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6화
오후의 중앙음악학교엔 수많은 소리들이 공존한다.
와르르 쏟아 내리는 듯한 피아노의 소리, 가느다랗게 자아내는 바이올린의 소리, 중후하게 깔리는 첼로의 소리.
그런 기악들의 소리 외에도 성악 특유의 긴 호흡이나 친구들을 찾아 소리치는 음성 등도 여기저기에 섞여 있었다.
이 울림들은 복잡하게 엉키며 교내 벽 곳곳에 스며든다. 이 학교는 울림을 먹으며 유지되고 있다. 좋은 울림은 학교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왔다. 에르네스트는 그 사실을 지난 10년간 봐 왔으며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그에게 향하는 울림 또한 있었다.
“안녕하세요! 에르네스트 선배.”
“안녕.”
오다가다 몇 번 보긴 했는데 이름은 모르는 여학생이었다. 6학년이었던가? 그래도 피아노과 후배인 건 틀림없어서 에르네스트는 웃으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밝게 웃으며 다가온 그녀가 붙임성 좋게 물었다.
“연습하러 가세요?”
“응. 너는?”
“저도요. 이번에 받은 과제곡이 큰일이에요…….”
그녀는 발걸음에 맞추며 묻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하나둘 꺼내 놓았다. 반응하기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어서 에르네스트는 적당히 이야기를 받아 주었다.
그렇게 몇 걸음 정도 걸었을 때, 문득 생각났다는 듯 그녀가 넌지시 말했다.
“그런데 선배.”
“응.”
“선배 많이 부드러워지셨네요. 아세요?”
“무슨 말이야 그게?”
난생처음 그런 말을 들어 보는 에르네스트는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지금도 이렇게 적당히 대하고 있는데, 뭘 보고 그렇게 판단하는지 궁금했다.
“어…… 뭐라고 할까. 조금 더 인사하기 편해졌다고 해야 할까요?”
전혀 객관적이지도 않고 이해도 잘 안 가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게 정확한 진실이라는 것을 에르네스트는 바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가오는 사람들을 특별히 냉대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친근하게 인사하는 사람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간혹 있더라도 연주회 축하 등의 특정한 인사말과 목적을 두고 말을 걸어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근래 들어선 복도를 걷고 있기만 해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알은체하며 인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주변의 변화를 체감하지 못한 건 아닌지라 그도 나름대로 이유를 생각해 보긴 했다. 하지만 이유라곤 단 하나뿐이다. 타티아나와 친하게 되면서부터였다.
모두에게 친절한 그녀와 같이 있는 걸 보며 주변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건지, 아니면 그 친절함에 영향을 받아서 에르네스트의 본인이 바뀐 것인지.
혹은 둘 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든 별 상관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이 또한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옆에서 에르네스트의 눈치를 보며 옹알거리던 여학생은 괜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라는 듯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좋은 의미예요. 좋은 의미!”
“그럼 그냥 칭찬으로 들으면 되는 거지?”
“물론이죠.”
오해의 여지 없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모습에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잠깐 복도를 걷는 사이 이루어진 대화는 계단을 마주하면서 끝나게 되었다.
“아, 전 이쪽이에요. 이만 가 볼게요.”
“그래.”
무뚝뚝하게 후배를 보내려던 에르네스트는 멈칫했다. 워낙 무뚝뚝한 구세프 선생님에게 교육을 받다 보니 그 말투도 많이 닮은 부분이 있긴 했지만, 지금은 한마디쯤 덧붙여도 될 것 같다.
“연습 잘 해.”
“그, 고맙습니다! 좋은 오후 되세요!”
깜짝 놀란 눈을 하던 여학생은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러고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어떤 시선으로 학교와 학생들을 바라보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까진 알 수 없었던 부분들도 그녀와 지낸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차 알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도 별일 없이 시간이 흘러 2년을 더 보내고, 모스크바 음악원에 같이 진학할 수 있다면 보다 많은 걸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두서없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던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젓고는 듀엣 연습실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그런 희망적인 상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에겐 타티아나와 함께 음악원에 가기 전에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여 이겨 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그건 단지 같은 장소에 간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선 에르네스트는 가방에서 오선지 노트와 펜만 꺼내곤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는 어떤 특정한 곡을 연습하는 대신 그대로 피아노 건반을 위아래로 오르내리며 테크닉 연습만 가볍게 마치고는 건반 대신 펜으로 손을 뻗었다.
