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4화
수업 시간에 가까워지자 밖에 나가 있던 학생들도 하나둘 반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과 섞여 들어온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날 보더니 옆자리에 와선 앉았다.
보기야 아까 봤으니 다시 인사할 건 없었지만, 그래도 교실에서 보니 기분이 새로운 느낌이다.
옆자리에서 가방을 대충 정리해 놓은 아나스타샤는 갑자기 궁금하다는 듯 물어보았다.
“그래서 아까 그 애는? 우리 학교 어떻다고 하니?”
샬롯이 무언가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난 그녀에게서 느낀 대로 대답했다.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도 멀리서 오신 분이라 약간 불안해하는 부분은 있었지만…… 앞으로 괜찮으리라 생각해요.”
준비도 착실히 잘 해서 온 것 같고, 내게 안내를 해 달라 했던 것도 학교에 빨리 적응하고 싶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그 정도로 열심히 하고자 한다면 못 할 일이 없겠지.
내가 해 준 것은 이 학교가 그런 열정을 환영한다는 것을 보여 준 것뿐이었다.
그런데 발렌티나는 안내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당연히 그렇겠지. 오자마자 선배가 학교 안내도 해 주고.”
“동전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어떻게 그게 그렇게 굴러들어가지?”
“진짜로.”
“잊어 주시면 안 될까요?”
왜 또 이야기가 그쪽으로 새는지 모르겠다.
옆에 있던 에르네스트가 살짝 호기심을 보였지만 난 절대 이야기해 줄 생각이 없었다. 발렌티나에겐 재미있는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선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창피한 기억이었다.
그렇게 어떻게든 다른 화제를 꺼내고 싶어서 방학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하려는데, 이 아이들과는 이미 서로 무엇을 했는지 다 아는 상황이었다. 새로운 이야기를 떠올려 보려 해도 새 곡을 연습했던 기억뿐이고.
아무튼 화제를 바꾸기 위해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즈음, 때마침 먼 곳에서 온 유학생 친구 두 명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 저 둘도 왔네.”
커다란 키와 덩치의 한승우와 단정하지만 시니컬한 인상을 지닌 리처드였다. 간만에 보는데도 두 사람의 외견엔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아나스타샤가 그쪽을 향해 손을 흔들자 눈을 마주친 두 사람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번엔 별문제 없었어? 리처드, 승우 한.”
짓궂은 농담이었지만 한승우도 리처드도 그냥 웃고 말 뿐이었다. 이젠 장난치듯 이야기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작년 이맘때를 생각한다면 지금은 정말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난 반가운 미소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어서 와요, 두 분.”
한승우는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리처드는 가방을 내 뒷자리에 휙 놓더니 책상에 걸터앉았다.
“잘 지냈어?”
“예, 리처드는요?”
“나도 잘 보냈지. 이것저것 하기도 했고…….”
다른 친구들도 있어서 자세히 이야기하진 않지만 그냥 이것저것이 아니라 정말 바빴으리라. 그는 연주자로서 성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이 아는 것들을 활용하여 다른 일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난 열여섯 살의 그가 하는 일들을 응원했다.
구태여 묻지 않고 그저 응원만을 보내는 날 보더니 리처드는 낮게 웃으며 주위를 휙 둘러보곤, 작게 이야기했다.
“아무튼 이렇게 보니까 좋네. 올해도 이 멤버엔 변화 없는 거지?”
“그렇지 않을까요?”
“혹 있다 하더라도 네가 붙잡아 줄 테니까. 걱정이 안 되네.”
이곳에 있는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결을 도울 의지가 있다. 실제로도 난 행동으로 보여 준 적이 있었고. 작년 한승우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나섰던 일을 리처드는 높게 평하는 듯했다.
이미 한참 지난 일이지만, 전혀 퇴색되거나 희미해지지 않았다는 듯 그가 말했다. 다른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아주 작은 목소리로.
“여기 있는 애들은 모두 너에게 빚을 지고 있는 거겠지.”
그는 이전에도 그런 말을 한 적 있었다. 내가 없었다면 아마 이 아이들이 모여 앉아 있는 일 자체가 없었을 거라고.
