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4화
다섯 명의 연주자들이 만난 지 1분 만에 즉석 합주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인사만 간신히 하자마자 바로 이렇게 악기들을 꺼내 드는 모습을 보고도 알렉산드라는 익숙한지 마음대로 하라는 듯 내버려 두었고, 프로듀서 데니스는 빠르게 카메라맨들을 재촉했다. 커다란 마이크들도 재배치되었다.
그사이 스푸마토 콰르텟의 게오르기와 아나스타샤는 빠르게 의견을 주고받았다.
“퀸텟은 저희도 준비가 안 되었고 피아노 콰르텟은 아나스타샤께서 준비가 안 되었을 테니, 해 보신 적 있다고 하신 피아노 트리오로 가 봅시다.”
“그래도 될까요?”
“저와 솔렌만 해서 맞춰 보도록 하죠. 두 사람은 쉬고.”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바이올린과 비올라 연주자는 도로 악기를 집어넣었다.
마치 악기들이 아나스타샤를 겨누고 있는 것 같단 느낌이 들어서 불안해하고 있던 나는 약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남은 바이올린과 첼로가 여전히 무시무시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바이올린을 든 게오르기가 물었다.
“지금 당장 가능한 곡은 있습니까?”
“멘델스존의 피아노 트리오 1번이요.”
“어려운 곡을 하셨군요.”
“좋은 곡이기도 하니까요.”
마치 절친한 사이처럼 가까이 앉은 두 사람은 순식간에 곡을 정해 버렸다. 아나스타샤의 실력을 확인하고픈 게오르기가 많이 편의를 봐주고 있는 덕분이었다. 대신 아나스타샤는 머뭇거리거나 난색을 표하는 일 없이 그에게 협조했다.
게오르기는 기분 좋게 웃더니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악보는…….”
“전 필요 없어요.”
“과제곡으로 근래 하셨나 봅니다?”
“아뇨, 작년에.”
“오.”
아나스타샤는 기억력이 굉장히 좋은 편이라서 한 번 익힌 레퍼토리는 좀처럼 잊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시간이 흘렀으면 자신감이 떨어져서 악보를 한 번쯤은 보는 것이 좋을 텐데, 그녀는 당장에라도 전부 가능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그 모습에서 오만이 아닌 천재성의 발로를 느꼈는지 게오르기는 작게 탄성을 냈다.
더 이상 말로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건반 덮개를 열고 자리를 정돈했고, 게오르기는 첼로 연주자 솔렌과 함께 태블릿 컴퓨터를 꺼내 보면대에 세팅하고는 악보를 찾아 슥슥 넘겼다.
“좋습니다. 3악장만 빠르게 맞춰도 괜찮겠죠?”
“3악장…… 알겠어요.”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자 게오르기는 솔렌에게 눈짓했다. 솔렌 역시 괜찮다는 뜻을 표했고, 두 사람은 제대로 악기를 들고 자세를 취했다.
악기를 든 게오르기가 요청했다.
“튜닝할까요.”
“그래요.”
아나스타샤가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 그 소리에 맞추어 게오르기와 솔렌이 조율을 시작한다. 아주 능숙한 모습으로 두어 번 활을 그으며 음을 맞추자 곧 피아노 트리오가 이 자리에 준비되었다.
“템포는 너무 과도하지 않고 이지하게. 가볍게 놀아 봅시다.”
게오르기의 유쾌한 목소리에 아나스타샤 역시 웃음으로 답했다.
“제가 노는 건 또 자신 있어서.”
“하핫.”
“갈게요.”
그 대답을 마지막으로 아나스타샤는 주저 없이 건반을 연주해 나가기 시작했다.
스케르초풍의 산뜻한 음색. 라장조의 선율이 물방울처럼 튀면서 연습실을 적신다. 빠르고 경쾌하게 피아노가 내달리며 구불구불한 호선을 그린다.
그리고 곧 그 위를 바이올린과 첼로가 정확하게 따라잡았다. 매우 정교하고도 아름다운 솜씨였다.
“…….”
난 이 곡을 직접 연주해 본 적은 없었지만 여러 음반을 통해 들어 보아 알고 있었다. 멘델스존이 남긴 두 개의 피아노 트리오 중 당대에 가장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현대에 이르러서도 최고의 트리오로 손꼽히는 곡이었다.
