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17화 (717/1,277)

##  717화

발렌티나는 날 그냥 보내지 않았다. 그녀는 내 팔을 붙잡더니 앞으로 뭐 할 거냐며 물어보았다.

어제 연주회를 마치고 비행기로 돌아온 난 아직도 연주 피로로 쉬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오늘도 선생님을 뵈러 오긴 했지만 레슨은 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일까진 느긋하게 쉴 생각이었다.

별 계획 없다고 말하자마자 발렌티나는 잘되었다는 듯 놀러 가자고 권유했다. 아웃도어 활동을 하자는 뜻은 아니고, 그냥 가볍게 차를 마시는 것 정도로 그녀는 만족하는 듯했다.

그렇게 나와 발렌티나,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근처 카페로 향했다. 그간 학교 주변의 카페는 거의 다 다녀 봤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처음 와 보는 곳이었다.

“원래 다른 것 하는 곳이었는데 이번에 업종을 바꿨다나 봐. 그런데 평이 좋더라고.”

“좋을 만하네.”

발렌티나는 스마트폰을 보여 주면서 이번에 찾아냈다며 재잘거렸고 아나스타샤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근처 건물들이 보통 그렇듯 외부는 비슷비슷한 옛 방식이었지만 내부는 완전히 새롭게 바꾼 느낌이 나서 마음에 들었다.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자 직원이 주문을 받아 갔다. 예전엔 약속이라도 한 듯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커피 나는 디카페인 티로 정해져 있었지만, 요즘은 두 사람도 디카페인 티를 시키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나저나 연주회 어땠어? 고전 레퍼토리로 한다고만 말해 줬잖아.”

주문을 하자마자 궁금했다는 듯 발렌티나가 테이블 너머로 몸을 숙여 오며 물었다.

내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 있는 열흘간 우리는 연락을 자주 주고받긴 했지만, 연주회 자체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거의 나누지 않았다. 내가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타입도 아니거니와, 발렌티나도 전화를 할 때만큼은 내가 일에서 눈을 돌리고 한숨 돌릴 수 있게 해 주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젠 다 끝났으니까 상관없었다. 난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주축으로 한 프로그램으로 한 스와레 연주회였다고 말해 주었다.

발렌티나가 탄성을 흘렸다.

“와, 진짜 고전으로 갔었네?”

“예. 원래 기획이 고전이기도 했고…… 전 2관 오케스트라와 협주곡이 처음이기도 해서요.”

나와 객원 지휘자님이 오기 전 원래 있던 기획에 반드시 맞출 필요는 없었지만, 그것을 원하고 티켓을 구매한 청중들을 위해 적어도 시대 정도는 맞춰 주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협주곡에 대해 서툰 만큼 기본부터 차근차근 시작할 필요도 있었고. 여러모로 내게 좋은 기회가 된 연주회였다.

내 말에 발렌티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치, 근현대부터 시작하는 것보단 그게 낫긴 하지. 최근 곡들은 외우기도 어렵고 카덴차도 많으니까.”

최근 곡이라고는 하지만 그녀가 말하는 건 최소 1800년대 중후반 곡들이었다. 나도 평소엔 별 생각 없이 그렇게 말하곤 하지만 이렇게 들으니까 조금 재미있었다.

발렌티나는 다시 테이블 뒤편으로 허리를 쭉 빼더니 박수를 짝짝 치며 말했다.

“아무튼 대단하다, 타티아나. 리허설이야 그렇다치고 사전에 전혀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날아가선 열흘 만에 하고 오다니…….”

“모두 잘 협조해 주신 덕일까요.”

“거기에 예술 감독까지 했었잖아? 거의 지휘자급으로 정신없었을 것 같은데. 난 못해. 으으.”

피아노 하나에만 신경을 쓰는 것보단 조금 할 일이 많긴 했지만, 그만큼 배울 점도 많았다. 정말 한 번의 연주회였지만 음악가로서 많이 성장한 기분이 들었다.

내 앞의 두 사람도 비슷한 경험을 해 봤으면 하는 마음에, 난 웃으며 권유하듯 말했다.

