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32화 (732/1,277)

##  732화

연습실 앞엔 이미 차량이 몇 대나 와 있었다.

그런데 약간 의아한 점은 일반 승용차가 아니라 벤 종류의 커다란 차량들이 많이 보였다는 점이다. 저런 차들이 왜 연습실에 와 있는 걸까. 어디서 촬영이라도 하는 걸까?

약간의 위화감과 동시에 기시감을 느끼면서 난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갈까요?”

“그러자.”

차에서 내려 연습실 건물로 들어섰다.

첫인상은 전혀 연습실 같지 않았다. 신축 건물에 좋은 시설을 갖추고 있는 것 같았지만, 복도에서부터 사람들이 서서 웅성거리고 있는 것이 음악 연습실의 분위기라기엔 너무 어수선했다.

그리고 그 어수선한 목소리와 시선 등은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들에게 향했다. 말을 걸으려는 건가 싶으면 슥 물러나며 길을 비켜 주었다. 그 상황은 미팅 약속이 되어 있는 방으로 가는 동안 계속해서 벌어졌다.

난 점차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방문을 열자 그 안엔 이미 십수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몇 대나 되는 카메라와 조명기기들도 보인다.

정 가운데에 있는 테이블에는 몇 명이 앉아 있었는데, 그중 한 분이 우리 쪽을 돌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찍 오셨네요.”

큰 키에 회색 정장차림의 여성분이었다. 그녀는 우리 쪽으로 다가오며 악수를 권했다. 먼저 에르네스트가 그 악수를 받았다.

살짝 손을 흔들며 그녀가 자기소개를 했다.

“일전에 전화했던 콘서트 디렉터, 알렉산드라 일리예브나 세르넨코입니다. 반갑습니다.”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베샤스트니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와 아나스타샤도 차례로 콘서트 디렉터와 악수와 인사를 나누었다.

진지한 눈빛이 우리를 살핀다. 이렇게 큰 연주회를 총괄하는 디렉터는 당연히 저런 눈빛을 할 수밖에 없다. 첫인상이라 할 만한 건 어차피 연주로 보여 주어야 할 일이겠지만, 외견만 보고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런데 콘서트 디렉터는 날 보고는 슥 지나쳐 갔지만 아나스타샤는 상당히 오래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가 쉽게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외모가 뛰어나다는 건 사실이지만, 그 눈빛은 순수한 호의와는 거리가 조금 있어 보였다.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예.”

이름을 부르고 나서도 콘서트 디렉터는 한참이나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결국 기다리던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아니오. 괜찮을 것 같네요.”

실례했다는 듯 슥 물러나며 콘서트 디렉터 알렉산드라는 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열여섯 살들을 무대에 세우려니 이런저런 걱정이 드는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여러 활동을 해 왔으니 분명 알렉산드라도 우리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찾아보았겠지만, 그래도 역시 그 정도로는 부족한 것 같다. 결국은 이번에도 실력으로 믿음을 얻어 내야겠지.

서로를 탐색하는 듯한 시간이 흘러가고, 살짝 어색해진 분위기를 환기하듯 에르네스트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알렉산드라 일리예브나. 스태프가 조금 많은 것 같은데. 혹시 촬영도 합니까?”

“그래요.”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에 서 있던 남자를 소개했다.

“일단 인사하세요. 메이킹필름 촬영을 맡은 프로듀서입니다.”

“하하, 데니스입니다. 그냥 프로듀서라 불러 주시죠.”

예상했던 상황 그대로였다. 이 촬영 현장은 오늘 우리의 미팅 전부를 녹화해서 짧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들기 위한 준비였다.

안경을 쓴 데니스 프로듀서는 히죽 웃더니 물었다.

“다들 놀라신 모습이군요? 혹시 이런 촬영은 처음?”

“몇 번 해 봤죠.”

송년 연주회 때도 똑같았다. 그때도 회의나 리허설 장면을 촬영해 갔고, 멋지게 편집해선 연주회 중간의 인터미션 때 보여 주었다.

일반적인 연주회라면 필요 없는 일이겠지만, 텔레비전 방송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텅 빈 인터미션 사이를 광고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로 채우는 것은 연주회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데에 있어서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이것도 다 문화부에서 주도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지.

에르네스트는 그런 메이킹 필름 촬영 때문에 놀란 게 아니라는 듯 덧붙였다.

“그런데 아무 예고도 없이 이렇게 하는 건 처음이고요.”

“아, 미안합니다. 일부러 이야기 안 했습니다.”

“일부러요?”

“전 되도록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는 것을 추구하는 터라.”

데니스 프로듀서는 과장스럽게 팔을 펼쳐 보이더니 주변에 있는 것들을 마치 지우개로 지워 버리려는 듯 허공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오늘도 저희 촬영팀은 신경 쓰지 마시고 평소 하시던 대로 회의 하시면 됩니다. 진지한 대화도 좋고, 열띤 토론도 좋고.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게 드라마가 될 테니 뭐든 괜찮습니다.”

