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9화
난 에르네스트의 도움을 받아 원하던 베토벤 악보를 찾았고 다른 악보들도 추천을 받아 몇 권 구매하기로 했다.
“협주곡 총보는 저쪽에 있어.”
“아, 고마워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총보는…… 헨레 판이 깔끔해서 보기 편하더라고. 일단 눈에 들어오는게 중요하잖아?”
“그렇죠. 저도 헨레 악보를 애용하는 편이에요.”
에르네스트는 자기가 직원보다 더 잘 안다고 말했던 걸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이렇게 의욕을 보여 준다면 또 응해 주는 게 당연한 일이라, 난 그가 짚어 주는 악보들을 하나씩 확인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총보를 하나 들고 넘겨보고 있는데, 옆에서 내 모습을 보던 에르네스트가 물었다.
“음, 그래…… 그런데. 연주회에서 베토벤 했으면 직접 주석 달아 놓은 거 있을 텐데 왜 새로 사는 거야? 잃어버렸어?”
그가 말한 대로 난 이미 연주회를 준비하면서 이미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처음부터 끝까지 공부한 적이 있었다. 악보도 깔끔하게 정리해 놓았다.
보통 그렇게 만들어 놓은 악보는 연구 자료이자 추억거리이기도 해서 쭉 가지고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에르네스트가 보기엔 이해가 잘 안 될 것이다.
거기에 모차르트까지 다 세연에게 줘 버렸는데, 왜 줬는지 제대로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제대로 설명하기도 어려웠고.
때문에 난 그냥 별것 아닌 것처럼 넘기려 했다.
“아뇨, 드리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드렸어요.”
“……사본을 준 게 아니라 그냥 줬다고?”
“예.”
“그래?”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그를 전혀 납득시키지 못했음을 느꼈다.
그냥 일반 교과를 공부해 놓은 노트를 넘기는 것과 연구를 마친 악보를 넘기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상황을 바꿔서 에르네스트가 누군가에게 악보를 넘겼다고 한다면 나도 깜짝 놀랐을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그 놀라움을 조금 더 분명하게 표현했다.
“누군진 몰라도 받았을 사람이 부럽네.”
“그런가요?”
“당연하지. 악보뿐만이 아니라…… 네가 연구를 넘겨줬다는 건 그걸 이해할 수 있을 거란 믿음까지 보여 준 것이기도 하니까.”
깊게 묻지 않고도 에르네스트는 간단히 무슨 일이 있었을지 금방 추리해 냈다. 그리고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리했을지에 대해서도 순식간에 알아차려 버렸다.
사실 악보를 넘겨주었을 때, 세연은 난색을 표했다. 자신은 총보를 읽을 줄 모른다고 했었지. 하지만 그럼에도 난 그녀에게 무조건적으로 악보를 넘겨주었다. 그녀라면 리허설을 몇 번 보는 것만으로도 악보를 이해할 수 있게 될 테고, 분명 견학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그건 분명 믿음이었다. 하지만 약간은 부담이자 책임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세연이 나중에 내게 쇼팽까지 요구했던 걸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서 며칠 전을 떠올리고 있자, 에르네스트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이 네가 무엇을 준 것인지, 그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네.”
분명 내가 중요한 걸 넘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가치를 이해까지 해야 한다는 말을 가까이에서 들으니까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그런 말 마세요…….”
“뭐가? 네가 연구한 악보라면 원하는 사람이 줄을 설 건데.”
“아, 정말…….”
“아마 특별 에디션으로 따로 출판을 해도 될…….”
“그쯤 해 주세요!”
그제야 난 에르네스트가 날 놀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장난스레 웃으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모스크바로 돌아오니 왜 다들 날 놀려먹지 못해 안달인 건지 모르겠다.
특별 에디션? 상상만 해도 까무러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난 급하게 이야기 방향을 틀었다.
“그, 그나저나…… 에르네스트는 어쩐 일로 오신 건데요?”
“나도 악보 찾아 온 거지. 요즘은 무조 음악 공부도 조금 하고 있어서. 현대 쪽으로 보는 중이야.”
“무조 음악이요……?”
뭔가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 나와서 의아했다.
그는 쇼팽 콩쿠르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두 곳에 모두 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무조 음악이라면 퀸 엘리자베스에밖에 올리지 못할뿐더러, 올린다 하더라도 정말 불리해진다.
기본적으로 콩쿠르란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는 자리이다. 그렇다면 쉽게 비교하여 빠르게 우위를 드러낼 수 있는 음악들이 우선시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근현대의 무조 음악들은 그 음악성이나 클래식 이후의 음악계에 끼친 영향 등을 생각하면 높게 평가할 수 있겠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사람과 경쟁했을 때 어떻게 평가하고 점수를 주어야 할지에 대해선 애매모호해진다. 너무 동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진지하게 선곡에 대해서 조언을 하면 어떨까 싶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에르네스트는 콩쿠르 선곡에 대해선 나보다 훨씬 더 노련한 사람이었다. 작년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날 코칭해 주기까지 할 정도로.