그중에서도 3악장. 트리오의 세 악기가 빠르게 교차하면서 서로의 기교를 뽐내듯 겨루는 악장이다.
사실 만난 지 몇 분도 안 된 음악가들이 아무 트러블 없이 조화롭게 연주하기엔 너무 고난도다. 불화가 엇비친다 하더라도 그건 잘못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숙련된 연주자들은 연주 속에서 서서히 합을 맞춰 나가며, 문제가 생기더라도 수습하여 발전시켜 나가는 방법을 안다.
‘이렇게나 잘…….’
아나스타샤는 처음부터 잘 할 수 없다는 점을 의식하는지 조금 더 보수적이고 이론적으로 연주를 툭툭 던져 왔다. 이해하기 쉬운 박자와 프레이즈 구성. 아티큘레이션도 넘치지 않게 아주 적당한 맛만 내는 중이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냄비 앞에서 아나스타샤는 유려한 동작으로 국자를 휘휘 젓는다.
그리고 게오르기와 솔렌은 겨우 이 정도냐는 듯 아나스타샤의 음악을 따라오면서 조금씩 기교를 끼얹었다. 피아노가 만드는 냄비에 이런저런 재료들을 더 넣는다.
담백했던 맛은 조금씩 자극적으로 변해 갔다.
아나스타샤는 물을 더 붓기도 하고 자신만의 조미료를 조금씩 더 넣어 보기도 하면서 두 사람과 균형을 맞추어보는 듯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재료가 많이 들어간 냄비가 거의 가득 찰 무렵이었다.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불길을 끌어 올리자 물이 확 끓어올랐다.
“!”
화들짝 놀란 게오르기와 솔렌이 재빠르게 피아노를 따라갔다가, 다시 아나스타샤가 소리의 불길을 늦추자 따라서 늦추었다.
사전 협의나 리허설도 없이 첫 연주에 이 정도로 순식간에 반응하며 음악의 균형을 이루는 건 정말 감탄할 만한 실력이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가 한 번은 확실하게 주도권을 쥐고 흔들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어느 타이밍에 피아노에게 불꽃이 주어지는지 정확하게 알고 행한 일이었다. 그녀는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이 곡을 연습했던 사람처럼 노련하게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거기엔 그녀의 테크닉도 너무나 잘 드러났다. 페달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빠르게 오르내리는 아르페지오를 오로지 건반 터치로만 컨트롤하며 음형을 빚어낸다.
이건 단순히 빠르기만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닌, 피아노 연주자가 물리적 한계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를 찾았을 때 비로소 가능한 연주였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능숙해진 실력이었다.
“…….”
불길을 손에 쥔 아나스타샤는 그것을 마음대로 다루며 요리를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실력과 스타일을 이해하기 시작한 게오르기와 솔렌 역시 거기에 맞추어서 이 트리오의 음악적 완성도를 점점 더 극적으로 끌어 올렸다.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실력이었다.
처음 만난 합주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멋진 음악을 맞추어 나간 세 사람은 곧 나란히 식탁에 앉았다. 웃음과 담소가 오간다. 곧 4분 만에 만든 완성된 요리가 가운데에 올라왔고, 모두가 그 맛에 작게 감탄하면서 음악이 끝을 맺었다.
“와우.”
“브라바.”
“멋진데?”
늦은 저녁, 모두 함께 부엌에서 요리를 하는 듯한 음악은 정말 인상적이고 감동적이었다. 난 세 사람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아나스타샤는 환하게 웃으며 이쪽을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스스로의 음악에 만족한 표정이었다.
게오르기와 솔렌은 활을 내려놓고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면서도 악기를 어깨에서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어쩐지 3악장에 이어 4악장도 연주하고 싶다는 마음이 얼핏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이쯤하면 괜찮지 않냐는 듯 일어나서 그의 앞으로 다가갔고, 게오르기는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쓴웃음을 짓더니 미안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솔직히 말하죠. 저번 퀸텟 연주 때 피아니스트와 트러블이 좀 있었던 터라, 아나스타샤. 전 오늘 당신이 제일 걱정이었습니다. 실력부터 보고자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요.”
“이해해요. 그럴 만도 하죠.”
