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8화
구세프가 더 자세히 설명할 것도 없었다. 문화부 주최의 가을 연주회가 매년 있다는 건 에르네스트도 충분히 알고 있었으므로, 잠깐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거의 모든 상황을 이해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무대의 주인공 자리가 이런 방식으로 주어질 줄은 몰랐던 것이 분명했다. 에르네스트는 반쯤 팔짱을 낀 채로 고민하며 말했다.
“프세볼로트 장관이?”
“그래.”
문화부 장관과 에르네스트는 직접 마주한 적도 몇 번 있었다. 때문에 에르네스트는 프세볼로트에 대해 떠올리며 가늠해 보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생각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영민한 그는 순식간에 생각을 정리하고는 구세프에게 물었다.
“그분이 왜 저와 타티아나를 지목한 것 같습니까?”
이미 이유는 충분히 짐작한 어투였다. 구세프는 이리저리 말을 돌릴 것 없이 직설적으로 이야기했다.
“너희 두 사람이 잘 어울리니까. 작년 연말에 보여 주었던 것처럼.”
그뿐만이 아니었다. 에르네스트가 헌정한 곡을 타티아나가 리사이틀에서 초연한 일로 호사가들 사이에선 이야기들이 오르내렸다.
누가 보더라도 두 사람은 차세대 신진 피아니스트로서 주목받으며 뭇 대중의 관심을 잔뜩 끌기에 충분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프세볼로트는 그 분위기를 정확하게 캐치해 낸 것이다.
구세프가 말하는 잘 어울린다는 뉘앙스가 어떤 의미인지 이해한 에르네스트는 감정적으로 나오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프세볼로트 장관은 정치적 감각만 뛰어나신 게 아니었군요.”
“무슨 말이지?”
“별 뜻은 아닙니다. 작년 그 연주를 보고 저희를 쓰기로 생각했다면 다행으로 여기고 감사히 받아들여야 할 일이라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특정 목적으로 쓴다는 말을 할 정도로 에르네스트는 현실적인 현대 연주자였다. 하지만 그만큼 초연하고 낭만적인 면모 역시 잃지 않은 음악가이기도 했다.
“비즈니스적인 감각으로 결정하신 일이라면, 저는 몰라도 타티아나는 피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어떠한 상품성을 기대하고 있다면 자기 혼자라면 괜찮지만 괜히 더 일을 벌이진 말란 뜻이었다. 에르네스트를 오래 봐 온 구세프는 그가 어느 지점에 선을 긋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타티아나의 의사도 먼저 들었던 구세프는 거기에 반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티아나는 네 생각보다 훨씬 현실적인 아이인데.”
“저도 압니다. 그러니 하겠다고 했겠죠.”
“그럼 뭐가 문제지?”
“…….”
점잖고 침착하게 자기 할 말을 하던 에르네스트가 순간 입을 다물어 버렸다. 생각의 정리는 마무리되었으나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구세프는 그가 더 고민하지 않도록 짧고 간결하게 정리했다.
“외부에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게 싫나?”
“…….”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급하며 책임지지 않는다는 걸 에르네스트는 이미 잘 안다. 때문에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지만, 그 말인즉슨 집중하지 않으면 휩쓸린다는 것을 인정함과 마찬가지였다. 말에는 힘과 속박이 있다.
에르네스트는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구세프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대중들에게 노출되며 겪었던 일들을 똑똑히 기억한다. 연주회를 두고, 콩쿠르를 두고, 음악원 진학을 두고 이야기하는 수많은 목소리들을 에르네스트는 좋지 않게 생각한다.
그러한 소음들에 신경을 쓰는 순간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일 정도였다. 구세프는 헛웃음을 흘렸다.
“간만에 네가 애 같아 보이는군.”
“애 맞습니다.”
“불리할 때만 그렇게 덥석 인정하는 게 얼마나 약삭빠른 짓인지 알지?”
“애니까요.”
또래에 비해선 분명 성숙하긴 하지만 아직 어리다. 그러니 자기 기준을 놓고 고집을 부릴 힘도 남아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구세프는 이 또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만큼이나 머리가 좋고 현실적인 아이였지만, 종종 자신의 행동으로 이어질 여파 등을 잘 계산하지 못하곤 했다. 심지어 가끔은 스스로에게 그리 관심이 없는 것처럼 구는 경향이 있어서 구세프는 늘 그녀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에르네스트가 아닌 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해 줄 수 있다면 걱정이 조금 덜하다.
