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33화 (733/1,277)

##  733화

에르네스트는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에 대한 상당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무대에 올리기 위한 이야기로 이어간다면 우리 셋이서 이야기할 때처럼 적당히 넘어갈 수 없는 법이었다.

콘서트 디렉터 알렉산드라는 본격적으로 에르네스트의 주장이 타당한지에 대해 검토하기 시작했다. 디렉터로서 여러 연주회 무대를 만들어 온 그녀의 기준은 날카롭고 엄격했다.

“주제에 대해선 확인하겠다 하셨고…… 시간이 촉박해요. 만약 기간 내에 모두 맞춘다 해도 초연이겠죠?”

“그렇죠.”

“다른 음악가 분들에게 검증을 받을 시간도 부족할 테고요.”

작곡가가 곡을 완성한다 해서 끝이 아니었다. 그대로 무대에 올리는 수도 있겠지만, 보통 몇 번에 거쳐 저명한 음악가들에게 보여 주고 검증 과정을 거친다. 조언이나 의견 등을 받아서 보다 완성도 높은 곡을 무대에 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에르네스트는 2주 내로 작곡을 마치겠다고 했지만, 그 후엔 곧바로 우리가 리허설에 들어가야 했다. 도중에 고칠 시간이 없다.

객관적으로 보면 이런 음악은 신뢰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

알렉산드라는 맡고 있는 큰 무대에 아무 곡이나 올릴 수는 없다는 점을 짚으며 분명히 말했다.

“겨울의 표리는 정말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연주하신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의 실력도 잘 알고 있고요. 하지만 리사이틀에서의 초연과는 다르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주회 초반에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초반에?”

“예. 서곡overture을 염두에 두고 쓸 생각이라.”

에르네스트도 그런 점은 미리 생각하고 있었다.

연주회 마지막에 그의 곡을 연주한다면 주목은 많이 받을 수 있겠지만 위험부담이 너무나 크다. 실제로 어떻게 평가될지는 무대에 올려 봐야 아는 것이었으니까.

때문에 그는 무대를 여는 신선한 음악으로서 준비하려 했다. 세상에 처음 초연되는 곡이니 관심을 끌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런 재료로 사용해도 괜찮다는 듯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이어 말했다.

“반응이 좋다면 연주회 전반에 도움이 될 테고, 반응이 안 좋다면 그다음 곡들이 더 주목받을 겁니다.”

그의 말대로 연주회 앞에 그의 곡을 놓는다면 완전히 연주가 실패하지 않는 이상에야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전체적 연주회 퀄리티에 영향이 갈 수는 있지만, 만약 비판을 받더라도 작곡가 에르네스트만 집중적으로 비판을 받으면 된다는 의미였다.

그 뜻을 이해한 알렉산드라는 걱정스런 시선으로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위험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말리고 싶은 표정이다.

“……그건 대작곡가들과 직접적으로 비교당할 수도 있다는 말인데요?”

“우리가 비교를 피할 방법은 없죠.”

에르네스트는 검증된 작곡가들의 음악에 앞서 자신의 곡을 미리 선보이는 일이 어떤 일인지 잘 알고 있다. 반대로 우리가 청중이었더라도 자연스럽게 각자의 기준에 따라 평가했을 테니까.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음악가로서 무언가를 비교하고, 비교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을 두려워하기만 하면 한 발자국도 뻗을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도전이 없으면 성과도 없다. 에르네스트는 정면으로 돌파하기로 결심한 사람이었다.

“애초에 피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리고 비교당하면 좋죠.”

그는 여유롭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 웃음엔 자신이 손해 볼 것도 딱히 없다는 의미가 실려 있었다.

이제 작곡을 시작한 지 1년도 안 된 어린 작곡가가 쓴 곡이 연주회 초반에 초연되고, 그 후에 연주될 곡들에 비해 뒤떨어진다 하더라도 큰 흠이 되진 않는다.

그리고 만약 예상 이상의 좋은 완성도를 보여 준다면 엄청난 평가를 받을 것이 분명했다.

청중들을 절망적으로 실망시킬 정도로 엉망진창이지만 않는다면, 어떻게 되든 이득을 볼 상황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그 부분을 자신 있게 당당히 마주했다.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던 알렉산드라는 곧 그의 말도 옳다는 걸 인정하며 웃어 버렸다.

“아주…… 맹랑하네요.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 맞아요.”