프로 연주자들에게도 협연이란 늘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교향곡을 주력으로 하는 오케스트라가 협연에선 똑같은 퍼포먼스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여러 악기로 음악을 구성한다 하더라도 피아노라는 이질적인 악기와 어우러지는 건 굉장히 복잡한 일이었다.
거기에다가 지금은 본래 피아노를 염두에 두지 않는 현악 콰르텟이 피아노 퀸텟으로 바뀌어야 하는 상황이고, 피아노 연주자는 겨우 열여섯 살의 중앙음악학교 학생이었다.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확인을 마친 게오르기는 깔끔하게 아나스타샤를 인정했다.
“하지만 실례도 이런 실례가 없었군요. 무례한 제 합주 요청을 들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제 피아노는 괜찮았나요?”
“괜찮냐고요? 하하, 연주 내내 앞장서서 진두지휘하고는 이제 와서 그런 말 하는 겁니까?”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손뼉을 짝짝 쳤다. 만약 아나스타샤가 남자애였다면 등이라도 팡팡 쳤을 것 같은 기세였다. 그는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뒤편의 첼로 연주자, 솔렌에게 물었다.
“솔렌, 어땠나.”
첼로에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던 솔렌은 고개를 들더니 한마디 감상을 내놓았다.
“스푸마토 퀸텟으로 바꿔도 될 것 같습니다.”
“오버하지 말고.”
다시 한번 큰 웃음이 터졌지만 말이 별로 없어 보이는 솔렌의 그 감상이 더할 나위 없는 큰 찬사라는 데엔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만약 이것이 오디션이었다면 아나스타샤는 단 한 번 만에 입단 제의를 받은 것이었다. 심지어 소속감과 유대감이 가장 강하다 할 수 있는 콰르텟에서.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솔리스트로서의 면모도 굉장히 빛나는 사람이다. 그 부분을 어렴풋이 느꼈는지 게오르기는 적당히 농담을 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아나스타샤의 의견도 있는데 막말을 하는군……. 아무튼, 이렇게 같이하게 되서 기쁩니다. 한 달간 잘 해 봅시다. 아나스타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곧 게오르기는 아주 열성적으로 앞장서서 그녀를 다른 두 명에게 다시 소개했다.
물론 방금 있었던 음악은 여기 있던 모두가 들었으므로, 사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자신을 가장 성공적으로 알린 건 아나스타샤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성공적으로 다른 연주자들과도 제대로 인사를 나누며 친해져 갔다.
“…….”
난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종종 아나스타샤에게서 솔리스트적 에고가 강한 연주자의 모습을 보곤 했다.
피아노 연주자들은 대개 그런 편이었고 나 또한 그녀에게 무어라 하지 자격이 없을 정도로 홀로 피아노에 파고드는 편이었으니, 그저 혼자서 살짝 걱정할 뿐이었다. 종합적인 실력으로 겨루어야 하는 콩쿠르에선 불리하게 작용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협연을 진행하면서 경험을 축적해 나간 것처럼, 아나스타샤 역시 여러 공부를 하고 학교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하기도 하면서 저변을 넓혀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알캉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그 테크닉에 감탄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오늘도 난 아나스타샤에게 감동했다.
‘두 사람 다…….’
잔뜩 칭찬하고 안아 주고 싶은데 지금 아나스타샤는 콰르텟 단원들과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느라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괜히 두리번거리던 나는 조용히 앉아 있는 에르네스트에게 말을 걸었다.
“에르네스트?”
“어? 응.”
“무슨 생각 하고 계시나요?”
그는 시선을 조금 위로 하더니 픽 웃으며 말했다.
“방금 그 연주에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더 더해지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
에르네스트에게도 그만큼 방금 전 연주가 인상적이었나 보다. 특히 요즘은 작곡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보니 음악적 구성을 지금 가능한 한계까지 늘리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난 다리를 쭉 뻗으며 물었다.
“퀸텟이 되면 정말 굉장해지겠죠?”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못 다룰 곡이 없을걸.”
“맞아요. 우리도 긴장해야겠어요.”
“……우리?”
순간 되묻던 그는 내가 듀엣을 말하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는지 곧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던 걸까. 우리가 듀엣으로 저 퀸텟에 밀리면 안 된다는 건 잊지 않아 주었으면 좋겠는데…….
에르네스트로선 생각이 많은 듯했다. 난 크게 개의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