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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725화 (725/1,277)

##  725화

빵을 찢어 수프에 찍던 아나스타샤는 식사 후 점심시간에 잠깐 산책하고 오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난 미안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구세프 선생님이?”

“예.”

“학기초부터 왜 부르신대?”

아나스타샤는 그 이유를 궁금해하는 것 같았지만 나도 무슨 일인진 잘 모른다. 학기초이니만큼 부르실 일이 많으니 더더욱 짐작이 안 가기도 하고.

아까 물어봤으면 좋았겠지만 복도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었으면 선생님도 가볍게 이야기하셨을 테지, 레슨실로 오라고 한 이유가 있을 텐데 무시하고 싶진 않았다.

“잠깐 다녀올게요.”

“응.”

식당에서 나온 나는 친구들과 헤어져 그대로 구세프 선생님의 레슨실로 올라갔다.

지난 2년간 정말 자주 갔었던 곳인데 방학 때 잠깐 안 갔다고 약간 생경한 기분이 든다. 난 어쩐지 처음 그 레슨실을 찾아갔을 때의 기분을 느끼며 발걸음을 옮겼다. 중간에 복장 등을 단정하게 점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살짝 문을 노크했다.

“선생님. 타티아나입니다.”

“들어와라.”

전혀 달라지지 않는 무뚝뚝한 목소리. 레슨실로 들어가니 구세프 선생님은 책상 앞에서 무언가 일을 하고 계시는 중이었다.

언제나 봐 왔던 광경이지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 레슨실에 머무는 향기였다.

내가 선생님들의 레슨실을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미하일 선생님의 레슨실에선 홍차의 향기가, 그리고 구세프 선생님의 레슨실에선 담배 냄새가 난다는 부분이었다.

담배 냄새를 그렇게까지 역하게 여기진 않아서 그럭저럭 버틸 만했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구세프 선생님이 레슨실에서 담배를 태우는 모습은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탈취제 등으로 신경을 쓰셨는지 냄새도 이젠 많이 나지 않았다.

내가 원인일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잘 모르겠다. 난 라이터까지 선물해 드린 적이 있는데…….

“흠.”

구세프 선생님이 짧게 헛기침을 했다.

방학 동안 오지 않았다가 오랜만에 와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난 고개를 들고는 선생님과 눈을 마주했다.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지…… 가방을 옆에 내려놓고 책상을 가운데 두고 의자에 앉는다.

선생님은 찻주전자를 보면서 뭔가 마시면서 이야기할까 잠시 고민하시는 것 같았지만, 곧 그냥 이대로 하기로 한 것 같았다.

“그래…… 방학은 잘 지냈고?”

갑자기 날 불러낸 선생님이 이렇게 평범하게 대화를 시작하실 줄은 몰랐는데.

예상과는 조금 달랐지만 선생님이라면 으레 궁금해하실 일이기도 했다. 난 짧게 답하지 않고 차분히 이야기했다.

“예.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를 보고…… 생각한 바가 많았어요. 대형 콩쿠르 준비의 일환으로 협연도 진행했죠. 개인 연습과 컨디션 관리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냐.”

“그리고…… 아! 맞아요.”

“뭐지?”

“저 무언가 달라진 것 같지 않으신가요?”

“……?”

갑자기 무슨 묻지도 않은 소릴 하냐는 듯 선생님이 날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곧 빠르게 날 살펴 내려갔다. 그래도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 하시는 것 같다.

하지만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선생님은 눈을 부라렸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게냐?”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무뚝뚝한 선생님에게 괜한 소릴 했나 싶어 말을 얼버무렸다. 오랜만에 뵙는 느낌이라 기분이 좋아져서 말한 건데, 이렇게 화를 내실 줄은 몰랐다.

내가 고개를 떨구자 머리 위쪽에서 선생님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어 결국 마음대로 하라는 듯 항복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모르겠는데.”

“프로필 사진을 찍으면서 확인했는데, 키가 컸어요.”

“키? 얼마나?”

“2cm예요.”

키가 컸다는 말인즉슨 체격이 좋아졌단 뜻이고 그건 500kg이 넘는 피아노를 다룰 때 조금이나마 더 유리해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때문에 구세프 선생님도 기뻐해 주시리라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뚱한 눈빛으로 날 보더니 턱을 괴며 말했다.

“날 보면 어떻나? 타티아나. 뭔가 달라진 것 같지 않나?”