그리고 뛰어난 연주자이기까지 한 에르네스트는 그 후에 피아노로 충분히 보답할 실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막연한 불안을 느끼고 있던 나는 알렉산드라와 에르네스트의 대화를 들으면서 기대가 부푸는 것을 느꼈다.

아주 당돌하면서도 영리하다. 나로선 미처 생각도 하지 못한 부분들을 앞세우면서 에르네스트는 정말 모든 것을 이루려 하고 있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와 시선을 마주한 그는 옅게 웃더니 다시 알렉산드라에게 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제가 문화부 주최의 연주회에 아무 생각 없이 초연할 곡을 올리겠다 했겠습니까? 그러니 아까 같은 걱정은 하실 필요 전혀 없습니다.”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알렉산드라는 잠시 말을 흐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네스트의 논리와 태도가 그녀를 설득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아뇨, 알겠습니다. 그럼……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의 서곡을 1부 앞에 배치하는 걸 염두에 두고 기획하도록 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완전한 신뢰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알렉산드라는 콘서트 디렉터로서 연주회의 안정된 완성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세우며 경고하듯 말했다.

“다만,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진다면 모든 건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불만 없으시겠죠?”

“물론입니다.”

에르네스트도 현실적인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가 말했던 2주일 뒤. 완성된 악보를 가지고 알렉산드라에게 갔을 때 그녀가 최종적으로 허락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있었던 이야기들은 모두 없던 것이 되겠지.

그때 가서 그녀가 악의적으로 반대하진 않을 거란 믿음이 이 테이블 위엔 어느 정도 굳어져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낮게 웃으며 잘 써 봐야겠다고 중얼거렸고, 알렉산드라는 그의 결과물을 기대하고 있다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끼어들지 않고 곁에서 모든 것을 들으면서 만감이 교차함을 느꼈다.

지난 연말로부터 정말 얼마 안 지난 것 같은데 내가 많은 일을 겪고 달라진 것처럼 그 역시 굉장히 성장해 있었다.

한동안은 내가 조금 앞서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젠 정말 어림도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직감이 불식간에 찾아들어 뇌리를 점령한다. 그리고 난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무척이나 기뻤다.

그가 음악가로서 보다 완전해지는 매순간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었다.

“데니스, 방금 대화 모두 녹화되었나요?”

“음…… 아직 콰르텟이 도착하지 않았고 본격적인 회의 전이라 생각해서 카메라 세팅이 덜 된 상태입니다. 저기 있는 서브 카메라로 녹화를 하긴 했지만 쓸 수 있을진 모르겠군요.”

“잘 편집해 보죠. 좋은 장면을 조금은 건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물론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가 어떤 결과물을 가지고 오는지에 모든 게 달려 있긴 하지만요.”

알렉산드라는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방금 나누었던 진지한 대화를 메이킹필름에 넣는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가 비교를 피하지 않겠다고 했던 말은 상당히 자극적이면서도 흥미를 끌기에 좋았다.

그러나 만약 에르네스트의 곡이 무대에 올리기에 부적절하다면 그가 말한 그 어떤 것도 메이킹필름에 넣을 수 없다. 연주회에는 없는 기획이 언급되는 건 이상한 일이니까.

프로들의 세계란 으레 그런 법이었다. 완성되지 않은 것은 아예 세상에 보일 수 없다.

그것을 모두 이해하고 있는 이곳에서, 곧 전문가들의 시간이 펼쳐졌다.

데니스는 조금 더 촬영팀을 재촉하며 이것저것 지시하여 카메라 장비들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분주해진 주변을 휙 둘러보던 알렉산드라는 우린 신경쓰지 말자는 듯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럼 우리끼리 이야기나 조금 더 해 볼까요?”

콘서트 디렉터와 세 명의 연주자의 회의가 시작되었다.

남은 기간과 우리가 할 수 있는 구성들 그리고 프로그램에 대한 논의들이 하나 둘 올라왔다. 본격적으로 정하기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마치 벽돌을 쌓아올리듯 조금씩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연주회에 대한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 윤곽이 뚜렷한 모양을 갖추게 되면 비로소 청중들 앞에 내보일 수 있게 될 것이다.

“북적북적하네요. 시작부터 다큐 찍는 건가?”

그렇게 회의를 하는 도중이었다, 문이 열리며 몇 명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처음 보는 분들이었지만 각자 손에 현악기 케이스들을 들고 있어서 보자마자 어떤 이유로 찾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가장 앞에서 바이올린 케이스를 든 30대 중반의 남자가 스마트폰을 꺼내어 시간을 힐끔 확인하더니 멋쩍게 웃었다.

