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26화 (726/1,277)

##  726화

연주회에 대한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구세프 선생님은 자신이 알려 줄 수 있는 건 이 정도라는 듯 선을 그으며 말씀하셨다.

“자세한 건 나중에 미하일이 이야기할 게다. 난 미리 전해 주는 것뿐이고.”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공식 요청이 미하일 선생님에게 들어가기 전에 구세프 선생님이 문화부의 관계자와 이야기를 하신 게 아닌가 싶다. 혹은 프세볼로트 장관 본인과.

그 자리에서 선생님이 마음대로 의견 개진을 하실 순 없었을 테니 이렇게 내게 이야기하신 것이겠지만.

미리 알려 줌으로 시간을 벌어 주신 것에 대해선 감사한 일이었다.

생각할 시간도, 그리고 만약 하기로 한다면 준비할 시간도. 내겐 늘 부족했으니까.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는 무슨. 가 봐라. 시간 뺏어서 미안했다.”

딱딱하게 그리 말씀하시지 않아도 괜찮은데.

하지만 지금은 학기 초이기도 하니 상관없었다. 주어진 시간이 어떻든 간에 구세프 선생님과 나눌 시간은 앞으로도 많이 있을 테니까.

난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괜찮아요. 나중에 저에게도 선생님 시간을 나누어 주시면 되죠.”

“레슨 하자고?”

“안 되나요?”

“이제 와서 무슨…… 아니, 알겠다.”

솔리스트로서의 내 실력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후엔 구세프 선생님은 어지간해선 내 피아노에 손대지 않으려 하시곤 했다. 그러나 난 아직 구세프 선생님을 놓아 드릴 생각이 없었다. 2년이나 남아 있기도 했고.

선생님은 한숨을 쉬더니 그럼 나중에 시간을 잡아 보자고 말씀하셨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진심으로 말씀드리면 잘 들어 주시는 분이다.

이야기를 마치고 일어선 난 가방을 들고는 돌아서서 인사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이번 학기도 잘 부탁드려요.”

“……오냐.”

선생님은 날 내쫓듯 손을 휘적거렸지만 입가에 미소가 맺혀 있는 건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난 살며시 문을 닫고 나갔다.

“…….”

학기 중에도 콩쿠르나 연주회 등의 일정 등이 잡혀서 양립하는 것이 기악과 학생들의 삶이긴 하다. 하지만 이렇게 신학기가 되자마자 연주회들이 잡혀 있다고 하니 약간 복잡해진다.

물론 그 연주회에 꼭 참가하란 법은 없었다.

문화부 장관이 추진 중이라 하시니 아마 꽤 무게 있게 준비 중인 연주회일 테고 내게 있어선 큰 기회 중 하나가 되겠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결정할 생각은 없었다. 미하일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어 본 후 충분히 상의 후에 결정하면 될 일이었다.

“음…….”

그래도 마음속 무게추는 하는 쪽으로 약간 기울어 있었다.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에르네스트와 함께 하는 연주회라면 분명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고.

난 그렇게 결정을 약간 미뤄놓으면서도 계속해서 이번 학기 일정에 대해 생각했다.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빠르게 회전하다가 쌓이고 얽혀 간다. 얼마나 시간을 빼서 준비해야 하고 학과 일정은 어떻게 분산시켜야 할지 벌써부터 어느 정도 계획이 잡혀 나가고 있었다.

고민하며 복도를 걷다 보니 계단에 이르렀다. 바로 교실로 내려갈까 하던 난 잠깐 스터디룸으로 가기로 했다.

혹시 다른 친구들이 와 있을까? 첫날부터 점심시간에 스터디룸에 와 있을 확률은 굉장히 낮았지만 만약 있다면 만나서 인사 정도는 하고 싶었다.

그렇게 약간의 기대를 하며 문을 열었을 때, 난 그 안에 세 명이나 있는 것에 깜짝 놀랐다.

“류보비? 아나톨리!”

“우와, 언니!”