“…….”

“열여섯 살들의 에너지를 가득 느껴 보았으면 좋겠군요.”

생각보다 우리에게 기대가 많은지 눈이 빛나고 있다. 하지만 난 약간 불안해졌다.

텔레비전에 나가는 건 이미 몇 번 겪어 본 일이지만 포토존 앞에 서는 것과는 달리 여전히 어색하기도 했고, 혹여나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가 정말로 평소처럼 에너지 넘치는 토론을 하면 어쩌나 싶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정말 음악에 진지하다는 걸 아는 나는 오해하지 않을 수 있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싸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되도록 서로 잘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자고 다시 한번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할 때였다, 데니스가 날 보더니 슬쩍 물어보았다.

“어떻습니까? 혹시 불안합니까?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예?”

“혹시 준비를 더 하고 싶으시다면 저희 미술부에 맡겨 주시죠. 최고의 프로들이 대기 중입니다.”

내가 카메라에 어떻게 잡힐지 걱정하는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 걱정도 없잖아 있지만 그렇다고 치장을 더 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나제즈다가 해 준 것이면 충분하기도 했고. 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꼭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괜찮아요.”

“그렇군요? 그럼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저도 이대로요. 괜찮죠?”

“하하, 우리 미술감독이 섭섭해하겠군요.”

그는 크게 웃으며 뒤를 바라보았다. 거기엔 미술감독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아예 양손을 깍지 끼고는 머리 뒤를 받쳤다. 이런 농담도 쉽게 주고받는 분위기인가 보다.

데니스 프로듀서와의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다시 콘서트 디렉터 알렉산드라가 우리를 불렀다.

“촬영 이야기 끝났으면 앉으심이.”

테이블로 안내받은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 무언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스태프들이 다가와선 물병을 따 주고 빨대를 꽂아 주었다. 이미 연주자가 아니라 배우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주위에 신경이 팔리기엔, 앞에 앉은 알렉산드라의 존재감이 너무나 거대했다. 그녀는 정말 진지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연주회의 성패가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듯한 눈빛이다.

“두 분…… 아니, 세 분 다 중앙음악학교 학생이 아니라 프로라 생각하고 말하겠습니다. 그편이 대화하기에도 수월하겠죠.”

우린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도 학생으로서 이곳에 온 사람은 없었다.

그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조금 안도한 표정이 된 알렉산드라는 곧 테이블 옆에 있는 서류철을 들고는 몇 장 넘기며 말했다.

“본래 기획은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와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두 분을 특집으로 하는 연주회였지만…… 피아니스트가 세 명으로 바뀌면서 약간 그 주제에선 벗어나게 되었어요.”

그렇게 바뀌게 된 것이 연주회 관계자의 의도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콘서트 디렉터인 알렉산드라의 말을 들어 보니 그녀가 바랐던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시 서류를 넘기며 그녀가 이어 말했다.

“우선 큰 변화라 한다면 콰르텟quartet이 피아노 퀸텟quintet으로 바뀌었고, 또 트리플 피아노 곡을 추가시켜 달란 부분인데……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개략적인 구성을 이야기하던 알렉산드라는 서류를 든 채로 고개만 올려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정말 묻고 싶은 게 많다는 표정이다.

“아직 완성된 곡이 아니라는 게 사실인가요?”

에르네스트가 새 곡을 작곡하겠다는 게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진행하려 한다는 것에 나도 놀랐지만, 콘서트 디렉터 역시 굉장히 놀란 것 같았다. 이런 질문이 있는 것도 당연했다.

에르네스트는 모두 예상했다는 듯 짧게 대답했다.

“예.”

“진척은?”

“이제 시작해야죠. 오늘 상황을 보고.”

“…….”

알렉산드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안 그래도 촉박한 시간인데 태평하게 이야기하는 에르네스트의 대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난 에르네스트가 진심으로 저렇게 말하고 있다는 걸 안다.

오늘 있을 첫 회의에서 우리가 얼마나 협조할 수 있는지, 콰르텟은 어떤 레퍼토리로 연주를 하는지 상황을 알아본 다음에 거기에 맞는 곡을 작곡할 작정이다. 천재인 그에게 가능한 최선의 방식인 것이다.

그런데 알렉산드라와의 오해는 이미 피할 수 없었다. 그녀는 유심히 에르네스트를 바라보더니 콘서트 디렉터로서의 의견을 내놓았다.

“시작하지 말라 한다면요?”

“아뇨, 시작은 할 겁니다. 해서, 보름 후에 검증받도록 하죠.”

에르네스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연주회 준비에 문제가 되는 일은 없을 테니 나중에 결과를 보고 이야기하잔 느낌이었다.

알렉산드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없군요.”

“그건 충분히…….”

물론 에르네스트도 자신의 독단으로 무조건 진행하겠단 뜻은 아니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려던 순간, 알렉산드라는 냉정하게 그의 말을 딱 자르며 말했다.

“프로로 대하겠다고 말씀드리자마자 뒤집어서 미안하지만…… 욕심이 너무 많은 건 좋지 않아요.”

