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1화
가을 연주회에 대한 기획은 며칠 사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연주자인 나와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가 모두 문제없이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곧바로 일정이 정해졌다. 내가 미처 모르는 곳에서 선생님들이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써 주신 듯했다.
그리고 오늘. 콰르텟 및 관계자들과 첫 미팅 날이었다.
처음 만나는 분들과 인사를 하자마자 회의를 시작해서 오늘 구체적인 기획 대부분을 정할 예정이었다. 기간이 약 한 달 정도로 멀지 않은 만큼 미뤄서 좋을 건 없었다.
일전에 2주일 만에 협주곡 협연을 성공시킨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그렇게까지 걱정되거나 긴장되진 않았다.
게다가 이번엔 혼자가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였다. 문화부 주최의 중요한 연주회인데도 친구들과 같이 한다는 생각을 하니 약간 들뜨는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
하지만 난 며칠 전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가 나누었던 작은 설전을 떠올렸다.
예전 자선 연주회 때도 그랬듯 두 사람은 음악가로서 약간의 의견 차이를 가지고 있었고, 종종 그 의견들을 내세우면서 부딪치곤 했다.
물론 그런 의견 대립은 크게 보아 발전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고, 내가 믿고 의지하는 두 친구는 이미 프로라 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의젓하기에 온전히 연주회에만 집중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조금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에르네스트의 의견을 조금만 순순히 받아들여 주고, 에르네스트는…… 정말 많은 걸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잘 알지만 너무 자신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바람으로 중간에서 중재하는 것도 내 역할일지도 모르겠다.
“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회의에 입고 갈 복장을 골라 본 나는 본격적으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나제즈다에겐 말하지 않고 혼자서 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쉬고 있다가도 어떻게 알았는지 내 방에 와선 머리를 말려 주며 도와주었다.
“음악가분들과 회의 하신다 하셨죠? 멋지게 해 드릴게요. 아가씨.”
“고마워요. 나제즈다.”
그녀도 나도 가벼운 웃음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휴일에도 어김없이 내 도움이 되어 주는 건 나제즈다가 원해서가 아니라면 어려운 일이겠지. 그래도 난 절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고맙게 생각하며 보답을 생각했다.
오랫동안 함께 하면서 서로 무엇을 좋아하고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잘 아는 사이엔 그리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아, 난 나갈 채비를 모두 마쳤다.
감색 바지와 흰 블라우스. 얇은 캐시미어 코트를 걸치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쌀쌀해진 가을 날씨에 적당한 느낌이었다.
나제즈다는 자신이 만든 작품을 감상하듯 내 뒤편에서 거울을 통해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셔도 되겠어요.”
“마음에 드시나요?”
“제 마음이 아니라 아가씨 마음에 들어야죠?”
“나제즈다가 좋다면 저도 좋아요.”
“말씀도 참.”
난 나름의 취향이 있기도 하지만 정말 오늘 같은 날은 나제즈다의 의견도 굉장히 중요했다.
그녀는 반걸음 더 다가오더니 말했다.
“당연히 마음에 들죠. 오늘도 예뻐요. 전 요즘 아가씨 덕에 힘을 얻고 있답니다.”
“그, 고마워요.”
“멀리 연주회도 잘 갔다 오시기도 하고…….”
가까이에서 올려다본 나제즈다의 얼굴엔 아직 내가 바로 알아볼 수 없는 여러 감정들이 가득 맺혀 있었다. 웃을 것 같기도 하고 울어 버릴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행복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건 알아볼 수 있었다.
작년만 하더라도 여러 문제를 앓고 있던 내가 비로소 안정을 되찾게 된 것이 올 봄이었다. 그 무렵부터 나제즈다는 내게 걱정 대신 뿌듯함을 느끼게 된 것 같았다.
난 그런 그녀의 눈빛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잠시 날 바라보던 나제즈다는 이윽고 다시 반걸음 떨어지더니 문 쪽으로 팔을 펼쳐 보였다.
“오늘도 잘 다녀오세요.”
“예, 나제즈다.”
난 그녀와 살짝 포옹하고는 방 밖으로 나섰다.
