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1화
올해 열네 살. 샬롯 린스키는 떨어지는 낙엽과 학교 건물을 보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가 이 학교의 학생이 되다니!’
뉴질랜드 출신의 유학생인 그녀는 이번 9월로 모스크바 음악원 부속 중앙음악학교의 피아노학과 8학년에 편입하게 되었다.
엄청나게 까다로웠던 시험과 면접 등을 통과하고, 이미 예비학교와 기숙사에 있으면서 많이 왔다 갔다 하긴 했지만, 이렇게 정말 학생으로서 중앙음악학교에 첫 발을 내디디려니 감개가 무량했다.
샬롯은 옆에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 유리에다가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면서 새로 산 교복에 흠이 있는지, 아침에 열심히 드라이한 머리는 이상하지 않은지 다시 확인했다.
그렇지 않아도 유학생인데 첫날부터 이상한 애로 낙인찍히고 싶지 않았다.
샬롯은 유학을 결정하고 2년 정도 러시아어도 정말 죽을힘을 다해 공부했고, 실력으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피아노 실력도 엄청나게 노력해서 끌어 올렸다.
물론 여기 모여 있는 아이들은 진짜 천재들일 테니까 이 정도 해야 그나마 따라갈 수 있는 정도겠지만, 적어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세계에선 최고 수준의 환경이라는 건 확실했다.
‘열심히 해야지.’
다시 한번 각오를 다잡으며, 샬롯은 막 학교 입구로 들어서는 아이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교내로 들어서고 나자 점점 정신이 없어졌다.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그래도 샬롯은 정신을 집중해서 개학식이라고 적힌 안내들을 따라 움직였다. 중간에 개학식은 이쪽이라며 손짓해 주는 어른들도 있어서 그나마 쉽게 도착할 수 있었다.
중앙음악학교의 전교생은 약 400명. 그중의 한 사람으로 오늘부터 샬롯도 함께 한다.
샬롯은 첫날만큼은 완벽하게 보내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아 앞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주변도 다른 사람들로 웅성거리다가 모두 꽉 찼고, 강당의 단상 위엔 교장 선생님이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낙엽이 흩날리는 가을, 여러분과 다시 이 자리에서 □□ 되어 감격스럽습니다. 첫 발을 내디딘 젊은 음악가들 역시……”
열심히 러시아어 공부를 한 덕분에 샬롯은 연설의 거의 대부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이해할 수 있었을 뿐이지 그리 유익하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음악학교이니만큼 더 딱딱하고 클래식컬한 걸까? 으레 학교 행사라는 게 그렇겠거니 생각하며 샬롯은 그냥 러시아어 해석 연습을 하는 기분으로 연설을 들었다.
교장 선생님 다음으로도 다른 선생님 몇 분이 나와서 연설했다.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새 학기를 맞은 학생들의 열정을 고취시키는 내용이었다.
시험공부로 익숙해진 샬롯은 그렇게 빠르게 맥락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분명히 알아들었고, 그녀는 열정하나만큼은 그 기대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도록 가지고 있었다. 이젠 정말 그 무엇도 그녀의 장애물이 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개학식이 종료되고, 샬롯은 사람들을 따라 움직였다. 이제 바로 반으로 가야 하는 건가? 그런데 난 어느 반으로 가야 하는지 아직 모르는데.
누군가에게 물어보면 되겠지만 일단 샬롯은 휴게실처럼 보이는 곳에 가서 한숨 돌리기로 결정하고는 그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휴게실엔 이미 미리 와 있는 사람이 있었다.
“…….”
가을 햇살이 비치는 휴게실에서 마치 그림처럼 생긴 그녀는 허리를 숙이곤 자판기에서 캔 음료를 꺼내고 있었다.
너무 일상적이고 평범한 광경인데도 어째서인지 샬롯은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잠깐만…… 저 사람.’
어딘가 낯이 익었다. 길게 흐드러지는 백금발에 반듯한 외모. 약간 세상사에 관심 없어 보이는 것 같은 그 눈빛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렇다고 축 늘어져 있는 건 아니었다. 그 외모만큼이나 반듯한 어깨와 태도가 빛을 발한다.