그가 갑자기 묘한 도전정신으로 콩쿠르에 두 개나 참가할 심산도 아닐 테고, 그럼 남아 있는 합리적인 추론은 하나뿐이었다.
“작곡 공부네요?”
“그렇지.”
“피아노 연습은 하고 계신 것 맞죠?”
“어…… 내년 아닌가?”
“DVD심사는 3개월 남았어요!”
“많이 남았네.”
하나도 안 급한 듯 태연하게 말하는 그를 보니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난 옆머리를 짚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고 있는 것 맞죠?
4, 5년에 한 번씩 열리는 대형 국제 콩쿠르 두 개에 동시 참가하려고 하는 것까진 좋았다. 과거에도 그런 연주자들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 결과까지 따라 주었던 사람은 없었다. 입상까지야 어찌 가능할지 몰라도 양쪽에서 우승까지 다 거둔 경우는 한 번도 없는 것이다.
그런 과거를 안다면 더더욱 열심히 콩쿠르에 집중해서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난 에르네스트가 만약 하나에만 나간다면 충분히 우승후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집중력을 분산시켜서 결국 이도저도 안된다면, 그만큼 아깝고 또 오만한 일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 와서 그가 단순히 치기 어린 생각과 오만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때문에 아무 말 않고 가만 보고만 있었는데, 결국 걱정이 앞선 난 한마디 하고 말았다.
“전 믿고 있지만…… 두 콩쿠르에 나가시려면 준비를 많이 하셔야 해요. 에르네스트.”
“이것도 그 일환이야. 나도 내가 준비해야 할 게 많다는 건 알고 있어.”
“…….”
작곡 공부는 무슨 일환인지 묻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내가 협주곡을 연구할 때 피아노 파트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오케스트라의 흐름도 모두 보는 것처럼, 이 역시 에르네스트 나름의 방법이겠지. 그렇다면 내가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되레 그에게 짜증스러운 일밖에 되지 않는다.
일단 내 말을 진지하게 듣고도 스스로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나도 믿고 기다리기로 했다.
“알겠어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
“걱정하지 않아요.”
“연습실로 끌고 갈 것 같진 않아서 다행이네.”
“……무슨 말이에요?”
“아무것도 아냐.”
또 장난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으로 바라보니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저으며 내 눈을 슥 피했다. 아무튼 중요한 건 결국 결과로 나와 보면 알 일이다.
내 악보는 다 골랐고, 다음은 다시 에르네스트가 고를 차례였다.
무조 음악이라면 뭐가 있을까? 아르놀트 쇤베르크나 후기의 스크리아빈 등의 작곡가 등이 생각난다. 에르네스트는 어떤 작곡가를 주의 깊게 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렇게 그 부근 섹션을 서성이던 나는 서점에서 하는 행사로 무언가 펼쳐 놓은 것을 발견했다.
“이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나무 조각들이었다. 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조각들엔 검은 잉크로 문양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것들은 전부 새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난 원래 좀처럼 이런 것에 탐을 내지 않는 편인데, 이 새의 목각은 가지고 싶었다. 특이한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흥미가 생긴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행사 내용을 보니 현대음악 특별행사라 한다. 악보를 사면 되는 건가? 상세한 내용을 자세히 읽어 보려는 찰나였다.
에르네스트가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행사 하는 거야?”
“예. 악보를 사면 저 새를 주는 것 같네요. 음…… 무슨 새인진 잘 모르겠지만 귀엽지 않나요?”
왜 가지고 싶은 건지 말하기가 복잡해서 그렇게 이야기했다. 귀여운 건 사실이기도 했고.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상식 등에 대해서도 굉장히 밝은 사람이었다.
“시엘루린투sielulintu라고 해.”
“예?”
“저 새 말야.”
검은 문양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새 모양의 목각에 이름이 있을 줄은 몰랐다.
어디선가 유행하는 캐릭터 상품인가? 하지만 그런 것이라면 조금 더 부르기 편한 이름이 붙어 있을 것 같았다. 시엘루린투라는 이름은 너무 길고 복잡하다.
혹시나 싶어 물어보았다.
“현실에 있는 새인가요?”
“아니, 전혀. 핀란드 신화에 나오는 새일걸.”
핀란드 신화? 점점 더 예상치 못한 답변들이 흘러나와서 더 물어봐야 내 무지만 탄로 나는 기분이었다.
바보가 된 기분으로 바라보자 에르네스트는 크게 신경 쓰진 말라는 투로 웃으며 자신이 아는 것들을 말해 주었다.
“사람의 영혼을 옮기는 영혼새라고 하지. 핀란드 사람들은 저 나무 조각을 침대 옆에 두고 자기도 해. 영혼이 길을 잃는 것을 막아 준다나.”
토속 신앙으로 쓰는 부적 개념인 것 같았다. 핀란드 사람들은 그것을 새 조각으로 한다니, 조금 특이했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렵진 않았다. 나 역시 이 조각과 비슷한 검은 새를 하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딱히 그녀가 시엘루린투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건 아니다. 단지 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을 뿐. 그러나 우연의 일치라 할지라도 신비하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묘한 친숙함을 느끼며 조각들을 주경하던 난 문득 의문이 생겼다. 현대음악 특별행사인데 이런 걸 왜 주는 걸까?