하지만 설령 그게 진짜라 하더라도 빚 같은 것이 되진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이 사이에서 얻는 것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목적과 긍지, 희망 등 난 정말 많은 것들을 이 아이들에게서 받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리처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슬럼프에 빠졌던 날 데리고 가서 일부러 쉬라고 깁스를 차게 했던 것을 여전히 난 기억한다. 절대 일방적인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저야말로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건 모두가 있기 때문이니.”
“……그래. 내가 괜한 소릴 또 했네.”
리처드는 작게 웃더니 사과했다. 그는 내가 어떤 마음으로 친구들을 대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다. 또 묻고 확인하거나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른 아이들이 제각기 떠들고 웃고 있는 와중 나와 리처드가 들리지 않도록 속닥거리고 있자 아나스타샤가 궁금해졌는지 물어보았다.
“무슨 이야기들 해? 그나저나 리처드, 승우 한네 놀러 갔던 이야기나 좀 해 볼래?”
“그게 지금 궁금해?”
“어…… 글쎄, 딱히 궁금한 건 아닌데.”
“……?”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왜 물어보냐는 눈빛으로 리처드가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눈빛에 아나스타샤는 기상천외한 대답으로 답했다.
“여기 우리 중에서 방학 때 여행을 가 봤다고 할 만한 사람은 너뿐인 것 같아서. 이야기 듣고 대리 만족이라도 하려고.”
“……살면서 그런 말은 진짜 처음 들어 보네.”
아나스타샤는 방학 내내 모스크바에만 있었다. 원래 여행을 좋아하는 그녀이니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것도 사실 그리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갑자기 이런 말을 하면 아무리 리처드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는 그렇게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원래 리처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방학에 어딜 가서 무엇을 했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리처드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가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음.”
시큰둥한 리처드가 도저히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자 아나스타샤는 타깃을 바꾸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말해 주기 싫으면 말고. 승우 한에게 물어봐야겠네. 자, 뭔가 재미있는 일 없었니?”
“재미있는 일?”
“응. 리처드가 말을 안 해 주니까. 너한테 물어봐야지.”
한승우도 그렇게 말이 많고 떠들기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누군가 물어본다면 솔직히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방학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는지 칠판 쪽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글쎄…….”
“어디 안 갔었어?”
“여기저기 데려가긴 했는데, 리처드는 피시방을 제일 좋아했던 것 같은데.”
어른스러워 보여도 역시 열여섯 살인 건가……?
리처드는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부라리고 있었지만 한승우에겐 아무 악의도 없었다. 그냥 별다른 의미 없이 순수하게 리처드가 제일 즐겼을 만한 곳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장난거리를 찾고 있는 아나스타샤에겐 좋은 기회나 다름없었다.
“넌 거기까지 가서 게임하다 왔니?”
“아니라고!”
“그럼 그거 말곤?”
“야, 말 똑바로 해. 한승우.”
단순히 여행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 사냥감을 노리는 포식자 같은 표정이 된 아나스타샤에게서 위험을 느낀 리처드는 빠르게 한승우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허튼소리가 아니라 그냥 말을 하지 말라고 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저것 먹어 보기도 했지. 리처드는 매운 걸 그럭저럭 잘 먹는 편이더라고. 그래서 어디까지 먹을 수 있나 한 번 실험해 봤더니 결국…….”
“야!!”
이쯤 되니 한승우도 아나스타샤와 한패로 리처드를 괴롭히려는 게 아닌가 싶다…….
한승우의 말이 이어지진 못했지만 결국 리처드가 견디지 못했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이미 아나스타샤는 물론이고 발렌티나나 에르네스트의 흥미도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들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아군이 많다는 걸 느꼈는지 키득거리며 말했다.
“오…… 다음엔 다 같이 도전이라도 해 볼까? 내기로 걸면 되잖아.”
“절대 안 해.”
“그러면 몰래 먹여 보는 건 괜찮니?”
“지금 싸우자는 거지?”
으르렁거리며 위협해 봐도 소용없었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까딱이며 마음대로 해석하라는 듯 웃기만 했다. 리처드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녀를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깊은 한숨만 푹푹 내쉬다가 한승우를 노려보았다.
왜 괜한 소리를 하냐는 눈빛이었지만 한승우 역시 태평한 건 마찬가지였다. 되레 다 함께 매운 음식에 도전하는 걸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문제는 리처드가 모든 종류의 내기에 끔찍하게 약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생각만 해도 어지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마지막에 먹었던 카레와 커틀릿은 지옥 유황불의 맛이었어……. 저 자식은 미쳤어. 내가 도대체 저 자식 나라에 왜 흥미를 가졌을까…….”
