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8화
찻집에서 나와서도 우린 한참 동안 시내를 돌아다녔다.
특히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정말 물 만난 고기처럼 신이 나 보였다. 두 사람은 원래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약간의 보상심리도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쪽 가 보자! 나 찻잔 사고 싶었거든.”
이미 옷과 문구 등을 이것저것 사면서 쇼핑백 하나가 거의 차 있었지만 아무도 발렌티나를 말릴 수 없었다. 나와 아나스타샤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원래 접시나 찻잔 등을 좋아하는 발렌티나는 한참이나 돌아다니면서 원하는 물건을 골랐다. 난 그런 미적 감각이 있는 편은 아니라서 무덤덤한 기분이었지만, 신나 하는 발렌티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긴 했다.
아나스타샤도 작은 미니어처 자기 주전자를 하나 사고, 발렌티나는 원하는 찻잔을 샀다. 쇼핑백에 넣으니 이젠 더 들어갈 구석이 없었다. 뭔가 더 사면 쇼핑백을 하나 더 만들어서 양손에 들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는지, 발렌티나는 어느 정도 만족한 것처럼 발걸음을 늦추었다.
그녀는 비로소 살 것 같다며 말하기도 했다.
“계속 피아노만 치다 보니 미칠 것 같더라.”
여름방학 동안 난 이리저리 바쁘기도 하고, 지난 열흘간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정말 연주회에만 몰두하다 보니 다른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었는데…… 정신없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도 계속 피아노에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워낙 친구가 많은 발렌티나인지라 평소 자주 놀러 나오지 않았나 싶었는데, 방학 동안은 정말 여행은커녕 외출도 거의 않고 연습만 하다가 가끔 아나스타샤와 만나면 또 연습하고 공부하는 게 전부였다고 한다. 살면서 이렇게 충실한 열흘을 보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며 그녀는 회상했다.
그렇게 열흘 내내 그렇게 집중하는 것으로 발렌티나의 실력은 분명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었겠지만, 이렇게 리프레쉬하는 시간도 필요했다.
“아, 오늘 재밌었어. 진짜.”
발렌티나가 발랄하게 말했다. 손에 든 쇼핑백은 무거웠지만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짧게 웃으며 괜히 핀잔을 주듯 말했다.
“쇼핑만 하고 다닌 것 같은데.”
“그게 좋은 거잖아. 그리고 너희도 있었고.”
“……그러니.”
우리도 모두 함께 있었기 때문에 재미있었다는 그 솔직한 말은 무언가 다른 설명 없어도 깊게 와닿는 부분이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혼자서 이렇게 돌아다닐 생각은 하지도 못할뿐더러 재미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빠르게 필요한 것만 찾아서 휙휙 돌아다니고는 집으로 돌아갔겠지.
두 사람이 옆에 있었기에 이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신적인 휴식엔 도움이 되어도 신체적 휴식엔 영 도움이 안 된다. 슬슬 난 힘들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연주 피로가 덜 가신 상태에서 쉬지 않고 어울려 다닌 게 문제인 것 같다.
발렌티나도 슬슬 그만할 것 같기도 해서, 난 넌지시 두 사람에게 말했다.
“저, 마지막으로 돔 끄니기에 잠시 들러도 될까요? 가깝기도 하고요.”
순간 발렌티나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날 너무 끌고 다녀서 미안하다는 것 같다. 괜찮다는 뜻으로 웃어 보였더니 그녀도 마주 웃었다.
만족한 발렌티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자. 나도 내달 인터내셔널 피아노 사야 되거든.”
“발렌티나, 너 그거 사 모으니?”
“응. 몰랐어?”
“언제부터?”
“2개월 됐나.”
“…….”
아나스타샤는 할 말이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2개월 사 모은 것도 사 모은 것이긴 하지만…… 어이없어하는 아나스타샤 쪽에 공감이 되었다.
그리 오래 걸을 필요는 없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십여분 정도 걸었을까. 이 근처에서 가장 큰 종합 서점인 돔 끄니기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건물 안에 들어서자마자 오른편을 바라보자 그쪽에 무엇이 있는진 뻔히 안다는 듯 발렌티나가 물었다.
“악보 보려고?”
“예. 그것 외에도 이것저것…….”
“난 잠깐 잡지 있는 데 가 있을게! 아나스타샤 넌?”
“나도.”
서점에 오면 두 사람은 악보를 사는 게 아니면 매달 나오는 잡지 코너 쪽에 거의 있곤 했다.
