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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727화 (727/1,277)

##  727화

여느 학교와 다를 바 없이 중앙음악학교에도 공포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교사들이 있었는데, 피아노과의 구세프라고 하면 그 이상 말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개학 후 첫 레슨 시간. 피아노과 6학년 라일라는 구세프의 레슨실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누구라도 그 모습을 안쓰럽게 생각할 만했지만, 구세프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라일라, 방학 동안 대체 뭘 했나?”

방금 전 라일라의 연주에 구세프는 크게 실망했다.

방학 내내 노는 녀석들이야 많으니 기대를 내려놓고 보려고 해도 라일라의 상황은 도를 지나쳐 있었다.

그녀의 실력에 맞추어 방학 동안 연습하면 좋을 만한 곡들을 일러 주었으나 그쪽엔 손도 안 대고 마음대로 훨씬 어려운 곡을 택했다가 이도 저도 못 하게 된 것이다.

잘못을 아는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를 보며 구세프가 다시 말했다.

“내가 잡아 준 가이드라인을 내팽개치고 하고 싶은 대로 한 건 좋다. 그 정도 강단도 있어야지. 하지만 멋대로 한 결과물이 이렇게 엉망이라면 넌 최악의 선택을 한 게다.”

냉정하게 평가한 구세프는 손을 쫙 펼쳐 보였다. 커다란 손이 보기만 해도 무서운지 라일라가 움찔거렸다. 하지만 구세프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할 뿐이었다.

“내 지시를 어겼지, 곡도 완성하지 못했지, 나쁜 습관도 붙었고, 결정적으로 시간도 낭비했지. 그리고 지금은 스스로 자괴감을 느끼고 있고.”

손가락을 접을 때마다 라일라의 떨림이 더욱 커져 갔다.

마지막으로 손가락을 모두 접어 주먹이 되었을 때, 구세프는 천천히 그것을 내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손해를 많이 봤고, 보겠구나. 라일라.”

차라리 방학 내내 놀러 다녔다면 모를까, 이렇게 엇나가 버리게 되면 라일라의 상황을 해결하는 데에도 시간이 꽤나 걸린다.

라일라는 말이 없었다.

충분히 그녀가 반성한 것 같자, 구세프는 헛기침을 하며 슬슬 이야기를 본궤도로 돌릴 준비를 했다.

해결하지 못하고 무너진다면 그대로 모두 손해가 되겠지만 얻어 내기만 한다면 분명 이득이 될 테니까.

이제부터라도 같이 답을 찾아가 보자고 말하려 할 참이었다.

“흑, 전 안 되나 봐요 선생님.”

“……뭐?”

괜찮나 싶던 라일라가 갑자기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호되게 혼난 학생이 대성통곡을 해도 눈 하나 깜짝 안하는 구세프이지만, 자신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중얼거리는 말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라일라는 울음을 참으려는 듯 끅끅거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제 수준에 안 맞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방학 전에 레슨하시는 걸 봐 버렸어요.”

“뭘?”

“에르네스트 선배요.”

구세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또 그 녀석의 연주가 문제였군.

에르네스트는 어떻게 해도 사람의 귀와 눈을 끌어당기곤 했다. 그건 무대에서 청중들을 상대로 하는 연주에서 그치지 않고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때문인지 에르네스트와 마주한 아이들은 조금씩 영향을 받곤 했다.

그리고 중앙음악학교의 학생이라면 대부분 그 음악에 도전하고 싶어 한다.

“긴 방학 동안 그 정도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작했는데…… 처음엔 잘 됐어요. 정말로.”

“…….”

“그런데 가면 갈수록 너무 어려워져서…….”

라일라 역시 충분히 천재라 할 수 있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아직 테크닉적으로 자유롭지 못했고,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엔 체험과 고찰이 부족한 나이였다.

에르네스트가 연주하는 곡의 수준을 따라가려면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음악성도 받쳐 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안 되니 완성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 상황에서 라일라는 유일하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도 못했다.

방학 동안 혼자서 완성시켜 놀라게 해 보이겠다는 호기로움이 가져온 비극이었다.

“선생님을 찾아뵙기라도 했어야 했는데…… 그것도 못 하고. 다른 곡을 하자니 투자한 시간이 너무 길어져서 어떻게 발을 빼지도 못하고…….”

창피함과 분함 등으로 울먹거리면서도 차근차근 이야기하던 라일라는 결국 참지 못하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뭘 잘해서 우냐며 더 야단을 쳤을 구세프였지만, 어쩐지 험악한 표정이 지어지질 않았다. 잘못임을 알면서도 매료된 음악에 이끌리던 아이를 떠올렸기 때문이었을까.

“……라일라.”

말을 걸자 더 운다. 구세프는 난감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무섭게 해 온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일단 분위기를 조금 바꿔 봐야 할 것 같다 생각한 구세프는 책상 위에 있는 사탕 바구니에서 보이는 대로 사탕을 하나 집어 들었다.