가지고 있는 짐이라곤 작은 가방 하나뿐. 피아노 연주자의 차림은 늘 이렇게 가볍다. 그러나 양손은 가볍지 않게 언제나 피아노 앞에 앉을 준비를 가다듬고 있다.
저택 밖으로 나오니 검은 벤츠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 삐딱하게 서 있던 빅토르가 날 발견하고는 자세를 바로하며 경례했다. 나도 그 장난에 맞추어 작게 경례해 주고는 문을 열어 주는 뒷좌석에 올라탔다.
운전대를 잡은 소로킨이 내 쪽을 힐끔 돌아보며 말했다.
“친구분들을 순서대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부탁드려요. 소로킨.”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차를 출발시켰다.
“…….”
아나스타샤의 아파트로 향하는 도로. 양옆으로 세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앞좌석에서 스마트폰으로 무언가 들여다보고 있던 빅토르가 불쑥 내게 물어보았다.
“오늘은 보자…… 회의가 있으시다 하셨죠?”
“예, 첫 회의예요.”
내 일정을 체크하고 보고하는 것 또한 빅토르의 일 중 하나였다. 이번에도 그런 이유로 묻는 건가 싶었는데, 그는 껄껄 웃더니 말했다.
“그래서 조금 더 복장에 신경을 쓰셨군요?”
“그렇게 보이나요?”
“하하, 멋지십니다.”
나제즈다가 봐 준 덕분인 걸까. 평소에도 그는 곧잘 내게 그런 칭찬을 하고 했지만 오늘은 정말 괜찮아 보이는 모양이다.
그렇게 모스크바의 중심부로 향하며 빅토르와 이야기를 나누길 얼마나 지났을까. 차량은 프리스넨스키 지구에 있는 한 주상복합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그 앞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난 그중에서도 내가 찾는 두 사람을 순식간에 찾아냈다. 눈에 너무 확 띄니 못 찾을 수가 없었다.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
창문을 열고 두 사람을 부르자 그리 크게 안 불렀는데도 바로 내 쪽을 바라본다. 아나스타샤는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고 에르네스트는 손을 슬쩍 흔들어 보였다.
미소로 반기며 문을 열어 주었다.
“어서 타세요.”
“응.”
“안녕.”
한산했던 뒷좌석이 갑자기 꽉 찬 기분이 든다. 덩달아 연주회에 대한 생각으로 비워 두었던 마음도 둥실거리며 차오른다. 어딘가 놀러 가는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들뜬 목소리가 나와 버릴 것 같다.
조금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난 옆에 앉은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니? 방금 나왔어. 저 애도 방금 왔거든.”
“시간은 늦지 않겠지?”
“충분해요.”
약속 시간 15분 전까지 도착하는 스케줄이었다. 소로킨이 교통상황까지 고려해서 계산한 시간이었으므로 과하지도 촉박하지도 않고 딱 적당했다.
우리 모두를 확인한 소로킨이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이번에 향하는 곳은 가을 연주회 미팅 장소였다.
아나스타샤는 매무새를 정리하며 제대로 앉더니 날 휙 돌아보았다. 그리곤 유심히 내 차림을 지켜보더니 물었다.
“어, 이 코트 저번에 같이 샀던 그거네?”
“오늘 처음 입어 보네요. 어떤가요?”
“진짜 예뻐.”
“아나스타샤도 그 옷 저번에 본 것 같은데. 맞죠?”
“응. 기억나니?”
“제가 봐 드렸잖아요. 후후.”
얼마 전 백화점에 갔을 때 샀던 옷들이었다.
몇 번의 가을을 겪으면서 난 옷들이 딱히 부족하진 않았지만,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를 따라다니다 보면 미처 몰랐던 마음에 드는 옷들이 있기도 했다.
친구들과 쇼핑을 하고 있자면 보물찾기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물론 보물을 돈을 주고 사야 한다는 게 조금 묘하지만.
그렇게 난 아나스타샤와 저번에 쇼핑했었던 이야기를 가지고 한동안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한정된 주제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쩐지 에르네스트만 소외당한 모양이 되어 버렸다.
난 이 이야기는 이쯤 하기로 하고, 몸을 앞으로 내밀며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에르네스트는 어떠신가요?”
“나?”
“예.”
