 속일 순 없었다.

김성조는 조금 더 신경을 곤두세웠다. 들려오는 선율은 분명 쇼팽의 녹턴이었다. 대체 누가 지금 연주를 하는 거지?

그가 뒤편을 힐긋거리자 옆에 있던 박성재도 관심을 보였다.

「다음 연주자인가?」

「아뇨, 그럴 사람 없는데…….」

오늘 프리모르스키 콘서트홀의 일정은 다 끝났다. 그냥 누군가 홀을 청소하다가 피아노를 잠깐 연주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소리는 작게 들려오는데도 그의 감각을 간지럽히듯 건드렸다. 그것이 무척이나 신경 쓰여서 김성조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빠르게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내곤 다시 홀로 향했다. 그 뒤를 교수가 따랐다.

“…….”

이미 홀로 들어서는 입구 앞에는 직원 몇 명이 청소도구 등을 들고 서 있었다.

아무도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원칙적으론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모두들 이 짧은 콘서트가 끝나길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김성조 역시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그 옆에 서야만 했다. 들어가지 않고 뭐 하냐고 입을 열기라도 했다간 감상을 방해받은 직원들이 역정을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연주 자체가 굉장히 훌륭했다. 벽 하나를 거쳐서 듣는데도 불구하고 리듬의 구조 등이 심상찮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타티아나인가? 김성조가 생각하기에 이 정도 연주를 할 수 있는 건 지금 여기에 그녀밖에 없었다.

“…….”

박 교수 역시 조용히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교수는 본래 피아니스트였던 만큼 타티아나의 연주에서 보다 느낄 수 있는 게 많을 것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피아노를 치고 있는 거지? 막 의아해할 때쯤, 연주가 마무리되었다.

연주가 끝나고 나서도 문 앞에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은 한참 동안이나 서로의 눈치를 보며 쉽사리 들어가지 못했다. 바로 다시 무언가가 시작될지도 모른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계속 이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김성조는 앞장서서 홀의 문을 열어젖혔다.

“…….”

불도 켜지지 않은 어두운 홀의 내부가 간신히 보인다.

저 멀리 있는 무대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당연히 타티아나일 것이라 생각하고 다가간 김성조는 거리가 차츰 가까워질수록 의아함을 느꼈다.

그리고 직원 중 누군가가 조명을 켰을 때, 모두는 무대 위에 있는 임세연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지? 저 애가 연주한 건가?

「세연아.」

박 교수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피아노 옆에 서 있던 세연은 조명 때문에 눈이 부신지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옷소매로 눈가를 문지르는 그녀에게 교수가 재차 물었다.

「그 애는?」

「나갔어요.」

「방금 그 연주는 무슨 의미였지?」

누가 연주했는지부터 물어봐야 정상일 텐데,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안다는 듯 교수는 훌쩍 뛰어넘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세연은 거기에 묘한 대답을 남겼다.

「숙제예요.」

김성조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교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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