샬롯은 이 사람을 어디서 봤는지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입을 가렸다.
‘설마, 설마?’
계속 보고 있다간 관심을 끌까 싶어서 괜히 휙 돌아선 그녀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걸 만지고 있으면 이쪽에 신경 쓰지 않으리란 생각도 있었지만, 바로 찾아보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샬롯은 곧장 스마트폰에다가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이름을 검색했다.
얼마 전 연주회 영상을 보고 한눈에 빠져 버린 피아니스트였다. 심지어 그땐 중앙음악학교 편입을 준비하고 있을 때여서,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는 중앙음악학교 학생이 저 정도 연주를 할 수 있다는 것에 큰 감동을 느꼈다.
그래서 혹시 제대로 편입할 수만 있다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그녀의 사진을 검색해 보고, 멀찌감치에서 동일 인물이라는 걸 확인한 샬롯은 소리를 지를 뻔하다가 간신히 참았다.
‘오, 세상에…… 진짜 실존하는 사람이었어.’
워낙 인간 같지 않은 퍼포먼스를 보여 주어서 그런지 아직도 실감이 잘 안 날 정도였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분명히 실재했고, 방금 전 캔 음료를 뽑아선 지금은 휴게실 벤치에 앉아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내버려 두면 어쩐지 그대로 햇살에 녹아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말 걸어도 되나? 안 되는 거 아닌가……?’
샬롯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스마트폰을 든 채 발을 동동거렸다.
마음 같아선 바로 말을 걸고 싶다. 하지만 타티아나를 단순히 같은 학교 선배로 생각하고 가까워지기엔, 놓아져 있는 장벽이 너무나 많았다.
우선 이제 막 편입해 온 샬롯이 타티아나에게 먼저 다가가도 되는지부터가 의문이었다. 물론 그래선 안 된다는 법은 없었지만, 이 먼 러시아 모스크바의 학교에서 첫날부터 괜히 찍히기라도 하면 앞으로가 고달파질 게 분명했다.
유학생인 샬롯으로선 그런 것도 분명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타티아나는 그냥 학생이라기엔 그 배경이 일반적이지 않았다. 타티아나가 러시아에서도 손꼽히는 가문 중 하나의 딸이라는 정보는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실력이 뛰어난 연주자의 정보라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타티아나는 정말 최고의 이야깃거리였다.
러시아 최고의 피아니스트들이 달라붙어서 레슨을 해 준다느니, 정말 별의별 이야기가 다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바로 타티아나가 범접하기 힘들 정도로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뉴질랜드에서 온 샬롯은 그 점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가까이에서 보니 조금은 체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섣불리 가까이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어쩌지…….’
한참이나 망설이며 서성이고 있을 때였다.
타티아나 쪽을 힐끔거리던 샬롯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녀를 조금 오래 바라보았고, 그때 마침 멍하니 있던 타티아나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직시했다.
푸른 눈의 초점이 집중된다는 것을 느낀 샬롯이 흠칫하며 굳었다. 자기도 모르게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힉.”
“저기…….”
가만히 있던 타티아나가 먼저 이렇게 말을 걸어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지라 샬롯은 눈만 깜빡였다.
타티아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샬롯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부탁하나 해도 될까요.”
“예? 예……? 예.”
어쩐지 차갑게 냉정한 성격일 것 같단 이미지가 있었는데, 타티아나는 모르는 사람에게도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샬롯은 혼자서 너무 겁을 먹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져서 살짝 긴장을 풀어 놓았다.
하지만 긴장을 풀자마자 타티아나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했다.
“동전 좀 가지고 있는 것 있나요?”
“???”
대낮에 학교에서 이렇게 정중하게 할 말이라기엔 이상했다. 샬롯은 방금 들었던 단어들과 현실을 거짓이라 여기고 싶어졌다. 세수를 좀 하고 올까…… 러시아 말을 잘 못 알아듣겠는데.
하지만 타티아나의 표정은 진지했다.
가진 돈 있냐고 물어본 게 장난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샬롯은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도, 도…… 돈이요?”
“예. 제가 지금 필요해서요.”
“그…… 어…….”
