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15화 (715/1,277)

##  715화

연주를 마치고 긴 잔향마저 멎자 곧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건반에서 손까지 떼자 어두운 홀 한가운데에 둥둥 떠 있는 기분마저 든다.

모든 감각이 마비될 것 같은 고요가 내려앉았다.

“…….”

연주를 할 땐 온 집중력을 쏟아부어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지만, 끝나고 나서도 확신이 들진 않았다.

머리 아플 것 없이 거절했으면 깔끔했겠지.

이건 애초에 세연 쪽에서 굉장히 억지를 부린 것이었다. 연주회가 막 끝났는데 이런 식으로 무작정 부탁하는 건 그 누구라 할지라도 실례였다.

딱 잘라 정색하며 거절해도 될 일.

하지만 난 받아들였다.

‘저 애까지 쇼팽을 듣고 싶다 할 줄은 몰랐어…….’

항상 행실에 주의하며 어떠한 판단이나 결정을 조심스레 하려고 하지만…… 난 그렇게 냉정하지도, 똑똑하지도 못했다.

스스로를 올바르게 가누는 것만으로도 버거움을 느끼며 빈틈으로 감정 등이 새어나가는 것을 붙잡을 수 없었다.

내 주변 사람들은 표정만 보고도 금방 속내를 읽거나 걱정을 하곤 했고, 피아노 연주라도 한다면 말을 주고받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쉽게 내 생각을 읽어내곤 했다.

세연도 듣는 귀가 굉장히 예민한 연주자였다.

“…….”

그녀는 이미 내가 쇼팽을 기피한다는 걸 알고 있다. 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나는 나대로 세연이 그렇게 느꼈다는 것이 음악가의 통찰로 느껴지기도 해서 조금은 기뻤지만,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쇼팽을 막 연주할 수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내가 다루는 수많은 곡들과 쇼팽엔 큰 차이가 있었다.

다른 곡들은 어디에서 연주하던 큰 상관이 없다. 남아 있는 모든 것들이 몇 번이나 완전히 덧씌워져서 색이 바뀌어져 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뻗어 그 최선두에 음악을 위치시켜 놓았다. 새롭게 쌓아올린 이 거대한 탑은 그야말로 신축 건물이었다.

하지만 쇼팽은 조금 다르다.

이 역시 몇 번이고 완성을 거듭해 나가면서 새로이 쌓아올렸지만, 그 근간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가장 오랫동안 매달렸던 탓이었을까. 기존 박제를 부숴 버린 후에도 그 자국은 길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난 예전 세연의 쇼팽에서 그 자국의 일치를 발견한 적이 있다.

때문에 난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곡이라면 세연 앞에서 연주해도 아무렇지도 않고, 되레 따라와 주었으면 좋겠지만…… 쇼팽은 안 된다고.

‘그런데 왜 받아들여 버린 걸까.’

쇼팽에는 내 개인적 미련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그것이 다른 연주자들에게 영향을 준다면 몰라도 세연에게 닿으면 안 된다는 것쯤은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건 너무 비겁한 짓이니까.

내가 이 연주를 하는 것 자체가 어떠한 요구가 되어 버리고, 세연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비슷한 자국을 짚어 나가며 내 손짓을 배워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난 세연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지금 일방적으로 어리광을 부리듯 하는 세연이 어쩌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독자적인 연주자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세연이 지금까지 보여 준 연주자로서의 실력과 음악성은 믿을 수 있었다.

그리고 처음엔 숨으면서 조심스럽나 싶더니, 갑자기 본색을 드러내며 쇼팽마저 내놓으라며 손을 내밀던 그 적극적인 태도까지. 결국 난 어둠 속에서도 빛나던 그녀의 목소리를 무시하지 못하고 넘어가 버린 것이다.

세연이라면 망령을 쫓는 것이 아니라, 기름을 붓고 불살라 앞을 밝히고 나아갈 수단으로 사용해 줄지도 모른다.

처음엔 궁금증으로 같은 자국을 짚어 볼지 모르지만, 그 이상의 맹목 없이 정말로 자기 향상에만 집중해 줄 것이란 기대가 있다.

그 기대에 걸고 쇼팽을 연주했다.

하지만 결국은 그녀에게 책임을 넘겨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

잘한 것인가, 아니면 실수였을까. 여러 가지로 머리가 아팠다.

