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29화 (729/1,277)

##  729화

개학한 지 겨우 사흘 만에 교실에선 앓는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전반적으로 수준이 높아진 공부들을 따라가는 것이 벅차게 된 까닭이었다.

음악이론이나 문학 등의 학문들은 그나마 조금 나았다. 이곳의 학생들은 대부분 그런 예술적 방면에 탁월한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수학은 이야기가 다르다.

“일단 다 적긴 했는데. 그래프가 이게 맞나?”

“적긴 적었어? 난 이해가 안 가서 정신 놓고 보고 있자니 칠판 다 지워 버리시던데.”

“이거 과제를 뭐 어떻게 해 오라는 거야……?”

“나 그냥 피아노 치고 싶어…….”

라리사와 안드레이, 바르바라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중얼중얼하면서 각자 노트들을 놓고 무언가 토론을 하고 있었다.

저번 학기에서 이어진 미분적분학 수업은 이 아이들에게 있어선 세기의 난제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잘 모르는 것이 있다면 수업 중에 선생님에게 질문하면 될 일이겠지만, 그런 질문도 무엇을 모르는지 정리가 되어야 할 수 있었다. 손을 번쩍 들고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말한다면 혼만 잔뜩 나고 숙제에 깔려 죽기 직전까지 몰리게 될 것이 뻔한 일이었다. 그런 걸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에 없었다.

때문에 아이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끼리끼리 모여서 해결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학기초부터 벌써 이러면 앞으로 곤란할 텐데……. 난 어느 정도 수업을 따라갈 수 있었기에 거기에 끼진 않았지만 살짝 걱정이 되어서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때 번쩍 고개를 든 바르바라가 주위를 휙 둘러본다. 무언가 찾는 독수리처럼 교실을 훑던 시선은 내 쪽으로 향하더니 멈추었다.

“타티아나.”

“아, 예?”

“우리 좀 살려 줘!”

“……??”

그 말과 동시에 다른 친구들의 시선도 내 쪽으로 우수수 쏟아졌다. 갑자기 여러 개의 눈동자가 이쪽으로 향하니 조금 당혹스럽다.

약간 긴장한 내가 목을 세우자 바르바라가 한달음에 이쪽으로 날아와선 양손을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양심 없이 나중에 과제 보여 달라고는 안 할게. 방금 그래프 그리면서 설명해 주셨던 것만 알려 주면 안 될까?”

“아…… 그래프요? 어떤 그래프죠?”

“이거야.”

따라온 라리사도 내 앞에 노트를 펼쳐 놓았다. 살짝 보니 방금 전 칠판에 그러져 있던 것들이었다.

내게 보여 주고도 불안한지 두 사람은 속닥거렸다.

“제대로 그린 것 맞아?”

“몰라 대충 따라 그렸어…….”

이해 없이 그린 개형이라 그런지 이상하게 생기긴 했지만 알아볼 수는 있는 정도였다.

“잘 그리셨어요.”

내가 상황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주변에 몰려든 아이들의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내가 뭐라도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 믿는 눈빛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성적으로 에르네스트를 이겼을 무렵부터 친구들은 종종 내게 도움을 구하곤 했다. 난 그런 요청 등을 기껍게 받아들였고.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떤 기억을 돌아보더라도 난 수학을 잘 했던 적이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꼼꼼히 공부해 온 덕분에 친구들에게 설명해 주는 것 정도는 가능해졌다.

혹시라도 잘못 전달하지 않기 위해 생각을 잠시 정리하고는, 천천히 펜을 들었다.

“음…… 도함수로부터 그래프 개형을 유추해 내려면 몇 가지 기억하셔야 할 것이 있어요. 예시를 드리자면, 에프 프라임 엑스 이퀄…….”

기초적인 미분 테크닉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 난 내가 이해한 방식으로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혼자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에게 설명하다 보니 다시금 확실하게 익혀지는 부분도 있었다.

몇 분 정도 걸려 짧은 설명을 마치고 고개를 들자 방금까지 있었던 우울한 분위기는 사라져 있었다. 다들 똑똑한 아이들이다 보니 금방 이해한 모양이다.

바르바라는 노트를 똑바로 돌려 보더니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이렇게 보니까 훨씬 깔끔하게 이해가 가는데?”

“잠깐만, 나도 좀.”

“나도.”

다들 노트를 확인하고 베껴가기도 하면서 분주해졌다.

난 살짝 물러나선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 난 연속되는 곡선을 미분하듯 선율을 미분하는 방법에 대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상승과 하강의 각도를 알고자 하는 목표는 같으니까 오선지가 아닌 좌표면에 그려도 재미있지 않을까?

본래 음악은 수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학문이었다. 자연스레 연계되는 상상들을 아무렇게나 펼쳐보고 있는데, 바르바라가 허리를 쭉 펴더니 날 돌아보았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혼재된 표정이었다.

