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30화 (730/1,277)

##  730화

아나스타샤의 목소리엔 살짝 열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날 앞에 붙잡아 앉혀 놓고는 약간 두서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놀랐어……. 오늘 레슨 받으러 갔는데 연주회 해 볼 생각 없냐고 하시길래 선생님이 가져오신 일인 줄 알았는데…… 연주회 제안을 받은 건 줄은 몰랐어.”

갑작스러운 연주회 참가 요청이었는데 귀찮아한다거나 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평소 냉정한 모습도 없이 약간 들뜬 것 같았다.

“게다가 문화부 주최라며? 저번 겨울에 있었던 송년 연주회랑 같은 것 아니니?”

“비슷한 것 같아요.”

“정말…….”

목소리를 살짝 낮추던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열심히 하니까 되는구나…….”

약간 감격한 목소리. 날 만나기 전부터 피아노로 긴 슬럼프를 겪어 온 아나스타샤는 약간 늦게 연습에 몰두했다.

재능이 워낙 천재적이었던 만큼 그 실력은 금방 정상화되어서 알캉의 곡까지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좋아졌지만, 이번에 세 명이 함께 제안을 받은 것으로 그녀는 비로소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난 그녀가 열심히 거둔 성과가 인정받고, 이렇게 납득하여 기뻐하는 것을 함께 축하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여기에 함께 노력한 건 비단 나나 아나스타샤뿐만이 아니었다.

발렌티나는 우리가 큰 무대에 나가는 것에 대해 축하하면서도 약간 섭섭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나도 열심히 했는데, 왜 난 아무 말도 없어? 억울해!”

“그…… 활동량이 적어서 그런 거 아니니?”

“으.”

아나스타샤는 연습실에서 계속 연습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봄에 있었던 포트워스 국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에 나가선 대상이라는 결과로 그 실력을 전 세계에 선보이며 어필했다. 러시아 연주자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을 문화부 사람들이 아나스타샤를 알아보는 것도 당연했다.

다만 발렌티나는 그런 기회를 빨리 만들지 못했을 뿐이다. 난 그녀 역시 내년 국제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여기저기에서 많은 초청을 받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떨어지게 된 발렌티나의 불안은 비단 거기에만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너희 셋만 두면…….”

중얼거리던 그녀는 갑자기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마구 흔들더니 나와 아나스타샤를 번갈아 바라보며 신신당부했다.

“아무튼 이번엔 셋이 제안받은 거니까! 아무 생각 말고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해? 알겠지? 내 몫까지 한다고 생각하고.”

“앗…… 예, 알아요. 발렌티나.”

그리 말하지 않아도 최선을 다할 테지만, 아무래도 학기 중에 생긴 연주회 일정이다 보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일정은 촉박하고 아직 준비된 것도 아무것도 없다. 아나스타샤도 문득 그 생각을 하니 심란한지 책상을 톡톡 치더니 내게 물었다.

“미하일 선생님은 뭐라셔? 시간 너무 짧다고 안 하시니?”

“그리 말씀하셨어요.”

“음, 우리 빨리 준비해야겠네. 그치? 아직 자세한 건 나온 바 없지만 빨리 콰르텟과 만나서 이야기 해 봐야겠어. 미팅은 언제쯤 잡을까?”

“콰르텟이요?”

“……몰랐어?”

정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내가 의아해하자 아나스타샤는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우리가 다 각자 독주곡을 들고 무대에 오르진 않을 거야. 그렇게 분산시켜 놓는 기획은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까.”

“그렇긴 하죠.”

피아노 한 대를 놓고 연주자 세 명이 순서대로 무대에 올라가면서 연주하면 그건 연주회가 아니라 콩쿠르 같은 모양이 된다. 청중들은 자연스레 연주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각 연주를 비교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건 결과적으로 감상에 방해가 되는 일이었다.

때문에 피아노 리사이틀이 아닌 이상 독주 무대 후엔 합주 등으로 형식을 바꾸며 다채롭게 구성하는 편이다.

그런데 그런 구체적인 구성에 대해선 전혀 들은 바가 없었는데, 아나스타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나중에 계획이 바뀌면서 함께 하게 되어서 그런 걸까.

“내가 듣기론 듀엣 한 팀과, 실내악 한 팀으로 진행한다고 들었어. 우리 셋 중에 두 명을 어떻게 고를진 아직 잘 모르겠고.”

그리고 그녀는 내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빠르게 덧붙였다.

“이번엔 에르네스트랑 듀엣 안 해. 저번에 했었으니까.”

“아, 그랬죠…….”

