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6화
거의 막바지에 이른 음악을 피날레로 몰아붙이다가, 사뿐히 내려놓았다.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무너뜨리지 않고 발렌티나는 손끝에 힘을 주었다.
‘여기까지…… 부드럽게.’
발렌티나는 협연을 할 때 마무리가 약간 아쉽다는 평을 종종 듣곤 했다.
연주가 막바지에 다다를수록 템포가 조금씩 빨라지면서 세심한 컨트롤을 등한시하게 된다는 것은 발렌티나 스스로도 느끼는 문제점이었다.
곡이 짧거나 혼자서 할 땐 별로 그렇지 않았는데, 꼭 다른 사람들과 협연을 할 때면 그렇게 되었다. 곡도 길고 혼자서 마음대로 음악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오케스트라에 밀리지 않으려고 기를 쓰다가 생기곤 하는 문제였다.
그전까진 그런 미숙함이 큰 흠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열여섯 살이 되었다면 슬슬 고쳐야 할 때였다. 이제 이번 방학이 지나가면 10학년이 되어 버리기도 하고, 갈수록 세상은 그녀에게 엄격해질 것이다.
지도 선생님에게 그런 부분에 대해 다시 한번 교육받은 발렌티나는 이번엔 정말 신경 써서 마무리 부분을 마쳤다.
물론 오케스트라를 옆에 두고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했던 것 중 가장 잘한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정말 고마웠어요. 너무 좋아요.”
연주를 마친 발렌티나는 고개를 돌려 왼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이번 협주곡 투 피아노 리허설을 도와준 앙상블 피아니스트 프라스코비야가 앉아 있었다.
프라스코비야는 중앙음악학교에 고용된 사람으로서 평소엔 반주를 필요로 하는 관현악과에 소속되어 있지만, 방학엔 종종 피아노과 학생들을 위한 특별 클래스를 열기도 했다. 협주곡을 연습하는 학생들은 신청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방학 중에 연주회나 콩쿠르 일정을 잡아서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러 떠난 학생들도 많지만, 이렇게 학교에서 열리는 클래스에 참가하는 것도 좋은 기회였다.
“…….”
프라스코비야에게 말을 건넨 발렌티나는 잠시 긴장하며 그녀의 평을 기다렸다.
수많은 학생을 접해 왔을 그녀는 콩쿠르 심사위원처럼 높은 음악적 견식을 갖추고 있었다.
학생들 사이에선 프라스코비야가 하는 말을 귓등으로 흘리기라도 했다간 무대에 오르고 나서야 망치는 일도 있으니, 절대로 그녀의 조언을 무시하지 말고 새겨들으란 이야기도 돌고 있었다. 그만큼 중앙음악학교에서 그녀가 쌓아온 실력과 신뢰는 견고했다.
난 잘한 것 같은데…… 좋은 말 들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발렌티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발렌티나.”
프라스코비야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어간 악보를 다시 처음으로 되돌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연습 많이 하셨나 봐요?”
“잘했나요?”
“그럼요? 미스가 거의 없는 것 같던데요.”
일단은 호평이다!
발렌티나는 대놓고 긴장을 풀면서 헤실거렸다. 그 모습을 본 프라스코비야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이것저것 따지고 복잡하게 구는 학생들에 비해 발렌티나는 굉장히 솔직한 편이었다.
하지만 잘한 연주라 하더라도 피아니스트라면 그 위를 노려야만 했다.
프라스코비야가 넌지시 말했다.
“그래도…… 음, 혹시 괜찮다면 몇몇 부분 조언을 조금 해 줄까요? 자잘한 것들이긴 하지만.”
“부탁드릴게요!”
자신감에 찬 발렌티나는 고개를 번쩍 들고는 말했다.
잠시 동안 피드백 시간이 이어졌다. 지도 선생님과 레슨을 하는 것처럼 해석을 뜯어고치거나 테크닉에 대한 조언을 하는 건 아니었다. 프라스코비야는 오케스트라의 입장에서 협연자에게 요구할 만한 부분들을 짚어 주고 있었다.
어떤 부분은 고음역대가 아니라 저음역대에 귀를 두고 있어야 한다거나, 템포를 늦춰 나가는 부분을 피아노가 먼저 시작해 주는 게 차라리 낫다거나.
여러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조언들이었다. 발렌티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프라스코비야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다른 건 다 좋았어요. 발렌티나.”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꼭 새겨들을게요.”
“그렇게 해 준다니 고맙네요?”