“일단…… 대충 알겠어. 나중에 다시 공부해 보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또 물어볼게. 괜찮아?”

“물론이죠. 언제라도 괜찮아요.”

“갑자기 마음이 놓이네.”

나야말로 10학년이 시작되자마자 친구들이 수학을 놓아 버리지 않고 그래도 따라갈 생각을 다잡게 된 것 같아서 마음이 편했다.

수학자로 살 것이 아닌 이상 미분적분학이 실생활이나 음악에 무슨 소용인가 싶겠지만, 이 또한 학교에서 배우지 않으면 나중엔 따로 배우기도 어렵다. 배울 수 있을 때 배워 두는 것이 항상 좋다는 게 내 지론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어느 정도가 있는 건 분명했다. 일단 수학 수업과 과제에 대한 부담이 살짝 덜어지자 모여든 친구들 사이에선 자연스레 볼멘소리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과제 너무 심하지 않아? 바로 위클리도 준비해야 하는데 우릴 죽이려는 것 같아.”

“불만이면 음악원으로 튀라는 건가?”

“진짜 그럴지도.”

힘들어하는 불만들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온다. 난 슬쩍 일어나선 밖으로 나왔다.

저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나 역시 여러 가지 따라가느라 힘들긴 했지만, 난 힘들 수 있다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이상한 사람이니까. 저런 불만에 함께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복도 창가에 잠깐 기대어 쉬려고 하는데, 이미 와 있는 사람이 있었다.

“이야기 다 했어? 타티아나.”

“아, 에르네스트.”

에르네스트는 창문을 열어 놓고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데이터가 잘 안 터지는 걸까? 아니면 그냥 가을바람을 쐬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바라보자 그는 스마트폰을 집어넣고는 교실 쪽을 가리켰다.

“미분하는 거 잘 모르겠대?”

“예. 방학 동안 신경을 안 썼다면 어려울 만했어요.”

“해석학의 기초라 생각하며 공부하니까 할 만하던데.”

“……?”

학교 과정만 따라가고 있는 나는 에르네스트가 하는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알 수 있는 건 그가 벌써 공부에 있어선 조금 더 멀리 가 있는 게 분명하단 것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바쁠 텐데 공부는 언제 하는 걸까? 원래 머리가 좋아서 뭐든 금방금방 해내곤 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보고 있는데 에르네스트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내가 할 질문을 거꾸로 물어보았다.

“타티아나 넌? 수학공부는 언제 한 거야?”

“꾸준히 조금씩요.”

말 그대로 꾸준히 한 것뿐이라서 그리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이런 소리를 했다.

“이번 학기는 수석 자리 너한테 그냥 줘야겠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기쁨이 아니라 걱정부터 덜컥 들었다.

우리는 그간 수석을 놓고 계속 경쟁을 해 왔다. 에르네스트도 나도 한 번도 양보한다는 생각 없이 주어진 시간을 모두 사용해서 최선의 점수를 받는 데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불가피한 일로 학교생활에 충실하지 못하게 되면 자연스레 수석도 놓을 수밖에 없는 일이 생기긴 했지만, 학기 초부터 에르네스트가 이런 약한 소리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난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물었다.

“벌써부터 그런 말씀 하시는 건가요?”

“그럴 것 같단 예감이 들어서.”

“하시는 것이 너무 많은 것 아닌가요……?”

내가 아는 것만 국제 콩쿠르 두 개 준비와 작곡 수업 병행이었다. 거기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정들도 빠짐없이 해내는 중이니 정말 하루를 빈틈없이 쪼개서 쓰고 있는 중일 테지.

그런데 거기에다가 무언가 더 해도 괜찮을는지 모르겠다. 걱정스런 눈으로 보니 에르네스트는 킥킥거리더니 손목을 까딱였다.

“이 정도는 해야 될 것 같아서 하는 거니까 괜찮아.”

“어째서 그렇게…….”

“아무튼, 이번에 연주회도 하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아 둬.”

“정말인가요?”

시간이 정말 촉박할 것 같은데, 걱정만 더 된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모든 게 잘 되어 가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정말이지. 대신 방식이 조금 바뀔 것 같긴 해.”

“방식이요?”

“응.”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야기 들으면 알 거야.”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해 달란 거잖아요.

바보 대하듯 하지 말란 뜻으로 항의하듯 바라보니 에르네스트는 날 피해서 창가에서 몇 걸음이나 물러섰다.

“잘 해 보자, 우리.”

그리고 그는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듣지도 않고는 복도로 휙 사라져 버렸다.

남겨진 나는 조금 황망함을 느끼며 서 있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가 연주회에 함께 하리란 생각을 하니 걱정보단 기대가 앞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학기 중 첫 레슨 시간. 난 미하일 선생님의 레슨실로 찾아갔다.