반대로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생각도 못했던 난 약간 당황하면서 선생님을 살폈다.

헤어스타일이 바뀌셨나 싶으면 전혀 모르겠다. 그제야 난 평소 선생님을 이렇게 주의 깊게 볼 일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이렇게 보는 게 조금 어색한 일이라는 것도.

그래도 내가 먼저 시작한 일이니 책임감을 가지고 생각해 보았지만 애초에 난 눈썰미가 그리 좋은 편도 아니었다.

“음…… 그대로이신데요.”

“난 2kg 쪘다.”

“……예?”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묻자 선생님은 불만이냐는 듯 날 노려보았다.

물론 난 겁을 먹긴커녕 당장 웃음을 참기 힘들어 죽을 지경이었다. 이렇게 받아치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우, 웃어도 될까요?”

“웃기나?”

“죄송합니다…….”

빠르게 사과한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웃음을 심하게 참다 보니 호흡이 흐트러져서 숨이 가빠지기까지 했다. 그냥 웃고 혼날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구세프 선생님은 농담은 여기까지라는 듯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선생님다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됐고…… 네가 어떻게 지난 2달을 보냈는지에 대해선 이미 미하일에게 들었다.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쉬운 곳이 아니었을 텐데. 잘 해낸 것 같더군.”

미하일 선생님에게서 들으신 것 같다. 난 고개를 들고 물어보았다.

“그 오케스트라를 아시나요?”

“알다마다. 옛날에 협연한 적도 있었지. 물론 20년쯤 전이니까 그때와 구성이 같진 않겠지만, 기본 수준이란 건 이어지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구세프 선생님은 날 바라보았다. 20년이 지난 후의 제자가 자신이 협연했던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 걸까?

사실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선 특별한 일이기도 했다. 난 구세프 선생님에게서 받은 것들도 많았으니까.

“가르쳐 주신 것들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총보를 읽고 오케스트레이션에 대해 일찍 공부하게 된 건…… 모두 선생님께서 짚어 주셨던 부분들이었으니깐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선생님은 모니터보다도 넓은 어깨를 살짝 늘어뜨리며 안심하시는 것 같더니, 날 똑바로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두각을 드러내고 이목을 끌게 된 것에 대해서 난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건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감당해야 할 몫이기도 하니까.”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 학교는 프로 음악가들을 훈련시키는 곳이다. 개인 수양의 목적으로 음악을 향유하려는 사람들과는 그 목적이 사뭇 다른 것이다.

선생님들의 목적 역시 제자들을 보다 큰 무대에 세우고 많은 사람들과 음악을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따라오는 명성과 주목 역시 뗄 수 없는 것이었고.

구세프 선생님이 평소 지향하는 방향도 정확히 그쪽이었다. 성공한 프로 음악가. 하지만 지금 선생님은 성난 곰 같은 자세로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목을 더 집중시키려는 사람들도 나오기 시작하더군.”

“……예?”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되묻자 선생님은 자세를 누그러뜨리며 날 바라보았다. 거기엔 약간의 피로와 복잡한 감정들이 얽혀 있었다.

난 지금부터가 본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구세프 선생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문화부 장관인 프세볼로트를 알겠지?”

“알고 있어요.”

직접적으로 만나 뵐 일은 없었지만 송년 음악회를 주최한 곳이 문화부라 먼발치에서 보기도 했고, 최근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오프닝 갈라쇼에서 인사말을 하시기도 했다.

그 이름 정도는 모를 수가 없었다. 내가 대답하자 선생님은 조금 더 신중한 태도로 이어 말했다.

“그 양반이 저번 송년 연주회 때 너와 에르네스트를 무대에 올린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걸 느낀 모양이다. 그 때문인지 최근에 권유가 직접적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한 나는 자세히 물었다.

“권유 말인가요?”

“그래, 가을에 있을 연주회다.”

구세프 선생님이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오신 건지 어렴풋이 윤곽이 잡혔다. 문화부에서 주최할 가을 연주회에 내가 스카우트된 모양이다.

열여섯 살이라고 해서 그런 큰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주역은 아니고 이벤트성으로 오르기 마련이었다. 송년 연주회에서 주인공은 세르히나 아르템, 밀리차 같은 프로들이었던 것처럼.

하지만 지금 들어 보니 이번엔 달랐다.