“자.”

“……?”

“먹어라.”

라일라에게 사탕을 주자 그녀는 훌쩍거리다가 말고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이런 걸로 달래려 하는 거냔 표정과 천하의 구세프가 자신을 달랜다는 것에 놀란 감정 등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구세프가 팔을 뻗고 있게 할 순 없었다. 라일라는 조심스레 사탕을 받아선 까서 입에 넣었다.

침묵 속에서 한동안 입에서 사탕을 굴리던 그녀가 말했다.

“선생님…….”

“그래.”

“써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다시 라일라가 울상을 지었다. 구세프야말로 당혹스러웠다. 하필이면 그 많은 사탕 중에서도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사탕을 고르지 못한 모양이었다.

매자 열매나 시나몬 사탕인가?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구세프는 모두 의도였다는 듯 라일라에게 말했다.

“라일라. 입에 넣고서야 쓴맛을 알아챌 수 있는 사탕처럼, 연주를 해 보고 나서야 힘든 곡도 있기 마련이다.”

“……아.”

“그러니 선택을 잘못했다고 지나치게 생각하진 말거라.”

사실은 처음부터 선택을 잘 하면 될 일이지만, 일단 달래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구세프는 단어를 주의해서 골랐다.

라일라는 무언가 느낀 것 같았으나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구세프가 재차 물었다.

“사탕을 먹다 보니 어떻지?”

“……오묘해요.”

“그래. 그 맛을 느끼기 전에 못 견디고 뱉어 버린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겠지.”

잔뜩 혼도 나고 맛없는 사탕도 입에 문 라일라의 눈이 크게 떠졌다.

구세프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지금 이 이야기가 바로 피아노와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사탕을 굴리다 보니 점점 더 다채로운 맛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라일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던 구세프는 주먹을 쥐며 강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콱 깨물어서 전부 먹어 버리는 거다. 완전히 그 맛을 기억에 새길 수 있도록.”

느끼는 모든 맛과 감정을 씹어 삼켜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라. 마치 곰 같은 모습으로 강인한 피아니즘을 보이는 구세프가 할 만한 조언이었다.

라일라는 여전히 피아노가 다루기 까다롭고 무겁다고 생각했지만, 구세프가 자신을 믿고 응원하고 있음을 분명히 느꼈다.

내심 감동하면서도 라일라는 방금 전까지 울었던 게 창피해서 괜히 중얼거리며 다른 소리를 했다.

“엄마가 사탕 깨물어 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 어머니 말씀 잘 듣는 건 중요하지.”

상심한 라일라를 더 북돋아 주려던 구세프는 맥이 빠졌는지 한숨을 쉬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 모든 모습 덕분에 라일라는 기분이 많이 나아졌다.

구세프는 슬슬 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말했다.

“아무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라일라.”

“어느 정도는요.”

“그래. 흠…… 오늘은 이만 가 봐라. 그 곡에 대한 레슨을 어떻게 진행할지 생각해 두마.”

라일라는 깜짝 놀라는 바람에 입에서 사탕을 떨어뜨릴 뻔했다.

“……어? 다른 곡으로 하지 않나요?”

“입에 넣은 사탕을 뱉지 말라고 했잖나.”

“아.”

쓴맛을 참고 확실히 먹을 수만 있다면 손해가 아니다. 라일라가 낭비해 버렸다고 생각한 방학도, 이 곡을 완성할 수만 있다면 전혀 낭비가 아니었다.

구세프는 라일라의 실수를 나 몰라라 할 사람이 아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옆에서 돕고 이끌어 주는 교사였다.

또 울 뻔한 라일라는 간신히 진정하며 구세프에게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저 정말 열심히 해 볼게요.”

“오냐, 그래야지.”

“가 보겠습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선 가방을 들고 레슨실 밖으로 나갔다.

조용해진 레슨실에서 잠시 생각하던 구세프는 손으로 옆머리를 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

학생들 멘탈 케어를 신경 쓰지 않을 순 없었지만 이렇게 오냐오냐 해도 될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구세프가 노련한 사람이었기에 사탕에다가 별 의미를 붙여 가면서 달랠 수 있었던 것이지, 원래는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전혀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

나도 늙었나.

구세프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피식 웃어 버렸다. 수십 년간 교사로 있으면서 정말 많은 학생들을 봐 왔지만 근래 들어선 정말 신선한 일들이 많았다. 그 대부분은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에 관련된 일이었고, 두 학생과 지내면서 구세프 또한 느끼고 영향받은 바가 꽤 있었다.

잠시 상념에 잠길 시간이 있으면 좋겠지만, 오후 레슨 시간의 중앙음악학교 교사들에겐 쉴 틈이 별로 없었다.

“선생님, 접니다.”

라일라가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아니라 노크를 하는 소리와 리듬만 들어도 누군지 알 수 있었지만, 구세프는 일부러 퉁명스레 답했다.

