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5화
점점 친근감이 형성되는 분위기에서 우리는 찻잔을 놓고 본격적인 연주회 기획 회의에 들어섰다.
주로 의견을 내는 것은 콘서트 디렉터인 알렉산드라와 스푸마토 콰르텟의 리더라 할 수 있는 게오르기, 그리고 우리 중앙음악학교 10학년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에르네스트였다.
아나스타샤는 퀸텟에 대해 가끔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크게 나서지 않았고, 나 역시 에르네스트가 주로 나서는 것에 대해 별다른 이견이 없었기 때문에 조용히 듣는 쪽을 택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날 내버려 두지 않고 갑자기 끌어들였다.
“타티아나, 넌 어떻게 생각해?”
“어…… 예?”
“가을이라는 주제를 옐로우 계통의 색으로 드러내기로 한 것 말이야.”
회의 장면을 살짝 멀리서 바라보는 듯한 기분으로 있던 난 순식간에 대화 참가자가 되어 버려서 조금 당황했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테이블을 보니 알렉산드라가 태블릿 컴퓨터를 놓고는 터치펜으로 액정 위에 이런저런 색과 도안 등을 그려 놓고 있었다.
음악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서 잘 모르지만, 그래도 느껴지는 대로 이야기했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건…….”
“그래? 그럼 이건?”
그 후에도 에르네스트는 중요한 사안들이 나올 때마다 내게 의견을 묻고는 적극적으로 기용했다.
난 처음엔 그가 날 왜 이렇게 부르는지 몰라 당황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야 그가 며칠 전 했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지금 맡고 있는 일들이 많아서 혼자서 연주회를 준비하는 건 거절하겠지만 내가 도와준다면 해 보겠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지금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난 조금 더 회의에 집중했다. 알렉산드라가 만드는 도안은 물론이고 연주회 전반에 걸친 통일성을 어떻게 조화시키고 완성도 있는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승화시킬지에 대해 의견을 조금씩 개진해 나갔다.
5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알렉산드라가 회의 진행을 멈추더니 날 보며 말했다.
“타티아나의 미적 센스도 상당히 좋네요. 음, 느낌이 괜찮아요. 미술에도 소양이 있으신 듯하네요.”
난 음악 외에는 문외한인 사람이었다. 그건 오해일 뿐이라고 답하려는 찰나였는데, 에르네스트가 나 대신 대답을 가로챘다.
“이 애는 얼마 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예술감독을 맡기도 했었거든요.”
“예술감독? 협연자가 아니라?”
“둘 다 동시에요.”
“연주회가 있었다는 것만 들었는데, 그렇게까지?”
알렉산드라는 깜짝 놀란 듯 다시 태블릿 컴퓨터로 무언가 찾기 시작했고, 스푸마토 콰르텟의 네 명의 시선은 동시에 내게 향했다.
갑자기 주목받자 부끄러웠다. 에르네스트도 괜한 소릴 해 가지고……
내가 쭈뼛거리고 있는 사이 다시 정보를 찾아보았는지 알렉산드라는 눈빛을 달리하며 내게 물었다.
“어떻게 맡게 된 건가요? 타티아나.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절대 호락호락한 집단이 아닌데. 말을 잘 들어 주던가요?”
“아…… 그게.”
별것 아니라고 했다간 오케스트라에 대한 실례가 되고 그렇다고 자기자랑 같은 말을 늘어놓을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난 되도록 건조하게 있었던 일만을 이야기했다. 지휘자가 객원 지휘자로 변경되고, 그분의 선택으로 내가 피아노 연주뿐만이 아닌 예술감독으로서의 일도 함께 했다는 것을.
이야기를 모두 들은 알렉산드라는 짧게 사과했다.
“미리 알아보긴 했지만 시간관계상 제대로 깊게 보지 못하고 짧은 협연 이력만 보고 넘어갔더니 잘 몰랐네요. 전 데이터보다 실제로 본 것을 신뢰하는 사람이라…… 그런데 그 정도로 음악가로서 탁월하실 줄은.”
“과찬이세요.”
“아뇨, 그런 자리는 아무에게나 가지 않아요. 그리고 지금 조금씩 이야기하는 것만 보아도 이미 보통은 넘어섰다는 걸 알 수 있죠.”