난 이 어둠을 위시로 도피하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침묵했다. 지금 복잡할 세연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면 무언가 먼저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방금 전까지 음악으로 너무 많은 말을 했던 탓일까, 사람의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내 착각이었다.

무대를 마친 연주자는 무언가 먼저 할 필요가 없었다. 먼저 움직여야 하는 쪽은 청중이었다. 세연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작은 박수 소리가 어둠을 울린다.

‘세연…….’

계속해서, 계속해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그 청명한 소리가 날 일으켜 세웠다.

불안하고 걱정스러웠지만 지금 들려오는 소리는 확신과 감탄에 차 있어서 내 부정적 감정들을 한껏 덜어주었다.

되레 그녀 쪽에서 날 위로하는 것 같았다.

잘 들었으니 걱정 말고 내려가도 좋다고.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연주자는 음악 외의 것으로 청중을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청중석 쪽에 어슴푸레 보이는 인영을 향해 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빠르게 돌아서선 무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대기실 문을 다시 닫을 때까지, 박수 소리는 계속해서 내 뒤를 따라왔다.

“…….”

갑자기 밝은 빛을 마주하자 눈물이 나왔다. 난 손을 들어 눈 위쪽을 가린 채 걸었다.

다행히 대기실엔 아무도 없어서 지금 뭘 한 거냐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나중에라면 모를까 지금은 누구에게도 질문 받고 싶지 않았다.

난 빛에 적응될 때까지만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서둘러 눈물을 닦고는 단원들이 있을 의상실 쪽으로 향했다.

***

눈을 뜨니 늦은 아침이었다.

약한 근육통이 온몸에 퍼져 있었다. 머리도 조금 아픈 것 같고, 컨디션이 정상은 아니었다. 연주회의 피로가 쌓여 있는데다가, 어제 밤늦게까지 단원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빨리 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연주회를 잘 마무리 짓고 나서 함께 했던 사람들과 성공을 축하하는 건 행복한 일이었지만, 안 그래도 얼마 남지 않았던 체력이 사람들과 어울리느라 바닥이 난 것 같았다. 중간에 날 배려한 몇몇 단원들이 돌려보내 줘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단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은 날이니 큰 걱정 할 건 없었다.

조금 적적한 기분이 들어서 텔레비전을 틀어놓고도 바로 이불에서 나오지 않고 한참이나 뒹굴던 나는, 스마트폰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난 먼저 교수님이랑 돌아갈게. 취소된 비행기 표를 운 좋게 구하게 되었거든. 마지막으로 식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네. 미안해.]

세연으로부터 온 메시지는 마지막에 용서를 비는 듯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이모티콘으로 끝나고 있었다.

박 교수님의 비행기에 맞추어 티켓을 구해 보다가 어떻게 잘 되었나 보다. 올 때도 배편으로 20시간이 걸렸다고 했는데 돌아갈 때도 그렇게 오래 걸리면 너무 힘들다. 대신 시간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어서 아침 일찍 출발한 것 같다.

세연이 오늘 갈 줄 알았더라면 어제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할 것 그랬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헤어진 것도 나쁘지 않단 느낌이었다.

어제 연주회 후에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더 묻고 싶은 것도 없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없다는 의미이리라. 그렇다면 세연이 만들어 낼 결과물은 언젠가 음악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 멀진 않다. 바로 내년에 있을 콩쿠르에 그녀도 참가하겠다고 포부를 밝힌 바 있었으니까.

아마 그때까진 만날 일이 없지 않을까. 그런 확신이 들었다. 세연은 분명 내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의 준비를 마치고 나서 내 앞에 설 것이다.

그런 미래를 희망하며 난 천천히 답장했다. 남은 방학 잘 보내라는 짤막한 인사말뿐이었다.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후아.”

메시지를 보내고 난 스마트폰을 옆에 대충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다시 뒤로 누워 버렸다. 온몸이 노곤하고 피곤했다. 그냥 이대로 다시 자 버리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난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오늘 하루는 마음껏 자 버리고, 내일부터 며칠간 더 관광을 하다가 돌아가겠다고 해도 별 문제 없을 테지.