“여기부터…….”
에르네스트는 머릿속에 있는 울림들을 펜을 통해 기록하기 시작했다.
펜이 오선지 위를 달린다. 그만이 알아볼 수 있는 간략한 음표와 필기, 기호들이 순식간에 빈 공간을 채워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펜으로 미처 한 번에 옮겨 내기 어려운 장대한 화음이 등장하면 곧바로 건반으로 향했다. 양손이 건반을 동시에 짓누르고, 연타하고, 흘려보내면서 정확하게 음악을 재생한다. 그렇게 현실에 재현해 낸 음악은 형태를 지니고 귀에 다시 파고들었고, 구체화된 음형을 에르네스트는 다시 펜으로 기록했다.
때론 머리로 생각하는 화음은 3개였는데 손이 본능적으로 하나의 음을 더 짚기도 했다. 그리고 그럴 때면 백이면 백 피아니스트적 감각에 따라 이루어 낸 화음이 훨씬 더 완성도 있게 들렸다.
에르네스트는 작곡을 하면서 이론에만 집착하지 않았다. 숙련된 피아니스트로서 단련된 직감과 본능 또한 그의 강력한 무기 중 하나였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능과 기술을 사용하는 데에 머뭇거리지 않았다. 지금은 쓸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써야 할 때였다.
“…….”
쇼팽 콩쿠르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동시 참가, 학교 일정, 연주회 일정, 거기에다가 그가 고집을 부려 진행하기로 한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작곡까지.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진행하면서도 그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이 중요했다. 에르네스트는 스스로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야 하는지에 대해 조금 의구심이 들 때도 있었지만, 결코 멈추지 않았다.
타티아나와 나란히 하려면 연주자로서만 뛰어나서 되는 것이 아니다.
여러 번 한계와 마주하고 또 그것을 초월하면서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곳에 도달한 그녀는 이미 상당 부분 특별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단지 인간적으로 끌리는 것이라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에르네스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자신의 음악이 이미 타티아나에게 도취되어 있음을 무시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 역시 한계와 마주해 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세대 최고로 일컬어지는 그의 재능은 한계라 할 수 있는 곳까지 가는 데에도 굉장히 어려웠다. 하지만 여러 가지를 병행하면서 그는 하루하루 새 풍경을 개척해 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이 걷는 길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하는 일이 틀리진 않았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이 곡엔 그가 타티아나로부터 받는 영향을 다시 체크하고 작곡가로서 한계를 테스트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아나스타샤를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아직 아나스타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진 모르지만, 에르네스트는 적어도 그녀를 같은 무대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아나스타샤는 올라올 피아니스트다. 그녀는 에르네스트와 공정한 경쟁자가 되고 싶어 했고, 충분히 그럴만한 의지와 재능 그리고 노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과 상황에만 맡기다 보면 결국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망가지고 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에르네스트는 오랜 친구를 멀리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아나스타샤와 반목한다면 제일 슬퍼할 사람은 그가 아니라 타티아나였다.
어쩌면 이미 다가오고 있을지도 모르는 나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에르네스트는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아나스타샤를 추천하여 연주회에 참가시키고,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이 없다면 직접 쓰는 한이 있더라도 해 보자고 제안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내가 이렇게 머리 아픈 걸 네가 알기는 할까. 갑자기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에르네스트는 곧 쓸데없는 생각을 지워 버렸다.
지금은 모르는 편이 나았다.
에르네스트는 저번 회의 때 아나스타샤가 의심스러워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속으론 흠칫 놀랐지만 태연하게 대답하니 넘어갈 수 있었는데, 그는 앞으로도 그녀가 모르고 넘어가기만 해 준다면 결국 모든 것이 좋게 될 것이란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지금은 설명해 줄 수 없는 부분까지 에르네스트는 조금 멋대로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서 이 일이 틀렸는지 옳았는지도 잘 판단하기 어려웠지만…… 이미 멈출 수 있는 단계는 한참이나 지나가 있었다.
‘할 일이 정해져 있으니까 좋네.’
잠깐 머릿속에 든 복잡한 생각들은 악보를 마주하고 건반을 누르니 순식간에 쓸려 내려갔다. 에르네스트는 다시 음악에 집중했다. 피아노 세 대의 화성을 살리려고 하니 한 구간을 작곡하는 데에도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정말 많았다.