“접니다라고 하면 어떻게 아나? 에르네스트.”

“……아시잖습니까?”

“…….”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묻는 에르네스트에게 구세프는 할 말이 없었다.

“들어와 앉아라.”

에르네스트는 휙 들어와선 가방을 놓고 구세프 앞에 앉았다.

구세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제자를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는 그가 가장 신경을 쏟는 제자 중 하나였지만, 방학 중엔 레슨 신청도 한 번 안 해서 지금이 몇 달 만에 보는 것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오랜만이라는 인사도 없이 불쑥 물었다.

“방금 그 애…… 누구였더라. 아무튼 작년부터 맡으신 애였죠?”

“그래.”

“개학 첫날부터 잔뜩 혼내셨나 보네요.”

웃으며 나가긴 했지만 서럽게 울었던 것을 금방 지워 버릴 수는 없었을 테지. 복도에서 마주친 에르네스트는 그것을 봐 버린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약간 걱정스럽다는 투였다. 라일라가 문제가 아니라 구세프의 악명이 더욱 높아질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구세프는 아랑곳 않고 딱 잘라 말했다.

“혼날 짓을 했으니까.”

“음…….”

“불만이냐?”

“아뇨. 전혀.”

이제 10학년으로 벌써 구세프와 봐 온 세월이 10년이다. 그러니 다른 일이라면 그럭저럭 의견을 낼 만도 하지만, 교육 방침에 대해서라면 딱히 할 말은 없다는 듯 에르네스트는 말을 삼갔다.

이젠 그의 이야기를 할 때였다. 구세프가 먼저 물었다.

“방학 동안 연락 한 번 없더니, 잘 지냈나?”

“아, 학교엔 몇 번 왔는데 그때마다 안 계셔서…….”

“스마트폰은 게임하고 놀려고 가지고 다니나 에르네스트?”

“바쁜 일이실지도 모르니까요.”

한 마디를 안 지는군.

레슨 신청은 고사하고 방학 내내 죽은 듯이 지냈다는 건 약간 불만이었으나, 에르네스트가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하루이틀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보통 그럴 때, 에르네스트는 정말 놀랄 만한 결과물을 가지고 온다.

“그래도 방학 동안 놀고 있진 않았습니다. 보여 드릴 게 많습니다.”

“많다고?”

“예. 일단…… 이것부터.”

옆의 가방을 들더니 에르네스트는 악보 뭉치들을 잔뜩 꺼내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척 봐도 백 장이 넘었다.

구세프는 그 장수를 가늠해 보려다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이건 다 뭐냐?”

“론도, 랩소디, 에튀드 등 독주곡 몇 개와 협주곡 등입니다. 협주곡은 짧아요.”

“……이걸 방학 동안 썼다고?”

“예.”

연초에 작곡을 병행하겠다고 선언한 후로 정말 진지하게 작곡에 몰두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3개월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이렇게 많은 곡들을 써 왔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곡의 퀄리티도 확인하고 싶었지만, 구세프로선 에르네스트가 작곡가로서 얼마나 뛰어난가를 보는 것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것뿐이냐?”

이렇게 많은 곡을 작곡해 왔는데도 칭찬이나 평은커녕 바로 냉정한 물음이 날아든다. 거기에 반발이 생길 만도 한데 에르네스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으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물론 아니죠. 피아노곡도 쇼팽과 라흐마니노프 위주로 좀 더 연습해 왔습니다. 한번 해 볼까요?”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시켜 주기만 한다면 지금 당장 몇 곡이라도 연주해서 증명해 보겠다는 태도였다.

“됐다…… 천천히 하자.”

구세프는 지난 10년 동안 그래 왔듯 에르네스트가 이번 방학에도 흠 잡을 곳 없이 완벽하게 자신의 길을 나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구태여 그걸 오늘 바로 꼬치꼬치 확인하는 건 멋없는 짓이다. 앞으로 자연스레 레슨으로 보면 알겠지.

그보다 잠은 제대로 자는 건지 모르겠다.

보통 다른 학생들을 보면 방학 동안 토실토실 살이 올라서 오곤 하는데, 에르네스트는 조금 창백해져 있었다. 구세프가 보기에 그는 거의 한계에 다다른 상태로 지내는 중이었다. 하루 24시간을 사는 인간이라면 이보다 더 효율적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에르네스트는 그간의 수고는 물론이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똑바로 직시하는 데에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럼 앞으로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요, 선생님.”

“앞으로?”

“타티아나가 묘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연주회에 나갔으면 좋겠다는.”

이렇게 자신 있게 누구에게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음악만을 해 나갈 것 같이 구는 에르네스트에게도 유일하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미리 말해 주지 않았더니 타티아나에게 들었나 본데, 제대로 듣진 못한 모양이다. 에르네스트는 지금까지 방학 전체에 대한 결과물을 내놓으면서도 결코 보이지 않았던 기대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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