이러한 면모도 스스로 올바르게 생각하며 책임질 수 있다면 그건 줏대이자 강단이 된다. 자신의 음악을 지켜야 할 음악가라면 응당 지니고 있어야 할 부분이었다.
지금 하는 말 역시 아무 생각 없이 하고 있진 않을 것이다. 구세프는 확인차 에르네스트에게 물어보았다.
“아무튼…… 프세볼로트가 그리는 그림에 맞추기 싫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지? 그냥 무시할 순 없다.”
“저 혼자 나가죠.”
“할 수 있나?”
“조금 빠듯하긴 합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다면 못 할 것도 없죠.”
잘은 몰라도 실력으로 어떻게든 뚫어보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실력이 원체 뛰어나니 그 좋은 머리로도 그보다 나은 방안은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 듯하다. 구세프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설득은 어떻게 하려고?”
“뭐든지 해 보겠습니다. 프세볼로트 장관도 어쩔 수 없도록.”
에르네스트는 그야말로 자신만만해하고 있었지만 구세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프세볼로트 이야기가 아니다.”
“……?”
“타티아나는 어떻게 설득할 거지?”
그건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에르네스트는 멈칫했다. 타티아나에 관련된 일이라면 그는 한층 더 신중해진다.
하지만 생각해 봐도 별수 없는지 이윽고 중얼거렸다.
“그냥 취소된 것으로 하면…….”
“그 애는 너와 같은 무대에 서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
“그 기대는 무시하고 네 독단으로 말이냐?”
에르네스트는 말문이 막힌 듯 침묵했다. 방금 전만 하더라도 장관이 뭐라든 알아서 해 보겠다며 자신 있게 이야기하던 그 애가 맞나 싶다.
구세프는 그를 더 자극하거나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이럴 땐 가만히 내버려두면 대체로 에르네스트는 올바른 대답이나 질문을 가지고 온다.
이윽고 에르네스트가 입을 열어 질문했다.
“선생님.”
“그래.”
“아까 저희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고 하셨죠.”
“그래.”
“정말입니까?”
의문과 의심. 그리고 이미 스스로 느끼고 있는 괴리 등이 에르네스트의 말에 안개처럼 퍼져 있었다.
구세프는 예전부터 느끼고 있던 것을 지금 이야기할 때라는 걸 느꼈다.
“네가 요즘 쓰는 곡들이 타티아나를 주제로 하고 있는 것 같던데.”
“빌어먹을.”
선생 앞에선 늘 정중한 에르네스트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더니 급히 고개를 들었다. 당황한 나머지 곧바로 사과도 나오지 않는 듯하다.
구세프는 그의 심정을 이해했기에 타박하지 않고 말했다.
“그게 잘못되고 있다는 자각은 있는 것 같군.”
“……예전에 비슷한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숭배의 의미로 쓴 게 아니냐고.”
“음악으로 거짓말을 하긴 힘들지.”
에르네스트가 쓴 소나타인 겨울의 표리. 그 첫 악장에 쓰인 몇몇 리듬과 긴 프레이징은 타티아나의 노랫소리와 굉장히 흡사했다. 가까이에서 두 사람을 지켜본 구세프는 그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다만 에르네스트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알고도 모른 체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다른 누군가가 비슷한 것을 느끼고는 미리 에르네스트에게 말해 준 모양이다.
음악성에까지 깊숙하게 파고든 어떠한 영향력을 한 번 의식하게 되어 버린다면 무시하기 힘들다. 에르네스트는 그 부분을 정확하게 직시하고, 이겨 내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었다.
“전 그 애와 다시 나란해지고 싶습니다. 지금은 그뿐입니다.”
에르네스트가 느끼는 것은 물리적인 높낮이가 아니었기에, 이번에 같이 무대에 서는 것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에르네스트는 분명하게 그 부분을 입에 담았다. 그의 강한 자존심은 다른 누군가의 의도나 불가피 등을 용납하지 않았다.
“…….”
구세프는 조용히 제자를 바라보았다. 이 애들은 가끔 경이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선생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데엔 굉장한 용기가 필요할 텐데, 에르네스트는 주춤거리거나 어색해하지 않았다.
라일라를 달래서 보내자마자 에르네스트에게서 이런 이야기도 들어 주어야 하고…… 오늘 무슨 날인가?