“아하하, 하실 수 있을 거예요.”

“너희도 알겠지만 난 준비성이 철저한 스타일이잖아? 적어도 반년 전엔 기획되어 있어야…….”

그런데 발렌티나는 괜히 딴청을 부리며 중얼거렸다.

준비성이 철저한 스타일? 이런 말은 조금 미안하지만 발렌티나도 시험 준비 등을 벼락치기로 하는 건 만만찮은 스타일인데……

지금 그녀의 말에 황당해하는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눈을 흘기던 아나스타샤도 물끄러미 날 돌아보았고, 우린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나스타샤는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은 내버려 두자는 듯 내게 말을 걸었다.

“그래도 혼자는 아니었다고 했었지? 타티아나.”

“예. 며칠은 세연이 있었죠.”

원래는 말할지 말지 조금 고민했었던 부분이었으나, 구태여 숨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일전에 미리 말해 준 이야기였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내 연습 한다고 바빠서 못 간걸 후회해야 하는 건지…….”

“후회라뇨? 아나스타샤, 그런 말씀 마세요.”

“……미안, 했던 말 자꾸 반복하게 되네.”

서로 일정이 있을 테니 그런 부분에 있어선 얽매이지 않기로 했는데도 아나스타샤는 괜히 그런 말을 했다. 난 웃으며 그녀에게 더 이상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해 주었다. 지금 사정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세연도 일정이 있을 텐데 연주회에 와 주었다는 건 분명했다. 발렌티나는 꽤 흥미롭다는 듯 물어보았다.

“어쨌든, 그 애는 견학만 했다고 했었지? 나중에 뭐래? 같이 연습 같은 건 안 했어?”

역시 견학 등으로 공부하며 얻어 갈 점이 있지 않았겠냐는 의미였다.

생각해 보니 같이 연습을 한 적은 없었다. 그것 역시 세연이 날 방해하지 않으려 배려해 준 일이겠지만, 지금 생각하니 조금 미안하긴 했다.

“저는 제 일에 바빠서 많이 신경 써 주지 못했어요. 견학도 그저 지휘자님께서 자리만 내어 주었을 뿐이었고요.”

“말 그대로 보기만 했나 보네?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것도라 하면…….”

그렇진 않았다.

난 분명히 이번 연주회를 통해 그녀에게 전해 주고 싶었던 것이 있었고, 그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분명 일부분은 세연에게 가서 닿았다.

그랬기 때문에 세연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 발자국 더 내디뎠다. 그것은 그녀의 요구이기도 하고 내게서 요구를 강제하여 다다를 목표를 만들어 내려는 일이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간에 난 거기에 응했고, 박수를 받았다.

그 박수를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었지만 세연이 원하는 연주를 해 주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도 만족하셨으리라 생각해요. 마지막에.”

“응? 마지막?”

발렌티나는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것까지 구구절절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잠시 후 우리가 주문한 음료와 디저트들이 나왔다. 잠깐 동안이지만 이야기를 나누어서 그런지 마른 목을 축이자 훨씬 나아졌다.

학교에서 협주곡 연습을 한 두 사람은 나보다 더 피곤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차를 한 모금씩 마신 두 사람은 눈에 띄게 긴장을 풀어놓으며 힘이 빠진 듯 보였다.

“발렌티나는 어땠나요? 오늘 아나스타샤와 연습하러 오신 걸 보면 협주곡을 준비하시는 건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아, 응. 맞아. 좋은 기회이기도 하고?”

오늘 무엇을 했는지 발렌티나는 상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학교에서 피아노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협주곡 리허설 클래스를 열어 준 것. 그리고 오케스트라 파트를 맡아 줄 연주자로 프라스코비야가 함께 해 준 것 등.

프라스코비야와 협주곡을 연습하는 건 흔히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었다. 바로 어제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고 온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부러웠다.

“쇼팽이었죠?”

“응. 쇼팽. 우린 거기 나가니까. 다른 걸 연습할 이유가 없지.”

“……그렇네요.”

쇼팽 콩쿠르는 오로지 쇼팽의 곡들만 다루며 그건 협주곡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찻잔을 기울이자 발렌티나는 옆을 손짓하며 말했다.