프라스코비야는 자신의 조언은 그냥 염두에 두는 정도로만 들어 달라는 듯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발렌티나는 다른 학생들이 프라스코비야의 조언에 대해 이야기하던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도 연주 자체가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은 전혀 없었으니까, 이 정도면 진짜 잘한 거 아닐까?
기분이 좋아진 발렌티나가 생글거리며 눈을 빛내자 프라스코비야 역시 기쁜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 준다면 발렌티나는 분명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장담해요.”
“열심히 할게요.”
“좋아요. 좋아요.”
발렌티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두 사람 모두 만족한 상태에서 좋게 끝났다.
그다음은 지금까지 연습실 문쪽에 있는 의자에 앉아 대기하던 아나스타샤의 차례였다.
“…….”
아나스타샤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다리를 꼬고 살짝 삐딱한 자세. 키가 커서 그런지 그렇게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태가 난다.
그리고 무어라 설명할 순 없었지만, 발렌티나는 그녀가 점점 더 어딘가 피아니스트다워지고 있는 것 같단 기분을 느꼈다. 오래 봐 온 친구로서의 직감이었다. 저 형형한 눈빛은 쉽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나스타샤가 괜히 눈가를 찡그렸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발렌티나는 그녀가 그저 장난을 치고 있는 것뿐이라는 걸 잘 알았다.
피식 웃으면서 발렌티나는 일어나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것을 신호로 아나스타샤도 동시에 일어섰다.
“다음이었죠? 음, 아나스타샤.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이에요. 프라스코비야.”
아까 연습실에 들어올 때 이미 인사는 했지만, 이번엔 음악가로서의 인사였다.
프라스코비야가 아나스타샤의 연습을 도와주었던 건 발렌티나가 기억하기로는 몇 년 전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걸 보니 당시에도 인상적이었나 본데, 만약 그때 연주를 기억하고 있다면 지금은 얼마나 발전했는지 비교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런 기대는 프라스코비야 역시 가지고 있는지, 그녀는 아나스타샤에게 손짓했다.
“자, 앉아요. 신청한 곡은 쇼팽 2번 맞죠?”
“예.”
“잠시만요.”
프라스코비야가 잠시 옆에 놓인 가방에서 악보를 찾는 사이, 출입문과 피아노 중간 지점에서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마주했다. 발렌티나는 그냥 스쳐 지나가려 했는데 아나스타샤가 말로 붙잡았다.
“나가 있을 거야?”
“응?”
혹시 신경 쓰이나?
두 사람은 내년 쇼팽 콩쿠르에 출전한다. 때문에 지금은 직접적인 라이벌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오랜 친구로 있으면서도 발렌티나는 그녀와 이렇게 같은 콩쿠르에 출전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경쟁의식을 불태운다고 해서 그전까지의 우정이 나빠져야 하는 건 아니었다. 때문에 발렌티나는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것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피아노 연습을 하는데도 가까이 붙어 다니는 건 다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진 아나스타샤도 별말 없기에 신경 쓰지 않나 했는데, 혹시 내심 불편해하고 있었나?
발렌티나는 일단 가볍게 물어보듯 대꾸했다.
“글쎄? 네가 불편하면?”
아나스타샤는 평소 쿨한 성격이지만 의외로 섬세한 면이 있기도 했다. 발렌티나는 그 부분을 괜히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불편은……. 넌 연주할 때 내가 보고 있어서 불편했니?”
그제야 발렌티나는 친구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혹시 불편해할까 생각했는데, 정반대였다. 아나스타샤는 지금 발렌티나가 옆에서 지켜봐 주길 원하고 있었다.
그럼 돌려줄 말은 하나뿐이었다. 어깨를 쭉 펴면서 발렌티나는 대답했다.
“아니, 나중에 무슨 소리 들을까 기대되던데?”
“……누가 들으면 내가 맨날 못되게 군 줄 알겠어, 발렌티나.”
“걱정 마, 난 꼬치꼬치 캐물어 줄게.”
“나는 할 말 없는 줄 아니?”
콩쿠르 경쟁자인 친구의 연주를 지켜보지 않고 나가 버리면 이득도 없고 실수도 없겠지만, 옆에서 지켜본다면 분명한 이득이 생긴다. 같은 공부를 해 온 연주자로서 서로의 연주에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거기엔 괜히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신뢰가 있어야 하고, 또 그만큼 조심스러워야 하겠지만…… 아나스타샤라면 괜찮을 것이라고 발렌티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생글거리는 발렌티나를 뚱하게 바라보던 아나스타샤는 결국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아무튼, 그러면 이따 같이 가자.”
“응.”