오래된 것을 다루는 건 음악만으로 충분하고 최신 유행을 따르는 건 빠르게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음악 관련 잡지뿐만 아니라 패션 잡지 등도 두 사람의 주 관심사였다.
난 근래 들어선 그런 것에도 관심이 생기긴 했지만, 그보다 공부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악보도 보고, 선생님에게 추천받은 소설도 사야 했다.
이젠 러시아어 공부를 위한 소설 탐독 등을 할 필요는 없었지만 이미 독서가 또 하나의 습관처럼 되어 버린지라 이것저것 많이 보는 편이다.
인문학적 지식을 쌓는 건 내가 올바르게 서고 걷는지 판단하기 위한 좋은 근거가 되기도 하고, 음악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도움이 되어 주기도 했다.
“…….”
일단은 책 고르는 쪽이 더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악보부터 보러 갈까.
그렇게 결정한 나는 악보들이 잔뜩 꽂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온통 북적이는 돔 끄니기에서도 악보들이 있는 곳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음악가들의 수가 적기도 하고, 실제로 피아노로 연주를 해야 비로소 가치가 살아나는 그 특성상 잠깐 뽑아들고 읽는다고 해서 얻어낼 것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민하다가 사는 게 아니라 바로 사서 떠나 버리니까 사람들이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나도 바로 한 권 사서 갈 생각을 하고 있는데, 좁은 통로를 가로막은 한 사람이 있었다.
잠깐 지나가야 하니 비켜 달라고 말하려는 차였다.
“……저기.”
아무 생각 없이 말을 걸던 나는 멈칫했다. 그 옆모습이 너무 낯익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부르자 남자도 이쪽을 본다. 그리고 옆으로 비켜 주거나 미안하다고 하는 대신 대뜸 이런 말을 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
저런 말을 듣고도 화가 안 나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신이겠지. 내가 노려보자 그는 말실수였다는 걸 깨달았는지 당황해했다.
에르네스트…… 오랜만에 보자마자 너무하시는 것 아닌가요?
화가 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해서 물어보았다.
“전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인가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 블라디보스토크에 가 있다고 했었잖아? 그래서…….”
“오늘 돌아왔어요. 그런데 반갑지 않으신가 보네요.”
“아니! 반갑지!”
에르네스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그도 정말로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 정도는 안다.
화를 풀고 고개를 기울이자 그 역시 어색하게 목 근처를 매만지더니 내게 말했다.
“미안, 잠깐 앉아서 이야기할까?”
“그래요.”
난 그의 제안에 따라서 근처에 있는 벤치로 향했다. 앉아서 책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곳이었는데, 앉아서 악보를 보는 사람은 없었으므로 텅 비어 있었다.
조금만 고개를 돌려보면 북적거리는데 여기만 조용하니까 이상했다. 그리고 이 조용한 곳에서 에르네스트와 우연히 마주하니 더더욱.
하지만 조금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이 근처에서 가장 큰 서점인 돔 끄니기의 악보 코너 앞이라면 중앙음악학교의 그 누구를 만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처럼 개인 연습실과 서고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곳에 올 일이 많다. 그게 에르네스트라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건 없었다. 그 역시 연주자이자 작곡가로서 악보를 찾을 일이 많을 테니까.
벤치에 앉은 에르네스트는 처음 말실수하고 당황했던 모습은 지워 버리고 평소와 같은 태도로 태연하게 물었다.
“어제 연주회였지? 시차가…… 잘 모르겠지만 바로 돌아왔나 보네.”
“예.”
“쉬지 그랬어.”
모스크바에 오자마자 바로 돌아다닌다는 게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쉬고 있어요. 오늘도 선생님만 뵙고 돌아가려 했는데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를 만나서.”
“그럼 그 애들은 지금 어디가고?”
“잡지 코너에 있어요.”
“아.”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들고 계단 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왔다는 것을 들은 에르네스트는 이쯤 인사만 하고 가려는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물론 나도 그와 오래 이야기할 상황이 아니란 것 정도는 알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바로 가는 건 조금 아니지 싶다.
“연주회에 대해선 물어보지 않으시네요?”
제일 먼저 궁금해할 건 그거라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묻지 않으니 이상해서 내 쪽에서 물어보았다. 물론 묻고 나서야 이상한 건 내 쪽이라는 걸 깨달았다.