“시간에 딱 맞았죠?”

“예,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그는 성큼 다가와선 알렉산드라에게 악수를 청했다. 알렉산드라가 일어나 악수를 받자 그가 자기소개를 했다.

“스푸마토 콰르텟의 제1 바이올린. 게오르기 보리소비치 케드로프입니다. 저쪽은 바이올린 다리아, 비올라 카일, 첼로 솔렌.”

게오르기는 한눈에 봐도 콰르텟의 리더였지만 자신을 그렇게 바이올린 연주자라 소개했다. 되도록 평등하게 팀원들을 대하려 하는 태도와 그 목소리만 듣고도 그가 어떤 음악을 연주할지 어렴풋이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이어서 게오르기는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보기엔 우린 정말 어린애처럼 보일 것 같다. 하지만 그는 깔끔한 태도로 우릴 대했다.

“함께 하실 피아니스트들이신가?”

“처음 뵙겠습니다.”

난 게오르기의 템포에 맞추어 인사를 건넸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 해요.”

“송년 연주회 정말 잘 봤습니다. 아주 기억 속 깊이 남았어요. 에르네스트도 같이. 이번에도 그런 걸 볼 수 있는 건가요?”

“노력해 볼게요.”

“정말 기대되는군요.”

큰 소리로 껄껄 웃으며 그는 나와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아마 피아노 연주자로서 우리 두 사람은 그의 속에서 이미 어느 정도 인정받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도 아나스타샤는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궁금하다는 듯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리고…….”

“안녕하세요.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이즈마일로바입니다.”

“아하.”

이름 정도는 이미 들었겠지. 게오르기는 바로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치더니 말했다.

“우리랑 직접적으로 합주하셔야 하는 분이군.”

그의 말대로 사실 나와 에르네스트는 콰르텟과 별 관계가 없다. 같이 연주할 일도 없을뿐더러 심지어 인터미션을 기준으로 나누어질 예정이니까, 어찌 보면 리허설도 같이 할 필요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들과 완전히 같은 음악을 이루어야 했다. 심지어 그들 사이에서 주역이 될지도 모른다.

게오르기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 콰르텟은 피아노 퀸텟 연주 경험도 많습니다. 그러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반대로 아나스타샤는 피아노 퀸텟 연주를 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 조금 궁금하군요?”

숙련된 연주자들인 그들과 달리 열여섯 살의 피아노 연주자인 아나스타샤는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음, 없어요.”

“그래요? 그럼 피아노 콰르텟은?”

“트리오는 해 봤죠. 학교에서.”

“약간 애매하겠군요.”

“애매요?”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게오르기는 그저 걱정이 되어서 말할 뿐이라는 듯 웃음을 거두지 않고 이야기했다.

“저희 콰르텟은 16개의 현을 가진 하나의 악기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입니다. 여기에 피아니스트들이 좀처럼 잘 조화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거든요.”

그 말인즉슨 경험이 부족한 아나스타샤가 저 네 명의 음악에 튕겨 나갈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협연자를 본 콰르텟의 리더로서 당연히 고려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그 눈빛에선 바라는 것이 분명히 있었다.

“아까는 에르네스트가 의심받았으니까 이번엔 내 차례인가?”

아나스타샤도 불만을 느끼는 것 같진 않았다. 단지 말로 길게 할 것 없다는 듯 중얼거릴 뿐이다.

그렇게 일어선 그녀는 머리카락을 넘겨 정돈하고는 게오르기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저도 이 정도 예상은 하고 왔었으니까.”

그의 앞까지 다다른 아나스타샤는 손목을 흔들거렸다. 장난이라도 치는 듯한 미소였지만 그 목소리는 매우 진지했다.

“뭔가 쳐 볼까요?”

“하하핫.”

게오르기는 갑자기 크게 폭소를 터뜨렸다. 그 역시도 아나스타샤의 모습에 흥이 돋운 모습이었다.

“이야기가 빨라서 좋군요.”

손가락을 딱 튕기며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세 명의 연주자가 각자의 케이스에서 악기를 꺼내들었다. 그 모습은 무기를 준비하는 사람들 같이 보이기까지 했다.

아나스타샤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편에 설치되어 있는 검은 피아노를 바라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