연습 끝나고 나면 근처 카페에라도 가서 배고픈 배를 채우고, 같이 이야기나 하면 좋을 것 같다. 발렌티나는 머릿속으로 가고 싶은 곳들을 몇 군데나 물색하기 시작했다.
아나스타샤는 피아노 의자 앞에 앉았다. 발렌티나보다 키가 큰 그녀는 의자를 조금 낮춰야만 했다.
프라스코비야 역시 악보를 다시 한번 보면서 확인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 길진 않았다. 겨우 30초 정도.
말도 안 될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수많은 학생들을 상대하면서 숙련된 앙상블 피아니스트에겐 그 정도면 충분했다.
물론 다양한 곡을 다루는 프라스코비야와 달리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곡을 외워 와야 했다. 제대로 공부를 해 온 그녀의 피아노 보면대 위엔 아무것도 올라와 있지 않았다.
허리를 편 아나스타샤가 슥 프라스코비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의자 옆부분을 톡톡 치며 물었다.
“시작해도 되나요? 아나스타샤.”
“예. 잘 부탁드려요.”
“저도요.”
그 외에 다른 협의사항은 필요하지 않았다.
프라스코비야는 두말없이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바단조의 신경질적인 음색.
무언가 항의하듯 묻던 음악은 큰 고함소리로 화하여 울려 퍼졌다. 연습실을 울리는 장대한 음량이었다.
프라스코비야가 피아노 한 대로 하는 오케스트라 파트 연주는 그 자체만으로도 음악이라 하기에 문제가 전혀 없을 정도로 멋지고 아름다웠다.
그렇게 2분 정도 되는 오케스트라 파트가 끝난 후, 정확한 타이밍에 아나스타샤의 피아노가 끼어들었다.
‘……와우.’
음악 자체는 먼저 했었던 주제의 연속이었다. 피아노 두 대로 연주하니 사실상 반복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프라스코비야가 사용한 화성의 울림과 아나스타샤가 다루는 세심한 터치 컨트롤의 대비가 극명하게 일어나면서 분명하게 오케스트라에 이은 피아노의 화답으로 들려왔다. 발렌티나는 그 둘을 완벽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건반에서 손을 거의 떼지 않는 것처럼 그대로 유려하게 연주해 나갔다. 우울했던 음성은 어느새인가 밝게 울리다가도, 내면의 슬픔을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더 잘하는데?’
최근에 연습을 엄청나게 많이 하고 있다는 건 안다. 아예 협주곡 연습용으로 오케스트라 파트만 녹음해서 나오는 뮤직 마이너스 원music minus one 사의 음원을 사서 혼자서 계속 연습하고 있다고 했던가.
안 그래도 알캉 같은 난곡을 쳐 버리는 실력이었다. 테크닉은 말할 것도 없이 빠르고 날카롭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많은 연습과 연구로 더해지는 음악성이 얹히자 깜짝 놀랄 정도로 수준 높은 음악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덧붙여지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카리스마적 에너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제하며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아나스타샤의 연주에는 담겨 있었다. 발렌티나는 이런 느낌을 어디에서 느꼈는지 떠올려 냈다. 바로 타티아나의 연주에서였다.
“…….”
강렬하게 치솟아 오르는 낭만주의적 화법. 그 모든 것을 양손에 두르고 아나스타샤는 음악을 휘둘렀다.
***
한 번의 끊김도 없이 리허설이 끝나고, 그 후 피드백도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피드백 내내 프라스코비야는 정말 칭찬밖에 하지 않았다.
발렌티나도 칭찬을 많이 듣긴 했지만 아나스타샤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보기만 해도 지금은 아나스타샤가 훨씬 고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요즘 정말 쇼팽에만 빠져 사나 봐?”
“생각보다 나쁘지 않더라고.”
아나스타샤는 쇼팽을 그렇게 잘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아니었는데, 몇 년 사이에 어쩜 이렇게 잘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가까이에서 이렇게 보니까 살짝 초조하기도 했다. 이래서 경쟁자가 같이 연습하는 건 별로인가……?
하지만 그만큼 고양되는 기분도 있었다. 발렌티나는 오늘 본 것으로 친구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분명하게 파악했고, 때문에 더 힘을 내어서 분명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
“일단…… 뭐 먹으러 갈래?”
“그럴까.”
“뭐 먹을 건데?”
“아무거나.”
“……진짜 본때를 보여 줄까, 아나스타샤?”
“…….”
아무거나 같은 무책임한 소리 하면 나도 무책임해질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반쯤 협박했더니 아나스타샤는 답잖게 흠칫거렸다.