쉽게 하자면 퍼스트 피아노에 모든 것을 실어 주고 나머지 피아노들을 들러리로 세우면 될 일이겠지만, 그렇게 하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한 일이 된다. 때문에 그는 모든 집중을 쏟아부어서 세 개의 선율이 어떻게 조화되어야 할지 연구하고 그 결과를 적어 내려갔다.
“라장조는 별로인가?”
목소리를 내어 중얼거려 봤더니 진짜 별로인 것 같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금 프레이즈에서 이어 나간 구간의 조성을 다시 바꿔 보고 선율들을 이어 붙였다. 조금 나아졌다. 그는 빠르게 음표들을 더 다듬어 놓고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이틀 동안 그는 이미 도입부의 작곡을 거의 끝마쳤지만 이 속도대로라면 빠듯하다. 조금 더 속도를 내야 할 때였다.
“있나요? 에르네스트?”
그때, 연습실 문이 살며시 열리며 한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멈춰 선 에르네스트가 돌아보았더니 눈을 마주치고는 환하게 웃는다.
주저하지 않고 연습실 안으로 훌쩍 들어온 타티아나는 자연스럽게 가방을 내려놓고는 그에게 물었다.
“저 왔어요. 연습하고 계셨나요?”
“지금은 작곡.”
“아하.”
그녀는 손뼉을 짝 쳤지만 이내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연주회에 새 곡을 작곡해서 초연하겠다는 것에 대해 타티아나는 처음부터 약간 부정적인 의견이었다.
“잘 되고 계시나요……?”
“도입부는 끝냈어. 지금은 그다음을…….”
“앞부분을 벌써 쓰셨나요!?”
하지만 그건 에르네스트의 음악을 믿지 못하겠단 의미가 아니었다. 초반부이긴 하지만 결과물이 조금 나와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녀의 눈빛이 돌변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조심스레 물어온다.
“저기, 부탁하나 해도 되나요?”
안 들어도 무슨 부탁인지 알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소리 내어 웃어 버릴 뻔했다가, 간신히 추스르고는 먼저 말했다.
“내가 먼저 해도 돼?”
“……예?”
“지금까지 작업한 부분의 확인을 도와줄 피아니스트가 한 명 필요해. 여기 앞부분만 같이 좀 쳐 봤으면 좋겠는데.”
타티아나는 이렇게 기뻐할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좋아하면서 빠르게 대답했다.
“제가 적격이네요! 아시죠? 제가 초견연주를 잘 한다는 것?”
“알지.”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끄덕이니 그녀는 당장 피아노 앞에 앉고 싶어진 것 같았다. 원래 듀엣 연습을 하려고 이 연습실을 빌린 것이라서 바로 해도 상관없긴 하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이틀간 빠르게 써 내린 악보를 보고는 약간 난처해졌다. 말을 하긴 했는데 이거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음, 악보가…… 너무 대충 써서 알아보기 힘들 텐데. 일단 다시 적당히 사보를 해서…….”
“보여 주세요.”
어느새 다가온 타티아나는 보면대 위에 있는 노트를 가져가더니 휙휙 넘기며 보기 시작했다.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얼마나 달필인지 잘 알았기에 자신이 신경 쓰지 않고 휘갈긴 글씨들이 조금 창피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잘 좀 쓸 걸 그랬다.
하지만 노트를 보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타티아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걸로 괜찮은데요?”
“……읽혀?”
“예. 괜찮아요. 에르네스트가 퍼스트, 제가 세컨드를 맡고…… 서드는 없으니까 저희 중 한 명이 선율만 붙여 보면 되겠어요. 지금 해 볼까요?”
연습도 없이 바로 연주해 보자는 그녀를 보면서 문득 어지간한 곡들은 초견으로 완벽하게 모두 연주해 버렸다는 프란츠 리스트의 일화가 떠오를 정도였다.
그녀가 무서울 정도로 초견에 강하다는 건 알겠지만, 지금 보니 한 번 읽은 것을 그대로 머릿속으로 재생하고는 외워 버렸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실력은 처음 봤을 때도 놀라웠지만 지금은 정말 굉장한 수준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도달해야 할 소녀의 미소를 보며 마주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