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3화
2년 전 슈만 연구회를 만들어서 지금까지 이끌어오고 있는 데니스를 보내고 나서도 정말 많은 학생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수업 시작 전까지 목적은 샬롯에게 교내 곳곳을 소개해 주는 것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인사하는 게 더 바쁜 것 같았다.
난 전교생 전부를 알지는 못하지만, 먼저 해 오는 인사를 받아 주며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할 이야기들은 충분했다.
접점이 별로 없는 바이올린과 학생이 머뭇거리다가 다가와 말을 걸기도 했다.
“저,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혹시 저 기억하세요? 저번에 막심 선배랑 같이 있다가 인사한 적 있는데.”
솔직히 말해 잘 기억나진 않지만 얼굴이 익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크게 반가워했다.
“오래 전 일인데 기억하시네요. 참, 그렇죠? 그때 그 막심 선배가 지금은 차이코프스키 우승자라니…….”
“음, 어쩐 일이신가요?”
“아…… 다름이 아니라…… 10학년 합주 과제 있으실 텐데, 혹시 한 곡 정도는 저와 하실 생각 없으신가 해서요. 어때요?”
중앙음악학교에서는 기악과 학생들을 테크닉적으로 완성된 솔리스트로서 교육시키는 것을 우선목표로 삼지만 고학년으로 갈수록 합주 역시 커리큘럼에 큰 비중으로 구성하는 편이었다.
때문에 필수적으로 합주 과제들도 많이 주어지곤 했는데, 이때마다 잘 아는 다른 기악과 학생들이 없다면 함께 할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이 또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향상시키는 연습이라고 한다면 그 일환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학생들은 저마다 다른 기악과를 찾아다니기도 했는데, 입학 첫날부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조금 이른 것 아닌가 싶다.
때를 봐서 말 걸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바라보니 그가 급히 덧붙였다.
“학기초라는건 알지만, 과제가 나온 시점엔 이미 늦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선 빠르게 선점하는 것 또한 능력이니까.
하지만 먼저 말을 걸어 주었다고 해서 무조건 들어주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일단 이야기는 들어봐도 괜찮을 것 같아서 물어보았다.
“어째서 저인가요?”
“그, 분명 지금 말하지 않으면 줄을 설 사람이 많을 테니까요?”
내 질문을 잘못 들은건지 그는 갑자기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미 바이올린과에는 소문이 자자해요. 막심 선배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할 수 있었던 건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실제로 작년 자선연주회 즈음부터 선배 연주가 무시무시하게 달라지기도 했었고. 혹시 알고 있었나요?”
작년에도 합주 과제는 있었지만 이렇게 학기초부터 제안을 받은 적은 없었는데, 이제 어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막심 선배는 얼마 전 있었던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바이올린 부문에서 최종 우승자로 단상에 올랐다. 그 사실은 순식간에 바이올린과 학생들에게 퍼졌을 테고, 장차 4년 후를 노리는 학생들은 그다음 우승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넣을 수 있도록 모든 정보들을 모았을 터.
그런 정보 중엔 막심 선배가 쓰는 악기는 물론이고 밟아 온 커리큘럼, 연구한 곡들. 그 외에 연주 전 루틴이나 징크스, 사소한 버릇 등까지. 우승자의 정보라면 그 무엇이든 간에 가치가 있다.
그리고 졸업하기 전 종종 합주했던 한 피아노 연주자에 대한 내용도 있었겠지.
막심 선배는 지정 반주자 외에 다른 사람과 합주할 땐 거의 나와 함께 하곤 했다. 그 광경을 본 사람도 많았고.
선배의 우승에 내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도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만은 않았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내용은 이해했지만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이야기를 긍정해 봐야 누구에게도 도움 되지 않을 테니.
“시기가 우연히 맞았을 뿐인 소문이라 생각해요.”
“흠.”
“아무튼…… 그 소문을 믿고 절 필요로 한다 하신 건가요?”
왜 묻는 말엔 대답하지 않고 소문 이야기를 하나 싶어서 그렇게 물어보았더니, 그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뇨!! 당연히 소문은 소문이고, 실력에 반했죠.”
“그래요?”
“그, 실, 아니, 합주 해 보면 알 거에요! 제가 무슨 소리 하는지!”
막무가내네 이 사람.
하지만 긴 말 필요 없이 연주로 보여 주겠다고 하는 태도는 마음에 들었다.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도 않고.
어차피 막심 선배도 졸업해 버린 터라 난 바이올린과에 아는 사람이라곤 아나톨리밖에 없었고, 그 아이와 합주 과제를 하기엔 학년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괜찮겠지 싶어서 난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 둘게요.”