“쟤는 거의 다 완성한 것 같던데?”

“아나스타샤요?”

“응. 오늘 프라스코비야가 거의 극찬을 하더라니까?”

발렌티나가 호들갑스럽게 제스처를 취해 가면서 그렇게 말하자 아나스타샤는 인상을 썼다. 진심으로 추켜세워 주는 것보단 장난이 강하다는 걸 느낀 모습이었다.

“그렇게까진 안 했잖아.”

“했어. 옆에서 본 내가 객관적으로 보기엔.”

“그게 어떻게 객관적이니……?”

“아무튼 협주곡 준비 거의 완성 직전이란 건 맞는 말이잖아? 너 DVD 프로그램도 거의 다 정해서 맹연습 중이라 했었고.”

하지만 발렌티나의 말엔 장난도 있지만, 분명 진심으로 감탄하는 부분도 많은 것 같았다.

곧 9월이니 이제 신청서를 넣는 12월초까진 3개월 정도 남았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아나스타샤가 곡을 익히는 속도를 생각한다면 이 정도 시간이면 심사용 DVD는 굉장히 잘 나올 것 같았다.

난 아나스타샤를 돌아보며 물었다.

“슬슬 그럴 때라 생각하긴 했어요. 모두 정하신 건가요? 아나스타샤.”

“응. 선생님이랑…… 마카로프가 많이 도와줬어.”

“다행이네요. 음, 전 아직도 미결정이라…….”

난 여전히 이것저것 생각 중이었다. 요즘은 미하일 선생님께서 백방으로 알아보며 협연 자리를 추천해 주셔서 거기에 따라다녔는데…….

협주곡은 콩쿠르 본선까진 가야 연주할 수 있다. 독주곡 준비를 어설프게 해서 중간에 떨어져 버리면 그만큼 우스운 일도 없다.

협주곡도 좋지만 역시 골고루 연습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아나스타샤가 과자를 하나 집어 먹으며 당연하지 않냐는 듯 말했다.

“넌 다뤄야 할 작곡가가 많잖아? 그러니 그렇지. 난 쇼팽 내에서 추려진 곡들만 놓고 고르면 되니까. 어려울 것 없잖니.”

“그런 걸까요.”

쇼팽 콩쿠르 참가자들은 36곡 중 4곡을 선택해서 준비하게 된다. 그에 비해 난 수백, 수천 곡들 중에서 골라야 하니까 폭이 넓긴 했다.

그런데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발렌티나가 갑자기 테이블 위로 주르륵 미끄러지며 하소연했다.

“근데 왜 그 어려울 것 없는 일이 난 어려운 걸까……. 못 고르겠어. 특히 마주르카. 이걸 해야 해 말아야 해??”

“하지 그러니?”

“그렇게 쉽게 말하는 거 마음에 안 들어! 너 나 견제하는 거지?”

“그럼 어렵게 말해 주면 들어 줄 거야?”

“아니?”

발렌티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는 듯 대꾸했고, 아나스타샤는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같은 콩쿠르에 나간다고 해서 두 사람이 싸우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이렇게 쉽게 견제니 방해니 말할 수 있는 것도 그 정도는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친하기 때문이겠지.

맨날 그러듯 자연스럽게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다가, 적당히 말려야겠다 싶어서 살짝 끼어들었다.

“전 발렌티나의 마주르카를 보여 줘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응? 정말?”

“예. DVD와 예선에 선보일 4곡 모두를 테크닉적 숙련도를 보일 필요는 없을 거예요. 전 발렌티나의 리듬이 굉장히 개성 있고 듣기 좋다고 생각하니까…… 강점으로 생각하셔서 올려 봐도 좋지 않을까요?”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안 할 수가 없네.”

“그…… 참고만 해 주시고요.”

“충분히 참고가 됐어.”

저기 옆에서 아나스타샤가 도끼눈을 하고 있는데요…….