“……그럼 네가 할래?”

당연히 에르네스트를 콰르텟에 붙이고 우리 같이 듀엣 하지 않겠느냐고 할 줄 알았는데, 아나스타샤는 자연스레 나와 에르네스트의 듀엣을 종용했다.

예전에 같이 듀엣 무대에 오르자고 약속했던 건 잊은 걸까.

하지만 이번엔 우리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전에 들었던 대로 보자면 나와 에르네스트가 듀엣을 하는 쪽이 본래 기획이었다.

“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랬구나.”

아나스타샤는 짧게 웃더니 머리를 기울였다. 긴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그러나 그녀가 짓는 미소엔 울적함이 물들어 있었다.

“우리 세 명이 다 함께 무대에 오를 일이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아서 그건 좀 슬프네.”

당연한 이야기를 하듯 그런 말을 한다. 순간적으로 섬뜩한 기분을 느낀 나는 그녀에게 되물었다.

“아나스타샤? 그게 무슨 말씀…….”

“그렇잖아? 피아노는 너무 크고 독립적인 악기니까. 우리 셋 다 피아니스트인 이상 완전히 하나가 되는 건 불가능할지도 몰라.”

틀린 말은 아니다.

수십 명이 하나로 모여 같은 음을 연주하기도 하는 바이올린 연주자와 달리 피아노 연주자들은 대체로 고독하다.

거대한 피아노는 무대 위에 하나 이상 올라가기엔 너무 부담스러운 악기였다. 피아노 듀엣만 하더라도 거의 무대가 꽉 차서 다른 악기는 거의 올라가지 못하게 될 정도가 되어 버린다.

그러니 아나스타샤가 나와 에르네스트가 모두 함께 무대에 오르는 것을 좀처럼 상상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난 그녀의 말에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그건…….”

“그건 아냐.”

갑자기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뒤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에르네스트가 우릴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아나스타샤가 했던 이야기를 가볍게 반박했다.

“피아노 화성을 더 잘게 쪼개면 될 일이잖아. 모차르트의 협주곡 7번은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이고. 바흐는 네 대까지도 썼어. 그 옛날에도 했던 건데 왜 불가능해?”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무대에 두 대가 넘는 피아노를 올리는 건 생각만 해도 부담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분명히 해결이 가능한 구성이었다.

물론 과거 작곡가들이 다루었던 피아노와 현대의 거대한 피아노는 차원이 다르니 조금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있겠지만, 각 역할을 분명하게 나누어 마치 오케스트라의 파트를 한 명씩 맡아 가져가듯 분배한다면 거기에서 가져올 사운드 효과를 충분히 기대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쉽게 납득하지 않았다. 그녀는 바보취급하지 말라는 듯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내가 그걸 모르는 줄 알아? 하지만 그게 다잖아?”

“바흐의 곡들을 찾아보면 더 있는…….”

“그래 봐야 몇 곡인데? 절대다수의 곡들은 솔로 아니면 듀엣이야.”

그녀의 말도 옳았다. 내가 알기로도 세 대 이상의 피아노를 위한 곡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지금까지 수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정말 많은 시도가 있었을 텐데도 그렇게 적게 작곡되었다는 것은 곧 연주회에서의 경쟁력이 그만큼 떨어진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물론 남아 있는 곡들은 그 와중에도 음악성과 경쟁력을 챙겨서 현대에도 종종 연주되곤 한다. 그러나 레퍼토리의 협소함은 금방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어쩌다 한 번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그 다음은 없을 게 뻔하잖아.”

냉정한 목소리가 반론을 묵살시켜 버린다. 앞으로의 일 같은 건 안 봐도 뻔하다는 목소리.

아나스타샤는 늘 현실적이었다. 난 그런 그녀의 판단에 늘 많은 도움을 받아 왔지만…… 오늘은 어쩐지 조금 슬퍼졌다.

“글쎄.”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의 주장에 더 반론하는 대신 우회적으로 해결안을 내놓았다.

“곡이 없으면 만들면 돼.”

“뭐?”

“이번에 내가 써 볼까? 어때?”

아나스타샤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눈을 크게 떴고, 에르네스트는 별로 어려울 것도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내가 써 오면 해 볼래?”

정말 에르네스트라서 가능한 제안이었다.

피아노 연주자이자 작곡가이기도 하고, 이런 상황에서 태연하게 곡을 써 오겠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을 통틀어 봐도 그 밖에 없을 것 같았다.

크게 뜨였던 아나스타샤의 눈은 곧 가늘어졌다. 그녀는 농담이 재미없다는 듯 차갑게 말했다.