“후…….”
“그런데 성함이?”
“……나 이름도 안 말하고 이러고 있었나?”
합주자를 구했다는 생각에 기뻐하던 그는 갑자기 맥이 풀린 듯 힘없이 중얼거리더니 자신의 이름을 말해 주곤 돌아갔다.
“미안해요 샬롯, 갈까요?”
샬롯을 옆에 세워 놓고 너무 오래 길게 이야기한 것 같아서 그녀에게 사과하고는 다시 안내를 시작했다.
계단을 내려가서 교무실과 악기보관실을 보여 주고, 대형 강의실로 안내했다. 사실 학교에선 좁은 피아노 연습실에 틀어박혀 있는 일이 거의 전부인 우리에게 자주 볼 일 없는 곳이긴 했지만, 그래도 알아두는 것이 좋을 테니까.
그리고 한 층 더 내려가선 성악과 학생들과 만날 수 있었다.
“타티아나, 방학 잘 보냈어요? 오랜만이에요.”
“안녕하세요. 아이베타.”
난 공식적으로 복수전공을 하는 중은 아니었지만, 성악과의 폴리나 선생님에게 비공식적인 제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때문에 종종 이곳에 내려와서 레슨을 받기도 하고 새 과제를 받아 가면서 학생들과 만나고 인사를 할 일도 있었다.
사실 피아노과 학생이 괜히 기웃거리는 건 정말 성악에 목숨을 거는 이 아이들에겐 조금 안 좋게 보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때문에 난 어느 정도 비난도 예상하고 있었는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 중 가장 큰 건 바로 첫날부터 류보비와 만났기 때문이었다.
류보비는 꽤 적극적으로 날 다른 사람들과 연결해 주려 했고, 성악과에서 사랑받는 류보비의 소개는 그 무엇보다 강력했다. 내가 몇몇 성악과 학생들과 친하게 된 것은 전부 그 덕분이었다.
이야기를 잠시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방학 동안 한 음악 연습 이야기가 흘러갔다.
“협주곡 연습은 잘 되어 가요?”
“예. 약한 부분부터 만들어 나가고 있는 중이에요.”
“여전히 오케스트라 부분을 허밍하면서 연습하나요?”
“가끔 바꿔 보기도 해요.”
“바꾸다뇨?”
“피아노 선율을 불러 보기도 하죠.”
가끔은 그게 도움이 될 때도 있어서 여러 방면으로 시도해 보는 중이다.
살짝 놀란 눈을 했던 아이베타는 곧 웃으며 말했다.
“타티아나는 피아노가 아니라 그냥 음악을 잘 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런 칭찬까지 받을 줄은 몰라서 당황해 있자 아이베타는 손을 흔들며 자신의 반으로 향했다.
“나중에 연습 같이 해요. 타티아나.”
“아, 그래요.”
짧은 이야기만 이어졌지만 벌써부터 몇 개나 약속이 생기고 있었다. 난 그런 함께 하는 연습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모두 기억해 두었다.
“……여기까지죠?”
“다 돌아본 것 같네요.”
그렇게 학교를 쭉 돌아보는 데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적당히 반으로 돌아가면 수업종이 곧 울릴 시간이었다.
만약 내가 도중에 이야기를 나누지만 않았다면 더 빨리 안내해 줄 수 있었을 텐데. 괜히 시간만 더 들인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샬롯에겐 내가 다른 학생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꽤 인상 깊은 일이었던 것 같았다.
바로 각자의 반으로 헤어지지 않고 잠시 벤치에 앉아 쉬는 사이, 살짝 주저하던 그녀는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역시 예상대로인가 싶지만…… 인기 많으시네요?”
“예?”
그런 말은 내가 아니라 발렌티나나 에르네스트에게 어울리는 말이었다. 난 사교적인 성격이 되지 못해서 교우관계가 무척 좁은 편이다.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어요.”
“그치만, 지금 잠깐 다닌 것만으로도 벌써 몇 명이야…… 그렇잖아요?”
난 딱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교내를 돌아다니면서 이미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이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인데, 언제부터였을까. 사람들과 이렇게 편하게 인사를 주고받기도 하고 연습을 같이 할 약속도 할 수 있게 된 것이.
내 생각엔 그리 오래되진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그건 분명 좋게 되어 가는 수순이라 생각한다. 새학기가 되자마자 갑자기 확 바뀌어서 활발한 사람이 될 순 없겠지만,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도 더욱 많아질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샬롯은 목 근처를 쓸면서 말했다.
“저랑 같은 8학년 편입생이라 하셨으니…… 2년…….”