돈이 필요하다면 이렇게 달라고 해도 되는 건가? 초면에?
아무리 봐도 타티아나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엄청 부잣집이라며? 대체 초면에 다른 학생한테 돈을 달라 할 이유가 뭐야?
하지만 샬롯은 사람이라는 게 겉모습만으론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보기에 반듯하고 누군가에게 무언가 뺏을 이유가 전혀 없이 보이지만, 이전 학교에 있을 때도 보기엔 멀쩡한 애들이 얼마나 불량해질 수 있는지 직접 본 적이 있었다.
샬롯을 바라보는 타티아나의 눈빛은 점점 서늘해지고 있었다. 웃지 않으면 냉정해 보이는 인상이다.
아, 여기 뉴질랜드가 아니라 러시아였지? 손에 든 캔을 왜 만지작거리는지 모르겠지만 그마저도 섬뜩했다.
겁을 먹은 샬롯은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여기에서 도망친다고 해서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이미 얼굴까지 다 보여 버렸는데.
순간 수중에 루블화가 얼마나 있나 떠올리던 샬롯은 그런 생각을 한 스스로를 돌아보며 눈물이 나기도 하고, 이런 상황이 밉고 슬펐다.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타티아나는 스륵 일어나더니 다가오며 물었다.
“왜 그러시나요?”
“이…… 이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
타티아나는 깜짝 놀라 당황해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자, 잠시만요. 이봐요?”
“나 진짜 기대 많이 했었는데…… 갑자기 돈 뺏으려고 하고…….”
“예?”
샬롯이 울먹거리며 말하자 타티아나는 다가오던 걸음도 멈추었다. 지금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분명히 깨달은 표정이었다.
더 가까이 가 봐야 겁먹게 할 뿐이라는 걸 알았는지 그녀는 살짝 떨어진 곳에서 말했다.
“전 그런 적 없어요.”
“방금 그러셨잖아요!”
“그저 캔을 딸 만한 동전을 필요로 했을 뿐이에요. 바로 돌려 드리려 했어요.”
“……?”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샬롯이 고개를 들자 타티아나는 힘없는 미소를 흘리며 손에 들린 캔을 들어 보였다.
“음료를 뽑고 나니 동전이 하나도 없어서…… 전 캔은 꼭 동전으로 열거든요. 힘들기도 하고, 손톱이 상할까 우려되기도 해서요.”
“동전이요?”
“예. 그렇게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그제야 살롯은 다시 이전 대화를 돌이켜보았다. 분명 타티아나는 동전이라고 했지 돈이라고 하지 않았다. 갑자기 타티아나가 동전을 달라 할 줄 예상하지 못한 샬롯이 혼자 패닉에 빠져서 한참이나 넘겨짚었던 것이다.
러시아어에 굉장히 익숙해지긴 했지만 이럴 때면 미숙함이 보였다. 샬롯은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죽고 싶어…….”
“오해가 있었나요?”
“묻지 마세요…….”
하지만 이미 타티아나는 상황을 거의 다 파악한 표정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무서워 보이나 난감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황당한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창피함에 무너진 샬롯과 그녀를 다독이는 타티아나가 있는 이 휴게실 문은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열렸다.
“세상에 화장실 줄이 얼마나 길었는…… 어라? 뭐 해? 타티아나?”
“아, 아나스타샤.”
“그 애는 누구니?”
“그게…….”
아직 타티아나는 샬롯의 이름도 모른다. 그녀가 머뭇거리자 옆에 있던 발렌티나가 폴짝 다가오더니 고개를 숙이곤 샬롯을 살폈다. 전교생의 얼굴을 거의 다 아는 그녀는 샬롯이 여기 처음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처음 보는 애인데, 왜 울렸어. 타티아나.”
“제가 안 그랬어요!”
“그럼 혼자 우는 애인 거야?”
“그건 아니고 저와 오해가…….”
“응?”
발렌티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타티아나는 횡설수설하며 이야기하기 시작했지만 샬롯이 보기엔 이미 두 사람이 타티아나를 두고 놀고 있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
그제야 샬롯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타티아나가 상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사람인 것 같단 생각을 하며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