“욕심인지 능력인진 나중에 보면 알겠죠.”

“이해하지 못하네요. 우리가 아는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가 망가지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네?”

당당하게 그녀와 말을 주고받던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옆에서 듣던 나도 무슨 말인지 곧장 이해하기 어려웠다.

알렉산드라는 약간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화가 났기보단 조금 곤란해하는 것 같았다. 우리보다 한참이나 어른인 그녀가 보는 시야는 우리의 좁은 세상보다 훨씬 넓고 높았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당신은 크렘린에서도 주목받고 있어요.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당신 행동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 러시아의 얼굴이기도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 점은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벤트 연주회도 거절하지 않고 나왔잖습니까?”

“……잠시 둘이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이야기가 빙빙 도는 것 같자 알렉산드라는 난감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이쪽 눈치를 보았다. 왜 어려워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머리카락을 한쪽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잠자코 듣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진짜 바보구나. 에르네스트.”

“대체 뭐가?”

“아직도 이해가 안 가니? 네가 연주회를 제멋대로 하며 굳이 할 이유가 없는 트리플 피아노 곡을 만들면서까지 우리랑 장난이나 치는 무뢰한처럼 보일 수 있단 말이야.”

“뭐, 무…… 뭐??”

일리야에게 양아치 등의 단어도 서슴찮는 아나스타샤의 성격으로 보자면 상당히 순화한 말이겠지만, 그녀를 제외한 모두가 당황할 정도로 직설적으로 들렸다. 기겁한 에르네스트는 물론이고 알렉산드라도 할 말을 잃었는지 눈만 깜빡였다.

나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돌려 에르네스트를 바라보니 마침 그도 날 보고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직접 작곡할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을 들어 본 것은 아니지만, 그게 결코 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그는 그저 우리들의 유대와 경쟁 등을 한 무대에서 보일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 점은 의심할 부분이 전혀 없다.

하지만 그건 에르네스트를 잘 아는 내가 가지는 믿음이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상한 오해를 할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고 나니 갑자기 우려스러웠다.

그의 표정이 일순 일그러지더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그만하라는 듯 물병을 꽉 쥐었다.

“잠깐만, 그게 무슨 소린데.”

“황당하겠지. 이해해.”

“내가 그렇게 미쳤겠냐고. 난 그저…….”

평소 달변인 에르네스트도 너무 어이가 없고 황당한지 중얼거리며 말을 흐렸다.

그때, 경색된 분위기의 테이블 위로 아나스타샤가 리듬감 있게 두어 번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그녀는 밝게 웃으며 에르네스트에게 말해 주었다.

“알아. 에르네스트.”

“……뭐?”

“네가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 너랑 난 그런 사이도 아니고.”

만약 아나스타샤가 에르네스트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작정했다면 지금만큼 좋은 기회가 없었겠지만, 그녀는 전혀 그럴 기색 없이 부드럽게 말했다.

에르네스트가 더욱 당황해하는 사이, 이상한 이야기는 이쯤 하자는 듯 아나스타샤는 손가락을 흔들거렸다.

“그리고 네가 그렇게 뻔뻔한 녀석이었으면 내가 가만히 있었겠니?”

“……네 손에 죽었겠지.”

“잘 아네.”

에르네스트의 어깨를 찰싹 때리면서 아나스타샤는 킥킥 웃었다. 주위를 감돌던 어색함은 금방 그녀의 분위기에 동화되며 농담으로 희석될 수 있었다.

걱정이 많은 것 같던 콘서트 디렉터 알렉산드라도 한결 나아진 모습이었다. 그녀는 안심한 표정으로 책상에 팔을 괴고 손끝으로 머리를 짚고 있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전 아나스타샤 양이 그렇게 말해 줄 줄은 몰랐네요.”

“왜요?”

거기에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알렉산드라가 말을 아끼자 아나스타샤는 빙그레 웃었다.

“전 결정이 어떻게 되든 저 애가 잘 해냈으면 좋겠네요. 저도 오해 사긴 싫으니.”

가벼운 말투였지만 에르네스트에게 많은 것이 걸려 있다는 걸 인정하는 뜻이기도 했다. 알렉산드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류들을 들어 올렸다.

“어쨌든…… 이제 상황 파악이 되셨다면 말씀해주시죠.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트리플 피아노는 없던 일로 하시겠어요?”

“…….”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어 보면 굳이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난 물론 친구들과 함께 무대에 서고 싶었지만, 그것이 에르네스트에게 부담이 된다면 여기에서 그만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아뇨.”

하지만 에르네스트의 의지는 여전히 공고했다. 약간 흔들렸던 만큼 더더욱 강해진 모습이었다.

“제가 이 애들과 장난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실히 보여 드리고 싶네요.”

“어떻게요?”

“무대에서 음악으로.”

확실히 그는 무언가 보여 주고 싶은 게 많았다. 그런 점에선 정말 욕심이 많은 음악가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난 그의 그런 모습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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