먼저 두 아이의 이름을 부르자 류보비가 벌떡 일어나더니 한달음에 뛰어와선 날 껴안았다. 이제 4학년이 된 류보비는 작다고 할 수 없어서, 휘청거리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난 달라붙어 있는 류보비를 살짝 떼어 내고는 옆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아하하, 잘 지냈나요?”

“물론이죠! 너무너무 반가워요!”

“저도요.”

건강한 모습이어서 고맙고, 학기 첫날부터 여기 와 준 것도 고마웠다. 내가 만약 여기 오지 않고 교실로 바로 갔으면 나중에 크게 후회할 뻔했다.

난 고개를 들고 뒤편을 바라보았다.

한층 더 점잖아진 아나톨리는 먼발치에서 웃으며 눈인사를 보내왔다.

“아나톨리도 좋아 보이네요. 못 본 사이 더 큰 것 같기도 하고요.”

“약간요.”

겨우 한 달 하고도 조금 더 못 봤을 뿐인데 정말 엄청나게 빨리 크는 중인 것 같다. 아나톨리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난 그가 작은 바이올린으로 스스로 불만족스러워하는 소리를 다루던 시기를 기억하기에, 하루빨리 자유로운 음악을 할 수 있길 바랐다.

그리고 그 옆엔 에르네스트가 앉아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몇 번 스터디룸에 오기 시작한 후로는 꽤나 자주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도 이렇게 와 있을 줄은 몰랐다.

내가 에르네스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눈치챈 류보비는 어떻게 된 일인지 신이 나선 설명했다.

“왔다가 아나톨리만 있길래 그냥 가려고 했는데, 에르네스트 오빠가 잠깐 있어 보라고 해서요. 그런데 진짜 기다려보니까 언니가 왔네?”

내가 올 걸 예상하고 있었던 걸까?

책상 위를 보니 세 명이서 이것저것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오기 전 상황이 궁금해져서 그에게 물어보았다.

“에르네스트가 함께 놀아주고 있었나 보네요?”

“놀긴 무슨? 내 할 일 했지. 여긴 스터디룸이잖아.”

“할 일요?”

“이거.”

에르네스트는 짧게 이야기하며 펼쳐진 공책을 들어 올렸다. 역시 무언가 작곡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이야기만 들으면 각자 따로 할 일 하고 있었던 느낌이지만, 류보비는 내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와선 에르네스트를 변호하듯 귓가에 속닥거렸다.

“오빠가 말은 저렇게 해도 저희 이제 4학년이라고 하니까 미리 도서관에서 빌려 놓을 책도 알려 줬고요, 아나톨리한텐 음반 추천도 해 줬어요.”

“그랬나요?”

“진짜 최고예요.”

중앙음악학교에서 10년을 보낸 에르네스트는 이 아이들에게 해 줄 만한 조언도 많이 알고 있을 테지. 기억력도 굉장히 좋은 편이니 4학년에 딱 걸맞은 도움을 준 모양이다.

심지어 그는 10년간 음악적 수준은 물론이고 학업 성적도 1등을 거의 놓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런 그가 가르쳐 주는 것들은 큰 도움이 되어 줄 것 같았다.

내가 흐뭇하게 웃자 에르네스트는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10학년이 할 일을 하신 건가요? 에르네스트.”

“……너도 그랬다면서?”

“후후.”

아침엔 내가 유학생 샬롯을 안내했고, 오후엔 에르네스트가 4학년 아이들을 도와주었다. 누가 정해 준 건 아니지만 우린 마땅히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기분을 공유하고 있었다.

잠깐 이야기나 하기로 했다.

류보비를 앉혀 놓고, 나도 에르네스트의 반대편에 앉았다. 그는 공책에 무언가를 슥슥 쓰더니 탁 덮어 버리곤 고개를 들었다.

이 테이블에서 바로 나눌 만한 이야기는 방금 나갔다 온 내가 가지고 올 이야기 정도였다. 에르네스트가 먼저 물어왔다.

“미하일 선생님은 아닐 테고, 누가 불렀던 거야?”

“음? 어째서 미하일 선생님은 아니죠?”

“내일 레슨인데 널 점심에 급하게 부르실 분은 아니거든. 내가 알기로.”