난 알렉산드라의 입장도 이해했다. 콘서트 디렉터로서 연주자들의 정보를 완벽하게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무를 하다 보면 제일 중요한 건 결국 실력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직접 보고 판단하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행히 난 그녀의 합격점에 든 것 같았다. 아직 연주는 아무것도 해 보지 못했지만, 적어도 기획안에 대해선 내 주장을 잘 들어 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발언권에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의견을 내 주세요. 타티아나. 지금은 그래야 할 때니까.”
“……그렇게 할게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일로 머리가 복잡할 에르네스트가 조금이라도 짐을 덜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내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회의에 나서자 의견 교류가 더 활발해지고 진행도 빨라졌다. 모두 협조적으로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만드는 일에 힘썼다.
마지막으로 레퍼토리들을 선별한 뒤 예상 프로그램 목록을 몇 종류 준비하고 연습 일정 등을 정하자 오늘 회의에서 내야 할 결론이 모두 지어졌다.
약 1시간 정도 이어진 회의였지만 지지부진하거나 지루할 새 없이 목표만을 향해 달려 나간 기분이었다. 알렉산드라가 터치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선…… 오늘은 수확이 많았으니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괜찮겠죠?”
대략적인 청사진은 그려졌다. 듀엣과 퀸텟 그리고 트리오라는 구성이 이미 어느 정도 나와 있었기 때문에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던 일이었지만, 그래도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게오르기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다가도 어쩐지 조금 아쉽다는 듯 물었다.
“리허설은 안 합니까?”
“이제 막 연주회의 골자가 나온 상황에서 합동 리허설은 큰 의미가 없고…… 개별적으로 모여서 하시는 건 당연히 괜찮습니다.”
한 연주회를 이루지만 결국 맡은 음악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난 게오르기와 별로 접점이 없었다. 그가 리허설을 한다면 아마 따로 아나스타샤만 데리고 해야 할 테지.
하지만 곧바로 아나스타샤를 돌아보는 게오르기에게 알렉산드라가 경고하듯 말했다.
“하지만 게오르기. 학교 일정은 존중해 주셔야 합니다? 아시죠?”
“아, 그…… 그렇죠. 아직 학생들이었죠?”
마치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게오르기는 새삼 놀라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진정한 것 같자 알렉산드라가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무턱대고 아무 때나 불러내면 안 돼요. 불만이라도 나오면 콘서트 디렉터로서 제가 여러분들 자율 일정까지 정해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 부분 명확히 하셨으면 좋겠고…….”
그녀는 태블릿 컴퓨터를 챙겨들며 먼저 일어섰다. 그러자 비로소 정말 회의가 끝났다는 느낌이었다.
“이만 돌아가죠. 다음 미팅은 나흘 뒤고, 그사이 전화나 메시지 등으로 연락이나 아이디어 공유를 하실 분들은 언제라도 괜찮으니 연락 주시길 바랍니다. 여기 명함 교환하죠.”
“아, 전 없어서. 나중에 전화 드리죠.”
음악가들 중엔 명함을 굳이 만들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철저한 비즈니스 사회가 아닌 음악가들의 세상에선 그게 그리 큰 문제도 아니었고, 어차피 대부분 에이전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 에르네스트가 품속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알렉산드라에게 명함을 건넸다.
“전 대표는 아니지만 여기.”
“고맙습니다.”
난 깜짝 놀랐다. 에르네스트가 명함을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건가? 하지만 그렇다면 그 전에도 중요한 사람들을 만날 때 명함을 주는 광경을 한 번이라도 봤어야 했다.
처음 보는 장면에 놀라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도 신기해하자 에르네스트가 그녀에게 말했다.
“뭘 그렇게 봐?”
“명함은 언제 만든 거니? 나도 한 장 줄래?”
“……얼마 전에 에이전시에서 준 거야. 네가 이게 왜 필요한데?”
“그냥.”
“절대 안 줘.”
또 무슨 장난을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지 에르네스트는 방어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에게 장난 같은 걸 칠 생각이 없는 나는 다시 한번 부탁했다.
“기념으로 하면 안 되나요?”
“…….”