방학 중에도 자주 찾아뵈었기 때문에 선생님도 나도 이번 학기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학교 수업에서 요구하는 실기 과제곡 등을 해내면서 동시에 협주곡 공부, 그리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DVD 심사로 보낼 곡들을 정리하여 연습하면 된다.

“이미 잘 알고 있구나.”

선생님은 낮게 웃더니 찻잔을 들었다. 나 역시 거기에 맞추듯 목을 축였다. 해야 할 것들은 명료했고 선생님과 나는 의욕이 넘쳤다.

그리고 그 넘치는 의욕을 쏟아낼 만한 또 다른 무대도 내게 주어졌다.

미하일 선생님은 조심스레 내게 말씀하셨다.

“앞으로의 계획이 분명한 네게 미안하지만 이번에 연주회 제안이 하나 더 들어와서 말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난 어떤 이야기인지 바로 알 수 있었기에 웃으며 대답했다.

“알고 있어요. 가을 연주회 말씀이시죠?”

“……내가 이야기했던가?”

“구세프 선생님께서 귀띔을 주셨어요.”

“허허.”

날 놀라게 하지 못해 아쉽다는 듯 미하일 선생님은 웃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빨리 진행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기도 했다.

상황을 이미 다 듣고 마음의 준비를 마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선생님은 알겠다는 듯 말씀하셨다.

“그래…… 문화부 주최로 이루어지는 연주회다 보니 구세프와도 협의가 있었나 보구나. 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단다. 그것도 알고 있겠지?”

“예.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죠?”

“10월 중순이 넘어가면 겨울 연주회가 되어 버릴 테니 말이다.”

러시아의 가을은 짧고 겨울은 일찍 찾아온다. 9월 중순인 지금 벌써 낙엽이 떨어지고 있고, 10월이 되면 급격히 온도가 떨어지면서 추워진다.

그렇다면 준비할 시간은 약 한 달도 채 안 된다. 선생님은 미안하다는 듯 말씀하셨다. 약간은 화가 나신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중요한 연주회라면 적어도 방학 중엔 결정을 내려서 미리 알려 주어야 하는데, 가을이 다 와서야 가을 연주회 출연자를 결정짓고 통보하는 게 세상 어디에 있는 법인지 난 잘 모르겠구나. 네게 미안하기만 하고.”

“걱정 마세요. 할 수 있어요. 선생님.”

“거절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이는구나.”

“좋은 기회잖아요?”

물론 나도 넉넉하게 준비해서 무대에 설 수 있으면 한다. 연주회를 한 달 만에 준비하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러나 행정이라는 게 늘 그렇듯 우리의 편의에 따라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다행히 난 곡을 익히는 것이 빠른 편이고 가지고 있는 레퍼토리도 꽤 넓다. 에르네스트 역시 마찬가지이니 이번에도 잘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미하일 선생님은 씁쓸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날 믿는다는 듯 말씀하셨다.

“그래…… 네가 그렇게 긍정적으로 받아 주니 다행이구나. 나도 최선을 다해 도와줄 테니 네 친구들과 잘 해 보자꾸나.”

“예, 선생님.”

“그럼 다음 레슨에 만날 땐 무엇을 준비해 올지 짚어 주마.”

선생님과 레슨곡에 대한 이야기 또한 그리 길어질 것이 없었다. 짧은 에튀드 하나에 DVD 심사곡으로 올릴 만한 곡들을 추리는 과정이었다.

레슨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정리를 마친 나는 인사를 드리곤 레슨실 밖으로 나왔다.

“…….”

본래 있었던 학기 계획에 연주회가 추가된 것만으로도 여러 가지 계획들이 조금씩 바뀌었다. 하지만 시간 배분을 잘 한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난 차근차근 미하일 선생님과 나누었던 대화를 돌이켜보며 이번 주부터 어떻게 할지에 대한 계획을 머릿속으로 짜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일전에 듣기로 연주회에 나가는 건 나와 에르네스트뿐이었다. 그런데 왜 친구들과 잘 해 보라고 말씀을 하신 거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교실로 돌아왔다. 내 자리 옆엔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타티아나. 레슨 끝났어?”

“예. 두 분도?”

“응.”

오늘 레슨은 어땠는지 이야기나 들어 볼 생각이었는데, 아나스타샤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이야기 들었니? 나랑 너 그리고 에르네스트까지 가을 연주회에 나가라 하던데.”

“……예?”

당황한 내가 되묻자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아무것도 못 들었니?”

“아니에요, 들었어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또 무언가 바뀐 것 같았다.

계획은 계속해서 바뀐다. 그래도 내가 할 일엔 변화가 없으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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