“어…… 글쎄, 생각 좀 해 보자. 배도 고프고.”
“응. 그래서 있잖아, 내가 아까 네 연주 들으면서 생각해 놓은 곳이 있는데…….”
“뭘 들으면서 생각했다고?”
괜히 또 티격태격하면서 두 사람은 복도를 걸어 나갔다.
그때였다.
“앗.”
교복을 입고 있는 아이였다. 하얗게 바랜 금발이 휙 휘날리며 이쪽을 바라본다.
발렌티나가 알기로 방학인데도 교복을 입고 학교에 오는 건 한 사람밖에 없었다.
“타티아나!!”
“와, 발렌티나! 아나스타샤!”
깜짝 놀란 눈을 하던 타티아나는 곧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타티아나만큼이나 놀란 발렌티나는 그녀의 팔을 잡고는 방방 뛰며 물었다.
“뭐야, 뭐야? 어제 연주회 끝났다 하지 않았어?”
“맞아요.”
“그런데 어떻게 벌써 여기에…… 진짜 끝나자마자 날아온 거야?”
“아하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로 오면 시간이 별로 안 걸려요. 신기하죠?”
지구가 도는 걸 반대로 돌아오는 거라 시간이 되돌아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만큼 일찍 출발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연주회를 잘했다는 사실은 미리 들었기도 하고, 애초에 타티아나의 연주는 걱정도 하지 않지만 그래도 직접 보니 마음이 놓이는 기분을 느끼며 발렌티나는 웃었다.
아마 지도 선생님을 보러 왔을 타티아나는 조금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두 분은요?”
“아, 우린 투 피아노로 협주곡 연습했어.”
“학교에서 해 준 거였나요?”
“응. 응. 그보다 이리 와.”
“예? 아.”
발렌티나는 물어보고 싶은 것을 물어보느라 못 했던 포옹을 그녀와 나누었다. 더운 여름인데도 타티아나는 약간 서늘했다.
“왜 이렇게 오랜만인 것 같지.”
“저도요.”
타티아나는 웃으며 그녀를 받아 주고는, 다음으로 아나스타샤와도 마주했다. 놀란 듯 있던 아나스타샤도 가볍게 그녀와 포옹했다.
“아나스타샤.”
“잘 갔다 왔니?”
“예. 덕분에.”
기쁜 듯 말한 타티아나는 밝게 웃더니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물러서서 말했다.
“아…… 맞다. 잠시만요.”
그리고 가지고 온 커다란 손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평소 가지고 다니는 것보단 조금 커 보이는 가방이었다.
이윽고 타티아나는 예쁘게 포장된 상자 두 개를 꺼내더니 내밀었다.
“저기…… 이거, 선물이에요.”
“선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 온 건데, 혹시나 해서 가지고 왔어요.”
발렌티나는 그녀를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우리 우연히 만난 거 아니었니? 그런데 혹시나 싶어서 선물을 가지고 왔다고?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다 나눠 줄 생각은 아니었을 텐데……. 뭔지 잘 모르겠다. 그나저나, 그러면 그 큰 가방 안에는 다 선물들이 차 있는 거야?
갑자기 뭔가 생각날락말락 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는데, 옆에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가방에서 선물이 그렇게 튀어나오면 어떻게 해?”
“?”
“한여름인데 산타클로스가 떠올라 버렸잖니.”
“……예??”
아나스타샤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팔짱을 끼는 자세로 한 손으론 입을 틀어막았다. 타티아나는 황당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어이없어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말을 듣고 나서야 발렌티나는 자신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하하하, 그렇네? 듣고 보니까 그래.”
“그렇지?”
같이 웃으면서 떠들고 있자니 멍하니 있던 타티아나는 심통이 났는지 입술을 삐죽이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두 분…… 그럼 선물은 필요 없으시다는 거죠? 알았어요. 돌려주세요.”
“그런 게 어디 있니? 이제 이건 내 거지.”
어림도 없다는 듯 아나스타샤가 자신이 받은 선물을 뒤로 휙 숨겼다. 그걸 힘으로 뺏을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 타티아나가 잘 아는 일이었다.
타티아나는 힘이 빠진 듯 한숨을 쉬며 팔을 늘어뜨렸다. 평소 꼿꼿한 자세인 그녀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발렌티나는 그 모습도 재미있어서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보니 네 생일도 크리스마스이지 않았니? 타티아나.”
“그, 그만 놀리세요…….”
타티아나는 제발 그만하라는 듯 휙 돌아서기까지 했지만 발렌티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나스타샤와 같이 카페에 갈 계획에 한 명이 늘어났으니 지금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