그러나 학생의 각양각색의 상담을 받아 주는 것도 지도 교사가 해야 할 일이었다. 분명한 의지가 있다면 지지해 주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고.
구세프의 납득을 이끌어 낸 에르네스트는 약간 만족하는 듯한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곧 다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달리 매듭이어야 할 일도 있고요.”
“그래? 뭐지.”
“말씀은 못 드립니다.”
“지금까지 온갖 부끄러운 이야기는 다 한 것 같은데. 이것보다 심한 게 있다고?”
그제야 창피함을 느끼는지 에르네스트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으나, 그는 이제 와서 동요할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았다.
다만 깊게 고민한 흔적이 가득한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을 뿐이었다.
“……제 이야기가 아니라서요.”
무슨 이야기인진 몰라도 더 파고들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구세프로선 사실 더 묻고 싶은 것도 없었다. 타티아나가 음악가로서 보이는 초월적인 능력을 에르네스트가 어떻게 감지하고 반응하는지 보았고, 또 필연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을 어떻게 컨트롤하는지 확인했다.
적어도 에르네스트는 그 중심을 잘 잡으려 하고 있었다. 그 정도면 지금으로선 충분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의 균형감각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 선생님.”
“그래.”
“무대를 축소시키는 것만이 답이 아니라면, 확대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확대?”
“연주자를 더 추가시키는 겁니다.”
무턱대고 프세볼로트를 찾아가서 담판을 지으려나 싶었더만, 그렇게까지 생각 없진 않은 듯하다.
“누굴 말이지?”
“아나스타샤라면…… 아마 들어주겠죠.”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 그리고 타티아나와 친하게 지내는 아이였다. 구세프는 그녀를 담당하고 있지 않았지만, 근래 들어 굉장히 훌륭한 연주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조금 더 구체적인 것들을 아는지,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최근 그 애 실력을 봤습니다. 정말 매섭게 성장하고 있는데…… 그 실력을 내년 콩쿠르에서 증명하는 것도 좋겠지만, 이번에 기회를 준다면 아마 받아 줄 겁니다.”
“기회를 준다라…….”
“제가 건방졌습니까?”
딱히 책잡을 정도로 잘못 말한 건 아니었다. 실제로 문화부 주최의 가을 연주회라면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커리어에 상당한 도움이 될 테니까. 선생으로서 구세프는 그 중요한 무대에 단 두 사람이 아니라 몇 명이라도 더 올렸으면 하는 바람이 분명히 있었다.
천천히 정리해 보니 에르네스트가 혼자 무언가 해 보도록 하는 것보단 그쪽이 분명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친구가 한 명 더 는다면 타티아나도 분명 조금 더 편안하게 연주회에 임할 수 있게 될 것 같았고.
프세볼로프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겠지만, 본래 원했던 것이 새 시대의 주역이라 할 수 있을 만한 좋은 그림일 뿐이었다면 이 정도로도 납득해 주리란 확신이 들었다.
계산을 마친 구세프는 고개를 끄덕여 에르네스트의 의견대로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일단 알겠다. 프세볼로트에겐 내가 다시 이야기해 보도록 하지.”
“그 이유에 대해선…….”
“네 개인적인 이야기는 삼갈 테니 걱정 마라.”
“……감사합니다.”
관계에 대한 일이지만 한 연주자이자 작곡가로서 에르네스트가 얼마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구세프는 그 부분은 그가 직접 해결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한숨 돌리며 어깨를 늘어뜨리는 에르네스트를 보던 구세프는 고개를 돌려 그가 가지고 온 악보 뭉치들을 바라보았다.
저 또한 타티아나에게 손을 뻗으려 노력한 결과물들이겠지. 그리고 내년 있을 대형 국제 콩쿠르를 동시에 두 개 참가하겠다고 한 것도 고삐를 늦추지 않고 달리려는 의지의 발로일 터다.
사실상 아들뻘인 제자인데도 구세프는 에르네스트의 그런 부분을 굉장히 높게 샀다. 하지만 방학 동안 부쩍 수척해진 것 같은 모습엔 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었다.
한동안 주저하던 구세프는 짧게 한마디만 하기로 했다.
“에르네스트.”
“예.”
“꼭 성과가 있어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과정도 중요한 법이지.”
10년 동안 성과주의를 강조해 왔던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에르네스트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 말을 이해했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세프는 교사로서 언젠가 했어야 할 말을 비로소 했다는 기분을 느끼며 편히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