그는 물끄러미 날 바라보더니 이윽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다시 명함을 꺼내어 나와 아나스타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받아 보니까 정말 성인 연주자인 것 같은 느낌이다. 에이전시에서도 그것을 신경 쓴 걸까. 다방면에 걸쳐 음악가로서 성장하고 있는 에르네스트가 정말 내년이면 어디까지 가 있을지 모르겠다.
아나스타샤는 그의 명함을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모서리를 양 손끝으로 잡고는 요령 있게 핑그르르 돌렸다. 에르네스트가 뭐 하냐는 눈초리로 바라보니 그녀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는 말했다.
“아까 힐끗 봤는데 디자인 예쁜 것 같더라고. 근데 진짜 괜찮네. 네가 고른 거야?”
“아니. 그냥 이걸로 하라고 해서…….”
“꼭 이런 중요한 건 마음대로 하게 둔다니까?”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양보하지 말라며 일장 연설을 토하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에르네스트는 황당해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다들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난 그녀의 옷깃을 살짝 잡으며 말했다.
“저기, 아나스타샤.”
“응?”
“다들 보고 계시는데…….”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아나스타샤는 멋쩍게 웃으며 명함을 갈무리해 넣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한바탕 신나게 웃고는 슬슬 주변을 정리했다.
알렉산드라가 마지막으로 회의를 끝마쳤다.
“흠, 흠. 회의 마치겠습니다. 다들 다음 주에 보죠.”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했어요.”
우리 세 명은 맨손으로, 스푸마토 콰르텟의 멤버들은 악기 가방을 들고 연습실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걷고 있는데 게오르기가 내 옆으로 성큼 다가오더니 물었다.
“여기는 어떻게 왔어요? 차로 데려다줄까요? 저랑 카일은 자차로 와서 자리가 남는데.”
오늘 좋게 만났는데 끝까지 호의를 베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겐 이미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아, 괜찮아요. 저도 차로 와서.”
“그래요? 부모님?”
“아뇨 아버지는 바쁘셔서 경호원들이.”
“아, 경호원?”
평범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는 곧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흔들었다.
“아무튼, 그럼 다음에 봅시다. 아, 맞아. 아나스타샤. 전화번호 찍어 주시죠. 퀸텟 리허설 날짜 잡아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어요.”
두 사람이 전화번호를 교환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우린 헤어졌다.
빅토르와 소로킨은 다른 곳에 가 있는 듯했다. 전화로 빅토르를 호출하자 그는 2분만 기다리면 준비하겠다고 답했다.
잠시 빅토르를 기다리면서 우리는 나란히 담벼락에 서 있었다.
“…….”
며칠 후 만나면 아나스타샤와 콰르텟은 얼마나 강한 퀸텟으로 성장해 있을까? 정말 나도 에르네스트와 방비를 철저히 해야겠단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의 표정은 약간 미묘했다. 무언가 고민이 있는 듯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숙인 모습이었다. 난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나 싶어 그녀를 불렀다.
“아나스타샤?”
“응? 왜?”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으시나요?”
설마 없겠지 하면서 물어본 것이었는데, 아나스타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와 에르네스트를 이어서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특별한 통찰과 심증이 깃든 목소리로 물었다.
“난 어쩐지 너희들 덕분에 끼게 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예!?”
갑자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난 깜짝 놀라 그녀에게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직접 선생님에게 들으신 것이잖아요?”
“응, 그렇지. 그런데…….”
“그럼 자신 없는 말씀 마세요. 아까 전 멘델스존 연주로 충분히 다 보여 주셔 놓고는 왜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그러네.”
콰르텟에게 완벽하게 인정받은 그녀가 갑자기 심란해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설마 회의 초반에 알렉산드라가 본래 이 음악회가 나와 에르네스트를 위한 특집이었다고 말했던 것 때문에? 하지만 그건 우리 두 사람이 섭외될 때의 초안일 뿐이었다. 초안은 언제든 바뀌기 마련이고, 아나스타샤를 포함한 기획으로 바뀐 건 분명 연주회의 완성도를 끌어 올리기 위한 변경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어느 정도 납득했는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시선을 슥 돌려선 에르네스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 거 아니겠지? 에르네스트?”
에르네스트는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라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는데, 아니야.”
“응. 알았어.”
그 단호함은 위로가 되어 주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는 복잡했던 마음은 놓아 버리겠다는 듯 가볍게 웃더니 발끝으로 땅을 톡톡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