“장난해 지금?”

“장난 아니야.”

“누가 들어도 장난인데? 한 달도 안 남은 지금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을 쓰고, 완벽하게 준비해서 무대에 올리는 게 가능하리라 생각해?”

작곡만 한 달이 걸린다 해도 말도 안 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만약 하더라도 이번 연주회 일정엔 도저히 맞추기 힘들 것 같다.

“불가능한 이야기를 가능한 것처럼 말하지 마.”

아나스타샤는 딱 잘라 말했다. 에르네스트의 장난엔 더 이상 휘말리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지켜보는 난 약간 상반되는 기분을 느꼈다. 분명 지금까지 음악을 배우면서 만들어 온 기준을 토대로 가늠해 보자면 아나스타샤 쪽이 옳다. 머리로는 그녀가 옳다는 것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르네스트의 이야기를 믿고 싶어 하는 마음 또한 존재했다.

한 달 안에 세 명의 피아노 연주자가 새로운 곡으로 함께 무대에 선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같이 들리지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고양된다.

조용히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던 에르네스트는 약간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너무 틀에 사로잡히지 마. 아나스타샤.”

지금 말다툼하고 싸우자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게 아니라는, 진실 된 목소리를 마주한 아나스타샤가 움찔했다. 하지만 그녀는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대꾸했다.

“이건 틀이 아니라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우린 모두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

두 번이나 에르네스트가 유연하게 받아넘기자 아나스타샤도 맥이 빠졌는지 가만 노려보다가 말을 그쳤다.

딱히 싸우거나 한 것은 아니니 이쯤 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리고 중요한 음악회에서 어찌 할 것인지에 대해선 달리 객관적인 의견을 내어 줄 친구도 있었고.

모든 이야기를 옆에서 들은 발렌티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어…… 그런데, 에르네스트. 옆에서 내가 들어도 말야…… 그냥 정해진 대로 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이미 콰르텟도 있다고 한 것 같고.”

“그건 그렇네.”

에르네스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갑자기 세 대의 피아노에 대한 오기가 생겨서 에너지를 쏟는 것보단 그냥 짧은 시간 내에 낼 수 있는 최대한의 결과를 만드는 게 낫다는 것 정도는 그도 잘 알 것이다.

하지만 정말 쉽게 물러서는 성격은 아니다.

“2주면 어때.”

“?”

“10분에서 15분 정도의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만약 내가 2주 정도 기한을 남기고 작곡해 오면 그동안 연습해서 할 수 있겠어?”

2주 안에 그만한 곡을 익히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현대 음악가이지만 작곡 스타일은 낭만파에 가깝다 할 수 있는 에르네스트가 쉬운 곡을 쓸 것 같지도 않고.

그런데 정말 그 짧은 시간 안에 작곡을 할 수 있는 걸까? 우린 모두 의문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는 기가 막히다는 듯 물었다.

“진짜 할 셈이니?”

“말을 꺼냈으니까.”

“왜 일을 벌려?”

“글쎄…….”

에르네스트는 잠시 말을 흐리더니 곧 피식 웃으며 손을 휙 저었다.

“이미 벌려 놓았는데 뭘.”

“?”

“아무튼, 어떻게 할래?”

다른 아이들은 학교에서 내 주는 숙제도 버거워하는데 여기 없던 숙제도 만들어서 하려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어려운 숙제를.

아나스타샤는 이번에도 현실적으로 가능한지에 대한 타당성 등을 가늠하는 듯 잠시 생각하더니, 곧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내게 바턴을 넘겼다.

“타티아나가 하자는 대로 할게.”

솔직히 말하자면 해 보고 싶었다.

에르네스트가 불가능한 일을 경솔하게 입 밖에 냈을 것 같지도 않고, 2주일이라면 나와 아나스타샤의 초견 실력이라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연주회의 가능 여부를 떠나서, 난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 에르네스트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야 할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안 그래도 밤잠을 제대로 못 자는 것 같은데, 되도록 일은 줄였으면 한다.

“전 에르네스트가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걸요…….”

“…….”

때문에 이번엔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찾아보자는 뜻으로 적당히 중재하려 한 건데, 에르네스트는 쉽게 납득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알아서 해 볼게.”

“이젠 마음대로 하겠다는 거야?”

“어떻게든 되겠지.”

그는 흘려보내듯 말하곤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마치 자포자기한 것처럼 들렸지만, 내가 느끼기에 그는 필사적인 것 같았다.

늘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난 그가 이렇게까지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조금 걱정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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