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20화 (720/1,277)

##  720화

에르네스트와 선물을 교환한 나는 그를 데리고 계단을 올라 잡지 코너 쪽으로 향했다.

그가 그냥 악보만 사러 온 거라면서 휙 가 버리면 어쩌나 싶었는데, 예상과 달리 그는 군말 없이 내 뒤를 따라왔다. 그도 방학동안 친구들도 못 보고 음악만 붙잡고 있었던 것이 꽤 힘들었던 모양이다.

“이거 저번 달 호는 어디서 찾아요?”

“이 특집 봤어? 완전히 나를 위한 특집이던데.”

방금까지 있었던 악보 코너와 달리 잡지 코너엔 사람들이 많았다. 각자의 흥미에 따라 무리를 이룬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다. 나와 에르네스트는 그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한쪽 구석 그나마 조금 한산한 곳엔 내 친구 두 명이 머리를 맞대고 잡지를 보고 있었다. 이쪽까지 잘 들리진 않지만 빠르게 말들을 주고받으며 페이지를 넘기는 걸 보니 뭔가 바쁜 것 같았다.

살그머니 가서 말을 걸었다.

“방해하지 말까요?”

“어? 아, 타티아나?”

집중하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잡지를 발렌티나에게 주고는 내 쪽을 돌아보았다.

“사고 싶은 건 샀…….”

그렇게 막 물어보던 아나스타샤는 내 뒤편에 있는 에르네스트를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뻗어 그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걸 산 거야?”

에르네스트의 머릿속엔 분명 작곡 중인 곡들도 잔뜩 있을 테니 어떻게 보면 이 서점에서 살 수 있는 가장 최신 악보집일지도 모르겠다.

당혹스런 농담에 멍하니 황당한 생각을 하고 있자니 에르네스트가 인상을 썼다.

“……아나스타샤. 사람을 보자마자 이거라니?”

“아핫, 미안.”

아나스타샤는 싱긋 웃더니 손을 흔들거렸다. 잠깐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옆에 있던 발렌티나도 잡지를 탁 덮어 버리곤 우리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에르네스트? 뭐야? 뭐야, 어디서 만난 건데?”

“악보 보고 있는데 타티아나가 오더라고.”

“거기라면 그럴 수도 있겠네!”

무슨 나나 에르네스트는 서점에 오면 악보만 보는 사람들인 것처럼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 오해를 어떻게 고쳐 줘야 할까 싶었지만, 사실 그리 틀린 말도 아니라 할 말이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낮게 웃더니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열심히네 요즘?”

“평범하게 하는 건데.”

“그러니?”

콩쿠르 두 개를 준비하려면 얼마나 열심히 해야 할지 가늠도 안 될 지경인데 에르네스트는 태연한 태도였다. 그런데도 내가 아까 한마디 했던 것과 달리 아나스타샤는 별말 않고 그냥 넘어갔다. 그라면 알아서 해내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발렌티나가 들고 있는 잡지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너희는 뭐 보는 중이야?”

발렌티나는 잡지를 쭉 펼치더니 방금 보고 있던 페이지까지 휙휙 넘기며 말했다.

“클래식 음악 잡지들 전부 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특집들이 많더라고. 자, 봐 봐. 여기 예카테리나. 그리고 너도 있다, 타티아나?”

“예? 저도요?”

“응. 여기.”

음악 잡지 등에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를 다룰 것이란 건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콩쿠르가 끝난 지 이제 한 달 정도 되었으니까. 본격적인 우승자 인터뷰나 리뷰 등이 따끈따끈하게 올라올 때였다.

그러니 예카테리나의 얼굴이 여기저기에 다 올라와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도 있다길래 놀라서 발렌티나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리고 난 한참이나 눈을 가늘게 뜨며 그 사진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발렌티나를 바라보았다.

“이게 나온 건가요?”

“맞잖아?”

“…….”

말이야 맞지만…… 나는 예카테리나를 중심으로 찍은 사진 한 구석에 아주 작게 찍혀 있었다. 잘 보지 않으면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걸 찾고 있었나 싶다.

이번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주인공들로만 지면을 장식하기에도 부족하다. 우리가 오를 자리가 없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 중에서도 특별히 세간의 주목을 받는 사람이 한 사람 있긴 했다.

“에르네스트 너는 내년 콩쿠르에 대한 특집에 실려 있었어.”

“……? 인터뷰 같은 거 한 적 없는데.”

“그래? 그런데 어떻게 사진하고 네 정보 같은 게 다 올라와 있지.”

“아, 에이전시에서 마음대로 했나 보네.”

에르네스트는 별 관심 없다는 듯 그렇게 대꾸했다.

내년은 피아노 연주자들에게 있어서 꽤 중요한 해였다. 때문에 당연히 러시아의 매거진들이 내년 17세로 참가자격이 되는 에르네스트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미 공로 예술가로 인정받으며 수많은 콩쿠르와 연주회를 휩쓸고 다닌 에르네스트는 누가 보더라도 이미 프로 연주자라 해도 될 정도의 기량을 지니고 있었다. 요 몇 년간 활동이 살짝 뜸해지긴 했지만, 내년의 기회를 그냥 보낼 것이라 예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잡지에도 올라와 있는 듯했다. 아나스타샤가 손가락으로 잡지의 한 부분을 죽 짚어 보더니 말했다.

“여기 나온 걸로는 쇼팽 콩쿠르에 참가할 것 같다고 해 놨던데?”

“무슨 소리야 그건? 참가 일정에 대해선 너희 말고는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

“여기 봐 봐.”