“이걸 왜 주는 걸까요?”
“음…… 동명의 곡이 있는 걸로 아는데. 올리 머스토넨olli mustonen이던가…….”
에르네스트는 바로 한 이름을 말하더니 휙 돌아서선 악보를 찾기 시작했다.
올리 머스토넨이라면 나도 몇 번 들어 본 적 있었다. 피아노 연주자면서 동시에 작곡가이기도 한 음악가였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그는 악보를 하나 찾아 가지고 와서 보여 주었다.
“여기 있네. 봐, 곡 이름이 시엘루린투잖아.”
“아, 정말이네요.”
“한 번 볼래?”
“……예.”
얇은 악보였다. 난 궁금증을 느끼며 첫 페이지를 넘겼다.
처음 든 감상은 한 번에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협주곡 총보도 한눈에 읽어내는 내 독보 능력은 이 악보 역시 순식간에 읽어냈지만 머릿속에 선율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기존 화성학의 틀에 기준을 둔 음악이 아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도 악보 자체는 굉장히 쉬운 편이어서 천천히 읽어 나갔다. 머릿속으로 음들을 이어 나가 선율을 이루자 한 음악이 만들어진다. 거기에 조금 더 분명한 색을 입히기 위해 악보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악장을 어떻게 연주하란 건지 잘 모르겠다.
“이건…… 악장 지시를 어떻게 읽는 거죠? 포코poco는 약간이라는 의미이지만…… 처음 보는 지시예요.”
“포코 인퀴에토poco inquieto. 인퀴에토는 이탈리아어로 불안하다는 뜻이야. 특이한 지시를 하네.”
이탈리아어에도 능숙한 에르네스트는 바로 그 지시를 읽어서 알려 주었다. 난 악보를 넘겨 보면서 그것 외에도 궁금한 것들을 그에게 물어보았다.
“이것은요?”
“다정하게, 그리고 물결처럼.”
정규화 된 지시는 아니었지만 알아듣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언어는 음악에 그만한 자유를 부여해 주기도 한다.
10페이지 남짓의 악보를 전부 보는 데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끝까지 읽어 본 나는 선율들을 정리하며 한 악상을 떠올리고, 이 곡의 제목인 시엘루린투를 현실에 구현해 낼 수 있을지 가늠해 보았다.
“알 것 같아?”
“……연주해 보고 싶어졌어요.”
이 곡을 연습한다고 해서 콩쿠르 무대에 올릴 수 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한 번쯤 연주해 봐도 좋을 것 같았다.
내가 악보를 도로 꽂아 넣지 않고 그대로 베토벤 악보들과 함께 사 가려고 하기 직전, 에르네스트가 내게서 그것을 슥 빼내어 갔다. 갑자기 악보를 빼앗긴 난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는 악보를 팔랑팔랑 흔들더니 말했다.
“그럼 이건 내가 사 줄게.”
“예? 그냥 제가 사도 괜찮은…….”
“그게 아니라. 저 새가 가지고 싶은 거잖아? 아니야?”
그는 목각 새 시엘루린투를 가리키고 있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곡도 연주해 보고 싶긴 하지만 내 책상 위에 있는 검은 새의 그림 옆에 저 시엘루린투도 가져다두고 싶었다.
“그렇긴 해요.”
“저 행사 자세히 읽어 보니까 일정 금액 이상 악보를 사야 주는 거더라고.”
“저도 악보 많이 샀어요.”
“고전 말고, 이쪽 현대음악 섹션에서만.”
“아.”
그제야 난 바보같이 행사 내용도 제대로 안 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에르네스트는 이미 무조 음악을 연구하느라 현대음악 섹션에서 악보를 몇 권 사려는 상황이니 그가 올리 머스토넨의 악보까지 같이 구매해서 행사 상품을 받아 주려는 것 같았다.
그냥 내가 잔뜩 구매하는 방법도 있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 행사 상품에 눈이 멀어 악보들을 구매하는 건 쉽게 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면…… 이번만요.”
“그래. 블라디보스토크 연주회 기념 선물이라 생각해.”
“선물……? 아!”
“?”
그리 비싼 악보는 아닐 테니 이번에 빚진 것으로 해 둘까 생각하려던 난 그제야 내 가방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생각해 냈다.
급히 쇼핑백과 가방을 내려놓고 뒤적였다. 무겁게 들고 다녔으면서 왜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여기요, 에르네스트.”
“뭐야 이게?”
“선물이에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 왔어요.”
에르네스트는 생각도 못했다는 듯 얼떨떨한 표정으로 내가 건넨 선물을 받아 들더니 말이 없었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놀랐던 것처럼 갑자기 가방에서 선물이 튀어나와서 당황해하는 건가 싶었는데, 가만히 보니 에르네스트는 어딘가 아쉬워하고 있었다.
부담스러워하지 않았으면 해서 고른 초콜릿인데, 마음에 안 드는 걸까?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안색을 살폈고 잠시 후에야 내 시선을 눈치챈 에르네스트는 잘 먹겠다면서 초콜릿을 챙겨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