“이번엔 아르카디의 추천이 아니라 프세볼로트의 직접 추천이다. 아예 너와 에르네스트만 적극 지원할 생각인 것 같다.”

이번 연주회는 주인공으로 열여섯 살의 연주자 두 명을 무대에 올리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문화부 장관의 추천으로.

상황은 이해했지만 여전히 모를 부분이 많았다.

그 중요한 연주회를 왜 그렇게 기획하는 거지? 어린 연주자 둘. 나와 에르네스트. 그렇게 그려질 그림으로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쉽게 파악하기 어려웠다.

잘 모를 일은 선생님에게 묻는 편이 빠르다.

“좋은 건가요……?”

“좋지. 당연히. 에르네스트 녀석은 이미 공로 예술가이기도 하니까, 너도 훈장 하나쯤 받을 수 있지 않겠나?”

구세프 선생님은 그 연주회로 내가 얻을 수 있는 이득들을 큼직하게 설명해 주셨다.

“네 아버지에게도 도움이 될 게다. 문화부 장관 정도 되면 할 수 있는 일들이 생각보다 무척 많거든.”

훈장은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엔 솔깃했다.

그렇지 않아도 난 메세나 협회와의 연계로 조금씩 도움이 될 생각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내년의 콩쿠르를 우선시하면서 잠시 멈추고 있지만, 앞으로도 그 활동은 계속 이어 나갈 생각이었다.

그것이 날 지지해 주신 분에 대한 신의이자 검은 새가 안고 있는 죄를 갚아 나가는 길이었으니까.

때문에 난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구세프 선생님은 인상을 썼다.

“그런데 난 네 아버지가 아니라서 말이지.”

아버지라면 찬성하실 일을 선생님은 찬성하지 못하시겠다는 건가? 하지만 이미 내게 잔뜩 이득이 될 점만 말씀해 주신 걸 생각하면 약간 모순되는 느낌이었다.

찬성도 반대도 아닌 애매모호한 느낌. 평소엔 연주자로서 성공하는 길에 대한 칼 같은 의견을 가지고 계시지만, 난 종종 선생님이 이런 목소리로 내게 말할 때가 있다는 걸 안다.

기회를 이용하되 기회에 끌려다니는 것은 결코 좋아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송년 연주회에 내가 나가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도 무조건적으로 추천하시지 않고 신중하게 내 의견을 들어 주셨다.

물끄러미 바라보니 문득 선생님에게도 나와 비슷한 나이의 딸이 있었다는 게 기억났다.

알 듯 모를 듯 한 기분. 선생님이라면 절대로 이 이상 말씀하시지 않겠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용히 있자 선생님은 한숨을 푹 쉬더니 고개를 저었다.

“날 거치는 걸 배려라고 생각하는 것 같던 태도도 싫고, 그걸 네게 말해야만 하는 입장도 싫고, 그냥 다 싫군. 타티아나. 할 말 없나?”

무엇을 그리 걱정하시는진 모르겠지만, 난 그리 나약하지 않다.

누군가가 날 무대에 올리겠다면 올라가서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내 걱정이라면 다른 곳에 있었다.

“선생님, 무서운 얼굴 마세요.”

“……그래.”

“주름 생기셔요.”

“…….”

하지만 내 걱정을 듣고도 선생님은 더 무섭게 인상을 썼다. 정말 주름이 깊어지면 어쩌시려는지 모르겠다.

한참 동안 인상을 쓰던 선생님은 이윽고 책상을 툭 치며 말했다.

“네 피아노에만 집중해도 시간이 모자란데 말이다.”

그 말대로 난 할 일이 많았다. 학교를 다녀야 하는 건 물론이고 국제 콩쿠르 준비에도 여념이 없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음 음악을 찾아 나가는 나는 연구에 끝이라는 것을 두지 않고 몰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 말고도 음반 제작을 원하는 마카로프 프로듀서나 에이전시 계약을 바라는 베르너,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의 발레리 르포비치 등 날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2년 정도 가만두면 좋으련만.”

이전부터 구세프 선생님은 내게 시간을 주고 싶어 했다.

무언가에 쫓기면서 음악을 하는 것에 대해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정 안 된다면 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만큼은 시간을 주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다. 이 시기에만 가능한 것들을 할 수 있도록.

하지만 난 홀로 헤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있기에 더욱 힘을 내어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선생님도 그걸 모르진 않으실 테지. 난 가볍게 웃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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