하지만 내가 어떤 결정을 해도 별 문제 없을 것이란 생각은 날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태해지면 안 된다는 경각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될 뿐이었다. 스스로를 컨트롤하지 못한다면 정말 엉망진창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혹자는 나태야말로 인간이 가장 죄책감 없이 저지를 수 있는 죄악이라 말하기도 했지만, 난 나태한 것으로도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뒤척이던 나는 다시 반듯하게 일어나 앉았다. 연주자에겐 잘 쉬는 것도 시간을 보내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그냥 누워 있는 건 효과적이지 못했다. 난 천천히 팔과 다리를 스트레칭하면서 저릿함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빨리 돌아가는 게 좋겠지…….”

스트레칭을 하면서 이러저런 생각을 해 봤다.

관광을 할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모르는 것들을 보는 것도 좋겠지만, 모스크바에서 기다리고 있을 미하일 선생님을 떠올리니 유유자적할 생각이 싹 사라졌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서 미하일 선생님을 뵙고 싶었다.

이번 연주회에 대한 이야기도 해 드리고, 피드백도 받아야지.

할 건 정말 많았다. 이번엔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지만 세상엔 굉장히 많은 협주곡들이 있었으니까.

이번 연주회를 발판삼아 보다 많은 곡들을 노련하게 다룰 수 있게 되고 싶었다. 물론 당장 협연 기회를 바로바로 잡는 건 어렵겠지만, 일정은 되도록 빠르게 하는 편이 좋았다.

그렇게 앞으로의 일을 떠올리며 스트레칭을 하던 나는 무엇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음을 깨달았다.

“…….”

외출 준비를 마치고 빅토르를 부르자 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타났다.

“아가씨? 아침부터 무슨 일입니까?”

“아침이니까요?”

“아니, 그게 아니라…… 어제 막 연주회 마치신 분이 왜 쉬질 않으시고.”

그는 내가 오늘 하루 종일 호텔방에서 뒹굴거릴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그 말대로 난 연주자로서 쉬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내 시간이라고 해서 오로지 나에게만 써야 하는 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쓸 수도 있는 것이다.

“선물을 사려고 해요. 모스크바에 돌아가면 드릴 분들이 많아요.”

물론 선물을 사는 것 정도는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빅토르 몰래 나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아예 먼저 부탁하는 편이 나았다.

빅토르는 그런 날 보더니 별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을 사는 것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내가 빠르게 행동하는 것에서 그다음의 일정도 읽어내고 있었다.

“돌아가시는 건 오늘로 하실 생각이십니까?”

“되도록 빠르게 돌아가려 하지만…… 오늘 갈 수도 있나요?”

내가 타고 온 전용기는 급한 내 요청에 아버지가 빌려주신 것이다. 때문에 열흘 넘도록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가서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겠지.

나는 다시 전용기를 부를 것 없이 이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빅토르는 굉장히 유능한 사람이었으니 최대한 빠른 티켓을 구해 주겠지만…… 그래도 오늘 바로 돌아가는 건 어렵지 않을까?

그런 상식적인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빅토르가 하는 말에 깜짝 놀랐다.

“당장도 가능합니다. 아가씨 전용기인데 안 될 것 무어 있겠습니까?”

“……예?”

“지금 보니까 뭘 타고 오셨는진 까맣게 잊고 일반 항공사를 이용하려 하셨던 것 같은데…….”

비스듬히 선 빅토르는 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냐는 투로 말했다.

“유리 님께서 적어도 이번 방학 동안은 아가씨가 발이 묶이거나 하실 일 없게 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실 것 없이 원하시는 일정대로 움직이시면 됩니다.”

설마하니 이 정도까지 해 주실 줄은 미처 몰랐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도 아버지가 정말 많은 편의를 봐 주고 계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다.

적어도 선물 정도는 아버지가 주신 카드가 아니라 내가 받은 개런티로 살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어느 정도 결정을 내린 나는 빅토르를 올려다보았다.

“가죠, 빅토르. 선물부터 사야겠어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주변분들과 친구분들까지…… 음, 백화점으로 모실까요?”

빅토르는 날 따라다니는 입장인데도 전혀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내가 사람들에게 선물을 한다는 말에 뭔가 본인이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정서적으로 불안정했던 시기를 모두 봐 온 사람이다 보니 이런 사소한 것에도 기뻐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은 쏙 빼놓고 말하고 있는 게 참 그다웠다. 난 당장 눈앞에 있는 내 경호원에게 무엇을 해 주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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