정말 왜 이럴까…… 한숨이 나올 것 같은 기분으로 앉아 있자니 에르네스트는 정말 가볍게 이야기했다.
“잘했겠지. 그건 안 봐도 아는 거니까. 뭐, 나중에 기회가 되면 따로 들어 보고 싶긴 해. 특히 베토벤 같은 건.”
“……그런가요?”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믿고 있고, 또 말이 아니라 직접 듣고 싶다는 반응은 꽤 기분 좋았다.
그런데 이렇게 좋게 끝내도 될 상황에서 내 입은 괜히 쓸데없는 것을 하나 더 물어보고야 말았다.
“쇼팽은 어떤가요?”
“쇼팽? 이번엔 쇼팽 안 하지 않았어?”
“예. 모차르트와 베토벤만.”
“그런데 왜 갑자기 쇼팽이야?”
나도 내가 왜 물어본 건지 잘 모르겠다. 그라면 어쩐지 올바른 대답을 해 줄 것 같아서? 그런 모종의 신뢰감이 있으니까?
하지만 무엇이든 간에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이긴 했다.
물론 이 상황에서도 에르네스트는 정확하게 날 꿰뚫어보았다.
“쇼팽이 싫어서 퀸 엘리자베스에 나가기로 한 것 아니었어?”
굉장히 직접적인 말이었다.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
난 나지막이 되물었다.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넘겨짚은 거라면 미안하고.”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쇼팽이 싫은 건 아니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애초에 난 굉장히 많은 고민을 했다. 내가 퀸 엘리자베스를 택한 건 여러 작곡가들의 곡들을 다채롭게 무대 위에 올릴 수 있는 콩쿠르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회피가 아니라 합리와 도전으로서 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출전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 앞에서 어느 정도는 솔직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숙원처럼 되어 버린 곡들을 콩쿠르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평가받고 싶진 않다는…… 그런 기분은 느끼고 있어요.”
많은 음악을 교류해 온 에르네스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
그래서 말할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냐며 그가 물어보진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에.
잠시 후 그가 짧게 말했다.
“명확하네.”
“아, 죄송해요.”
“아니야. 난 네가 곡에 끌려다니지 않는 게 좋아.”
옅은 미소. 에르네스트 역시 내게 조금 솔직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중립적으로 서서 음악을 지배하고…… 한계 너머까지 길게 늘여서 원하는 사과에 그 갈고리를 걸 수 있게…… 그런 음악을 하는 게 보고 싶어. 늘 그랬던 것처럼.”
생각해 보면 예전부터 그랬다. 구세프 선생님이 음악을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고 야단을 치고, 또 음악을 망가뜨리지 말고 자신을 죽이고 악보대로 연주하라고 할 때도 에르네스트는 늘 내가 하는 연주를 긍정해 주고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 주었다.
게다가 그는 내가 쇼팽의 소나타 1번을 연주하는 것을 보았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도.
때문에 그가 보이는 것이 어떠한 동정이었다면 정말 자존심이 무너지는 일이겠지만, 지금은 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진심으로 내가 만들어가는 음악을 원한다는 걸.
“제가 늘 그랬나요?”
“내가 아는 한.”
“지금까지 못나게만 굴진 않았나 보네요…….”
우스운 모습도 많이 보여 주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다행인 걸까.
그런데 에르네스트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낮게 킥킥거리며 웃더니 말했다.
“나도 도와줄 수 있는 한 도와줄 테니까. 괜찮아. 쇼팽을 혼자서만 치고 싶다면 그렇게 해. 뭐 어때?”
“아핫, 고마워요.”
누가 뭐라 하든 상관없다는 듯, 우린 그렇게 약속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도와준다면 세상에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벤치에서 일어나더니 팔을 툭툭 털곤 물었다.
“그래서, 악보는 뭘 사려고?”
“아. 까사 리코르디casa ricordi에서 나온 베토벤 악보를 찾고 있어요.”
“음? 기초부터 다시 보려고?”
역시 악보 제작사와 작곡가의 이름을 듣자마자 그는 내 의도를 알아차렸다.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 목적이에요.”
“그렇구나. 음…… 저쪽에 있을 거야. 베토벤 섹션 밑에서 두 번째 칸.”
“……직원이세요?”
“여기 직원보다 내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에르네스트는 자신 있게 그런 말을 했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그저 어이없이 들렸을 것 같은데, 그가 하는 말이라 그런가. 정말 사실만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