2년이라고 들으니 뭔가 짧게 느껴지지만 내 체감으로는 정말 길기도 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하고 무엇을 겪었는지 이야기하긴 어렵다. 하지만 샬롯은 듣지 않아도 어렴풋이 알 것 같다는 듯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 2년이 어떤 2년이었을지 뭔가 알 것 같아요.”
“…….”
“저도 해낼 수 있을까요?”
어려서부터 1학년으로 입학하여 음악가로서 교육받아 온 대부분의 학생들과 편입생들 사이엔 약간 흐름의 차이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것을 극복해낼 희망을 엇비치던 그녀는 살짝 덧붙였다.
“유학생이긴 하지만요.”
여전히 그녀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무릎 위에 둔 양손은 긴장과 고양감 등으로 꼭 쥐어져 있었다.
난 그 손을 살짝 잡아 주었다. 손등으로도 느껴지는 이 열기는 분명 연주자의 것이었다.
“그런 건 상관없어요. 샬롯.”
방금 교내를 걷던 날 보고 샬롯이 느낀 바가 있듯, 나 역시 샬롯에게서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건 너무나 분명하게 앞으로 그녀에게 다가올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저야말로 샬롯이 얼마나 강한 의지로 8학년에 이 학교에 올 수 있었는지 알 것 같아요. 먼 곳에서의 유학, 이미 유창한 러시아어. 등등 여러 증거들이 제 확신을 뒷받침하고 있죠.”
“……아.”
“그러니 잘 지내실 수 있을 거예요.”
난 큰 믿음을 담아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분명히.”
“…….”
씩씩하게 이곳에 있긴 하지만 입학 첫날이라 불안하고 긴장되는 마음을 느꼈을 샬롯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가 내 믿음보다 훨씬 더 잘 해낼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후후, 이만 들어갈까요? 부디 25루블이 아깝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하나도 안 아까워요!”
약간의 농담을 담아 그렇게 이야기했더니 샬롯은 깜짝 놀라 하며 소리쳤다. 난 쿡쿡 웃으며 그녀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이젠 반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8학년 피아노과 반 근처에서 샬롯은 오늘 고마웠다며 몇 번이나 인사를 하더니 별로 머뭇거리지도 않고 반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기대되는 마음이 더 컸던 모양이다.
내가 아는 한 피아노과 8학년 학생들은 모두 착한 아이들이었으니, 아마 처음 보는 샬롯에게도 잘 해 주리라 생각한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한 번 살짝 들러 확인해 볼까 생각하곤, 나 역시 자리를 떴다.
10학년 반에 다다른 나는 샬롯과 달리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반 문을 열었다.
“아, 타티아나!”
“오랜만이야! 방학 잘 보냈어?”
“뭐 하다 온 거야? 아까 개학식에선 봤었는데 안 오길래.”
이미 와 있던 반 친구들이 손을 흔들며 날 반겨 주었다. 바르바라, 라리사, 안드레이 등 몇몇 친구들과 안부를 주고받으며 인사한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모두 방학 동안 잘 지낸 것 같았다. 물론 대부분 피아노와 시간을 보냈지만, 덕분에 얼마나 연주자로서 더 단단해졌는지 겉보기에도 조금 달라져 있었다.
이 자신감과 에너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다. 9학년 마지막 봤었던 때의 친구들과 지금 10학년의 친구들은 다들 몇 계단씩은 올라가 서 있는 연주자들이었다.
한 명 한 명 모두와 반갑게 인사한 뒤 창가 쪽으로 향하자 에르네스트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왔어?”
쥐고 있던 펜을 빙글 돌리고는 툭 내려놓은 그는 갑자기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까 아나스타샤가 그러던데. 신입생이 널 안내원으로 고용했다고.”
그렇게 들으니까 뭔가 재밌게 들리긴 했다. 딱히 아니라 할 이유도 없어서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아요. 이상한가요?”
“아니? 전혀.”
에르네스트는 단호하게 한 마디로 정했다.
“10학년이 할 만한 일이네.”
순수한 감탄이 서려 있는 어투였다.
처음 편입해 와서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2년 만에 다른 누군가를 안내해 줄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갑자기 그런 것이 궁금해지기도 했지만, 직접 물어볼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그는 나지막이 웃더니 짧게 이야기했다.
“이번 학기도 잘 부탁해. 타티아나.”
평소엔 그렇지도 않으면서 은근히 이럴 땐 예의를 차리는 경향이 있었다.
“저야말로요.”
그와 인사를 주고받고 나서야 비로소 10학년 1학기가 시작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