우리 네 명은 주르륵 어깨를 붙이고 서서는 잡지를 바라보았다. 거기엔 아나스타샤가 말한 것 그대로 적혀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쇼팽 콩쿠르에 출전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이런저런 이유들을 달아 놓았는데, 그중엔 그가 쇼팽 스페셜리스트로서의 경력을 시작하려면 당연히 쇼팽 콩쿠르로 시작해야 한다는, 기자의 바람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이유도 있었다.

에르네스트를 고평가해 준 것 같긴 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황당해할 만도 했다.

“기사를 마음대로 써 놨네. 뭐냐 이거?”

“내가 알겠니? 항의전화 할래?”

“됐어…… 어차피 상관없으니까.”

직접 말하지도 않은 이야기가 올라와 있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차피 전부 나가기로 했으니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것 같았다. 그의 그런 자존감 높은 태도는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아무튼,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도 끝났으니 이제 다음 이벤트에도 관심이 조금씩 쏠리는 모양이었다. 난 혹시나 싶어 아나스타샤에게 물어보았다.

“저희 이름은 없나요?”

“응…… 없었어. 치사하지 않니? 에르네스트 혼자만 기대받고.”

“그러네요.”

“뭐 그런 것까지 다 치사해??”

나와 아나스타샤가 속닥거리자 그새 그걸 들은 에르네스트가 어이없는 소리 말라는 듯 끼어들었다. 하지만 우린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아나스타샤는 대놓고 킥킥 웃었다.

“우리가 나가서 혼쭐을 내 주자고. 난 쇼팽에서, 넌 퀸 엘리자베스에서.”

“후후, 좋아요.”

“그리고 그런 아나스타샤를 내가 이기면 완벽하겠네!”

발렌티나도 빠질세라 끼어들어 그렇게 말했다. 서로 혼쭐을 내니 이기니 하는 말들이 오갔지만 우리 목소리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서로의 정당한 실력으로 큰 무대에서 맞부딪혀 보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우린 친구로서의 깊은 관계와 라이벌로서의 호승심을 양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에르네스트는 약간 자연스럽게 고립되고 있었다. 그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한숨 쉬듯 말했다.

“그래…… 셋이서 날 죽여라 죽여.”

“얌전히 당해 주지도 않을 거면서 뭘 그러니?”

아나스타샤가 장난스레 말하는 것처럼, 그는 언제나 만만찮은 연주자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고 기대하는 것도 바로 그가 국제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얻는 것이겠지.

그건 내가 바라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기대를 쉽게 이루게 해 줄 생각은 없었다. 우리가 이렇게 라이벌로 존재하는 한.

***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연주회를 하고 돌아온 지 일주일 정도 흘렀다.

그동안 난 컨디션을 전부 회복했고, 혼자 할 수 있는 연습들을 하면서 스스로를 다시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여름방학 동안 연주자로서 분명히 한 단계 더 나아갔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던 여름이, 이젠 끝나간다.

“……음.”

창문을 살짝 열어 보면 벌써부터 피부로 확실히 바람이 차가워져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물론 여름에도 특별히 추운 날은 있기 마련이므로, 속지 않기 위해선 하늘을 확인할 필요도 있었다.

창밖 하늘에 보이는 별들을 세어 보았다. 우주를 배경으로 그려진 그림은 서서히 바뀌어 가을의 그림이 수놓아져 있었다. 조금 집중하면 찾을 수 있는 페가수스자리와 백조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멍하니 보고 있자니 시간의 흐름마저 잊어버릴 것 같았지만, 이 밤하늘은 그 무엇보다 확실하게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

창문을 닫고 책상에 앉은 난 이번엔 인간의 시간을 보았다.

달력에 동그라미 친 날짜가 내일임을 다시 확인했다. 방학이 시작했을 때 체크해두었던 개학일이었다.

방학 중에도 학교엔 종종 가곤 했지만, 새 학기의 시작이란 울림은 내게 굉장히 특별하게 느껴졌다.

8학년으로 편입하여 중앙음악학교 생활을 시작한 내가 10학년을 맞이하게 되는 날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에서 보면 그런 숫자의 나눔이 무엇 중요하겠냐마는, 나에겐 무사히 차근차근 계단을 오르고 있다는 확인 또한 필요했다.

피아노를 다루는 실력 역시 확연히 좋아지고 있으니 지금은 바라는 대로 잘 해내고 있는 중이었다.

“바라는 것…….”

물론 그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당장 생각나는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만 하더라도 방학 내내 피아노에 집중하며 실력을 키워 나갔고, 에르네스트는 내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폭넓은 공부를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제 입국해서 지금은 기숙사에 있을 리처드나 한승우도 얼마나 실력을 키워 왔을지 궁금했다.

당장 가까운 친구들만 꼽더라도 이 정도인데, 우리 피아노학과 10학년만 13명이었다. 방학에 잠깐 안 보는 것만으로도 키가 훌쩍 커 버리는 것처럼 실력 역시 그렇게 자라나곤 한다는 걸 나는 잘 안다.

다른 친구들도 방학을 어떻게 보냈을지, 내일이면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란 생각만으로도 기대되었다.

“……”

책상에 반쯤 엎드려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던 나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아나스타샤, 발렌티나와 찍었던 사진이 액자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검은 새의 그림과 목각도.

영혼의 새라는 뜻의 이름인 시엘루린투. 난 올리 머스토넨의 곡 역시 요 며칠간 연습해 보았다. 신화적 이야기를 담은 음악인 만큼 신비롭고 환상적인 음형이 인상적이었다.

그가 영혼의 새를 직접 보고 이 곡을 쓴 걸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그 곡을 연주하는 나는 영혼의 새를 직접 본 적이 있다.

아마 지금도 어디선가 보고 있을 그녀가, 적어도 후회하진 않을 시간을 보내야겠지.

난 슥 손을 뻗어 새의 형상을 한 목각을 톡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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