이렇게 함께 이동하는 게 처음인 건 아니지만, 오늘은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나와 아나스타샤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약간 고민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둘 다 잘 어울려.”
“……?”
“왜?”
뭐가 문제냐는 듯 되묻는 그에게 뭐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일단 칭찬은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난 지금 우리 대화에 그를 강제로 끼워 넣으려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게 아니라…… 오늘 회의에 대해 이야기 듣고 싶었던 건데요.”
“……그럼 그렇게 묻지.”
에르네스트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대답이 내 신경을 살짝 건드렸다. 난 내가 어떻게 말했어야 했나 다시 생각해 보고 있는데, 내 옆에 있던 아나스타샤가 툭 내뱉었다.
“뭐야 그 말은? 성가시다는 투인데?”
“갑자기 무슨 말이야? 내가 언제?”
또 이상한 이야기를 하면 받아 주지 않겠다는 듯 에르네스트가 되받아쳤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그를 제대로 상대하지 않고 내 쪽으로 동의를 구했다.
“괜히 물어보길래 칭찬했다는 것같이 들리지 않았어 방금? 안 그러니? 타티아나?”
“음, 그런가요?”
내가 미묘하게 맞장구를 치며 받아 주자 아나스타샤는 거보라는 듯 에르네스트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인상을 확 썼으나 곧 이 좁은 차 안에서 언쟁을 벌여 봐야 승산이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항복한다는 투로 말했다.
“미안해. 그런 것 아니었으니까 몰아세우지 마.”
“흐응, 그래?”
아나스타샤도 여기서 에르네스트와 놀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우리만 있는게 아니라 소로킨이나 빅토르도 있었고.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내쉬더니 이어서 내가 본래 하려던 질문에 대한 답을 해 주었다.
“아무튼, 회의에 대해서라면 걱정할 것 없어. 콘서트 디렉터랑 미리 이야기해 봤는데 말도 잘 통하는 사람이고, 콰르텟도 실력자들이야.”
“콘서트 디렉터와 연락했었니? 언제?”
“어제. 구세프 선생님이 연결해 줘서. 아, 왜 나만 이야기했냐고 묻지 마. 어차피 오늘 회의하면서 볼 거라 어젠 별 이야기도 안 했었으니까.”
“…….”
무어라 하지도 않았는데 원천차단하겠다는 듯 에르네스트가 덧붙이자 아나스타샤가 신경질적으로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정말 논쟁을 하고 싶은 거라면 해도 상관없다는 분위기가 피어오른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런 건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연주회 구성이었다.
“그나저나 아나스타샤. 네가 콰르텟과 합주하는 걸로 괜찮은 거야?”
아직 관계자들과 만나진 않았지만 이미 그렇게 구성되는 것으로 합의가 마무리된 상태였다. 아나스타샤는 이제 와서 그런 걸 왜 묻냐는 듯 물었다.
“그렇게 하기로 했잖니?”
“……처음 보는 사람들이랑 합주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오래 본 친구인 만큼 에르네스트는 그녀의 성격을 잘 알았다. 아나스타샤는 더없이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지만, 음악가로서 본다면 본래 고독한 사람이 많은 피아노 연주자들 중에서도 조금 솔리스트적 면모가 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의 세계에 있고자 한다면 오로지 솔리스트로서만 살 순 없다. 아나스타샤도 그 정도 이해를 하지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별수 있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렇다고 맨날 보는 사람들이랑만 할 수 있겠니? 음악가로 산다는 건 다 그렇고 그런 거지.”
“뭔가 이치를 깨달은 것 같은 말이네.”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생각도 없어. 그냥 하는 말이야.”
“생각이 왜 없겠어, 네가.”
아무 생각이 없다는 말은 아무 생각도 하기 싫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에르네스트도 마찬가지인지 방금 전까지 날을 세우던 모습은 없이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와 티격태격하는 것을 피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그걸 심각하게 발전시키는 타입은 아니었다. 근래 들어 더더욱 점잖아진 그가 되도록 잘 해 보려고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그렇게만 해 준다면 내가 달리 중재 같은 걸 하지 않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각자의 생각과 관념, 하지만 하나의 의도를 지닌 우리들은 곧 미팅 장소로 약속된 오스탄킨스키 지구의 한 연습실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