그사이 에르네스트는 어떤 분이 날 호출하셨는지 이것저것 추리한 것 같다.

그 추리는 꽤 날카로웠다. 일반적으론 지도 선생님이 불렀다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에르네스트는 여러 정보들을 종합해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정보 중엔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한 것도 있었다.

“제 레슨 일정표 봤나요?”

“어?”

형사처럼 의자에 기울어 앉아 있던 에르네스트가 순간 자세를 삐끗하다가, 다시 제대로 앉았다. 답잖게 당황한 모습이다.

잠시 후에야 그는 태연하게 이야기했다.

“그…… 내 거 보다 보니까 보이더라고.”

에르네스트는 머리가 좋은 만큼 철저한 것 같다가도 은근 빈틈을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난 나지막이 웃다가 그에게 정답을 말해 주었다.

“구세프 선생님의 호출이었어요.”

“……그분도 그럴 분은 아닌데?”

“그럴 만한 일이었거든요.”

사실 나도 호출이라기보단 복도에서 만난 김에 불러서 말씀해 주신 것이긴 했다. 그래서인지 아직 에르네스트도 무슨 일인진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고민하더니 물었다.

“뭔데? 알려 줄 수 있어?”

무언가 문제가 있다면 도와주겠다는 목소리였다. 이렇게 바로 진지하게 바라봐 주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난 그렇게 심각하게 보지 않아도 좋다는 뜻으로 웃으며 물었다.

“가을에 연주회 하시면 어떠신가요? 에르네스트.”

“가을 연주회? 내가?”

“예.”

구세프 선생님은 에르네스트의 지도 선생님이었으니 직속 제자의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그리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호출당한 건 내 쪽인데 왜 에르네스트의 이야기로 흘러가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그는 머리를 기울였다.

“갑자기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그냥 말씀해 주세요.”

난 일부러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연주회만 뚝 잘라서 그에게 물었다.

그는 준비하고 있는 것이 너무 많다. 내년의 국제 콩쿠르 두 개에 동시 출전할 계획인데다가 학교 공부는 물론이고 피아노와 작곡까지 병행 중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엄두도 못 낼 살인적인 스케줄을 해내고 있음이 분명했다.

거기에 연주회가 더해지면 어떨지 지금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살짝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지금 솔직히 연주회 준비할 틈은 없어. 틀에 박힌 무대에 틀에 박힌 프로그램으로 무대에 서고 싶진 않고.”

“그런가요?”

“독주회는 안 하려고. 내년까지.”

연주회란 정해진 주제와 곡에 맞춰서 무대에 올라 연주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준비에도 굉장히 많은 시간과 집중력이 들어가야 좋은 퀄리티의 연주회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에르네스트에겐 그런 시간을 쏟을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혼자서 연주회 기획과 프로그램 선별, 준비까지 할 순 없는 것이다.

때문에 독주회는 거절하겠다 한다. 하지만 구세프 선생님이 말씀하신 건 독주회가 아니었다.

“그럼 둘이서 하면요?”

“?”

그는 의문을 표했지만 곧 퍼즐 조각 몇 개로 윤곽을 맞춰냈는지 조금 더 분명히 내게 물었다.

“타티아나, 너 무슨 이야기를 듣고 온 건데?”

“지금은 안 가르쳐 드릴래요.”

“뭐냐고 대체.”

쓸데없는 퀴즈는 마음에 안 드는지 그는 투덜거리더니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이것만 말해 줘. 네가 도와주겠다는 거야?”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네스트는 다시 한번 심사숙고하더니 힘을 풀며 웃었다.

“네가 같이 준비하면…… 괜찮겠지. 저번 협연 예술 감독이었잖아?”

“경력으로 인정해 주시는 건가요?”

“그걸 인정 안 할 수가 있어?”

딱히 인정받고 싶단 생각은 없었지만, 에르네스트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기뻤다. 난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는 그 나름대로 내가 도와준다면 조금 더 무리하는 것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세한 건 그가 구세프 선생님에게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알 수 있겠지만, 지금의 반응으로만 보더라도 난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단 확신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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