이것도 장난의 연장이긴 하겠지만 이러다가 발렌티나가 아나스타샤에게 응징당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렇게 우린 차를 마시며 이미 지나간 일과 앞으로 찾아올 일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서로를 돌아보며 확인했다. 마치 당연한 이야기들을 하듯 자연스럽게 웃으며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내게 크나큰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발렌티나는 쿠키 하나를 집어 찻물에 담갔다가, 쿠키가 부러지는 바람에 울상이 되어 스푼을 들었다. 한숨을 쉬며 조각들을 건져 낸 그녀는 턱을 괴고는 이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다른 현실을 보려는 듯 말했다.

“나도 빨리 DVD 준비하고…… 아, 맞다! 타티아나. 베스나 스튜디오에서 세묜이 연락 왔었어. 우리 그때 사진 찍은 거 찾아가라고.”

“아, 빨리 나왔네요?”

“늦은 편이지. 샘플 몇 장 보내 줬는데 볼래?”

“예, 보여 주세요.”

발렌티나가 스마트폰을 들고 휙휙 넘기며 사진을 보여 주었다. 그녀와 아나스타샤 그리고 내 사진이 차례로 돌아가며 나왔다.

수정이 없어야 하는 프로필 사진이니만큼 있는 그대로의 사진이었다. 인물을 강조하다 보니 배경에 필터가 조금 씌워진 것 같긴 한데 큰 차이는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보니까 조금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분명 바로 보는 것과 똑같은데 어쩐지 다른 사람 같은 느낌이 드니 신기했다.

“무척 잘 나왔네요.”

“그치? 콩쿠르 신청으로 보낼 것 말고도 앨범도 할까 하는데…… 어떻게 할래?”

음반을 남기는 것처럼 사진 앨범을 남기는 것도 꽤 의미 있는 일이란 생각을 종종 하던 참이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할게요.”

“그게 좋아. 이런 것도 다 추억이잖아? 아, 액자도 한다? 우리 단체 사진으로 찍었던 거. 아나스타샤 너도 할 거지?”

“응.”

우리 세 사람이 찍었던 단체 사진이 생각난다. 액자로 만들어서 책상에 올려놓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발렌티나도 굉장히 기대하는지 몸을 좌우로 흔들거리며 즐겁게 이야기했다.

“우리 다 하는 걸로 내가 말해 놓을게. 찾으러 갈 필요는 없고 아마 택배로 올 거야.”

“그렇게 부탁드릴게요. 음, 그리고 샘플 사진 조금 더 볼 수 있을까요?”

“응? 그래.”

중간에 지나간 것 중에 약간 묘한 게 있어서 난 다시 한번 확인해 보기로 했다. 발렌티나가 내게 스마트폰을 넘겨주었다.

사진을 옆으로 몇 번 넘겨보니 거기엔 우리가 스튜디오에서 의상을 갖춰 입고 찍은 사진뿐만이 아니라 누가 봐도 일상복 차림의 아나스타샤가 책상에서 졸고 있는 모습의 사진도 있었다.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사진이 아니라 그림 같아 보인다. 난 발렌티나에게 그대로 스마트폰을 보여 주며 물었다.

“이것도 샘플 사진인가요?”

분명 이런 걸 찍은 기억은 없어서 물어보았더니 발렌티나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건 내가 따로 찍은 거.”

그녀는 의자를 쭉 끌어 내 옆으로 오더니 작게 소곤거렸다. 나도 자연스레 발렌티나와 어깨를 마주했다.

“같이 공부하기로 해 놓고선 졸고 있으니까 어떻게 안 찍을 수 있겠어?”

“펜을 쥐고 있네요?”

“꿈에서 공부 중인 것 같지 않아? 웃기지?”

둘이서 속닥이면서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당연히 누구 이야기인지는 분위기에서 드러난다. 아나스타샤가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잠깐만, 너희 뭐 보니?”

발렌티나는 시치미를 뚝 떼며 웃었다.

“응? 재미있는 거. 맞지? 타티아나.”

“재미있다기보단…… 귀엽네요. 더 없나요?”

“뭐 보냐니까??”

아나스타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남과 동시에 발렌티나는 번개처럼 도망쳤다. 반응하지 못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남겨진 난 아나스타샤가 다가오는데도 꼼짝도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