항상 카레나 커틀릿을 못 먹을 정도로 맵게 하진 않는데…… 예상컨대 한승우의 실험이 지독하지 않았나 싶다.
리처드는 학교에 제대로 다니기 시작한 한승우와 친해진 것 자체를 후회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정말로 싫어지게 된 건 아니겠지만.
난 은근한 미소와 함께 물었다.
“그래도 즐거우신 것 같네요. 리처드.”
“……타티아나, 날 배신하지 마.”
이렇게 으르렁거리긴 해도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그도 좋아하지 않으려나 싶었는데, 리처드의 기분은 상당히 틀어져 있는 것 같았다.
난 뜨끔해졌다. 리처드는 그래도 어느 정도 매운 음식을 먹는 편인 것 같았지만, 난 거의 입에 대지 못할 정도로 굉장히 약한 편이었다. 리처드는 그 사실을 잘 안다. 그가 뭔가 당한다면 결코 혼자 당하고 있진 않을 것 같다는 어두운 직감이 엄습해 왔다.
그 직감을 애써 무시하면서 난 모두와 웃으며 교실에서의 첫 시간을 만끽했다.
***
첫날부터 수업을 나가는 일은 없었지만 어마어마한 압력이 매 시간마다 차례차례 교실을 짓눌렀다.
선생님들은 피아노과 10학년 1학기를 구성하는 커리큘럼에 대해 짚어 주시면서 우리가 무엇을 준비하고 또 대비해야 하는지 그 청사진을 그려 주었다. 하지만 이런 교육에 익숙한 내가 봐도 숨이 막힐 정도로 그 커리큘럼은 밀도가 빽빽하고 수준이 높았다.
원래부터 요구하는 곡의 난이도는 높은 편이었지만, 이젠 낭만파식 테크닉에 완숙해지지 못한다면 전혀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론 수업의 수준도 굉장히 올라가 있었다.
훨씬 더 고차원적이고 어려워진 화성학과 음악이론, 거기에 음악사를 주제로 논문도 써야 하고 오케스트레이션에 대한 이론도 배워야만 했다.
물론 거기에 엄청난 과제들이 주어질 예정이었고, 첫날이라고 해서 과제 폭탄을 피해 갈 순 없었다. 학생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선생님들은 다음 주까지 해 와야 할 과제들을 잔뜩 내주셨다.
9학년 때 했었던 것들도 고급 이론 수업들이었지만, 그건 맛보기였다. 찬물에 조금 적응하자마자 바로 얼음물에 집어넣는 것처럼 10학년 커리큘럼은 마주하자마자 질릴 정도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 중압감에도 금방 적응해나갔다.
“우리 졸업은 할 수 있을까?”
“뭐 어떻게 되겠지.”
“작년 선배들 기억 안 나? 다 죽어 가는 것 같아도 죽지는 않더라.”
적응한 건지 포기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힘없이 늘어져 있는 분위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과제들이 주어지자 드디어 학교의 초침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모두들 이번 1학기를 어떻게 이겨나가야 할지 각자의 생각과 고양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전 시간을 그렇게 마무리하고, 난 친구들과 함께 식당으로 내려갔다. 점심식사를 한 뒤엔 별다른 일 없다면 선생님을 잠시 뵙고는 개인연습을 하러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잠깐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 손을 씻으러 갔다 오는 사이, 난 간만에 뵙는 선생님과 마주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구세프 선생님.”
“타티아나.”
피아노과에 사는 괴물이라고까지 불리는 구세프 선생님은 언제나처럼 딱딱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 목소리도 정말 반가웠다.
헤실거리며 웃고 있자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식사하러 가나?”
“예.”
“흠, 그래.”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하더니, 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을 어깨너머로 휙 가리켰다.
“식사 후에 잠깐 내 레슨실로 올라와라. 이야기나 조금 하자.”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궁금하신 것이 있으신 것 같았다. 나 역시 선생님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도 많고, 보여드리고 싶은 것도 있었기에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구세프 선생님은 물끄러미 날 바라보더니 뒤로 돌아선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친구들의 뒤를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