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37화 (737/1,277)

##  737화

난 고개를 들자마자 에르네스트에게 연주를 제안했다.

초견과 시창에 익숙한 연주자들은 악보를 보자마자 머릿속으로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때문에 난 악보를 보자마자 알았다.

이 곡은 정말 연주회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으로서 완벽한 곡이 될 것이란 걸.

바로 건반으로 연주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보면대 위에 악보를 올려놓자 그가 물었다.

“연습 안 해 봐도 괜찮겠어?”

시간을 잠시 줄 테니 몇 번 연습해 본 다음에 같이 해도 괜찮지 않냐는 의미였다.

사실 그의 말대로 하는 편이 나았다. 완전히 처음 보는 곡을 보자마자 연주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에르네스트가 작곡한 이 곡은 세 대의 피아노를 엮어 놓은 곡이라서 기교적으로도 까다로웠기에 집중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곧바로 엉망이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난 지금 이 분위기에서 작곡가 본인의 생생한 해석과 함께 살아 있는 음악을 즐겨 보고 싶었다.

“세컨드는 시작할 때 부담이 덜하게 되어 있네요. 천천히 해 보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시간을 줘도 되는데. 그렇게 말하니까 그냥 하고 싶네.”

“이것도 연습이지 않겠어요?”

“옛날에 리스트가 초견에 그렇게 강했었다지.”

프란츠 리스트는 가히 초인적인 초견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에드바르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총보를 보자마자 피아노와 바이올린 파트를 한 번에 연주했다는 건 정말 유명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독보적인 실력으로 유명세를 탄 리스트만큼은 아니더라도, 당대 유명한 연주자들에게 따라붙는 이런저런 이야기 중 처음 본 곡을 한 번에 초견으로 연주했다는 일화는 자주 들려오는 것에 속했다.

“프란츠 리스트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음악가들이 초견에 무척이나 능했죠.”

“그 시절엔 나오는 곡들이 모두 신곡이었을 테니까.”

“그렇네요.”

이미 여러 음악학자들에 의해 정립된 클래식 음악이란 체계를 두고 깊이 천착하는 우리와 달리, 당시의 클래식은 팝 음악으로서 매일같이 새 곡이 나오곤 했다. 한 곡을 배우는 데에 몇 달씩 걸린다면 그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는 시대였다.

난 열린 창문 너머로 그때에도 똑같았을 하늘을 바라보며 물었다.

“200년 전에도 이러했을까요?”

특이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피아노 연주자들이 세 명 이상 무대에 설 일은 없다는 주장을 깨기 위해 직접 새로운 곡을 쓴 작곡가, 그리고 곁에서 작곡에 도움을 주기 위해 피아노 소리를 보태는 또 다른 연주자.

주어진 시간도 짧고 연습할 시간도 별로 없다. 그러나 음악에 집중하며 도전하려는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시대는 다르지만 음악이 막 태어나려는 순간을 함께 향유한다는 공통점을 느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고양된다.

웃으며 돌아보니 에르네스트는 잠시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다가 피아노를 툭 치며 말했다.

“그땐 이렇게 좋은 피아노는 없었을걸?”

“맞아요.”

수백 년어치의 개량이 응축되어 있는 현대의 피아노들은 사람이 수작업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복잡한 물건에 속한다.

그렇게 피아노는 좋아졌는데 연주자의 수준이 좋아지긴커녕 떨어진다면 정말 우스운 일이다.

“그러니 좋은 피아노를 가진 저희가 그때 분들보다 못할 순 없죠. 그렇지 않나요?”

“그래도 그 악보를 한 번에 읽는다는 건 대단한 거야.”

“에르네스트도 초견 잘 하시잖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 글씨가 엉망이잖아.”

“예?”

프란츠 리스트와 초견 이야기하던 거 아니었나요? 난 그의 얼굴과 악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보지 말라는 듯 시선을 피해 버렸다.

악보를 보니 확실히 그리 신경 써서 잘 쓴 글씨는 아니었다. 초고는 선생님에게 보여 드릴 것도 아니니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선율과 생각들을 펜으로 옮겨 내느라 혼자만 알아볼 수 있도록 최대한 빠르게 휘갈긴 느낌이다.

그래도 난 그의 악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 어렵진 않았는데…… 에르네스트는 부끄러운가 보다.

“아하하하, 혹시 신경 쓰고 계시나요?”

“약간.”

“괜찮아요. 평소완 달리 빠르게 작곡하느라 이렇게 된 것 같네요. 그래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고…….”

다시 악보를 슥 훑어보니 익숙한 기호도 곳곳에 보였다. 난 밝게 웃으며 물었다.

“이 기호, 아직 사용하고 계시네요?”

“아.”

그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소리를 내며 다시 내 쪽을 바라보더니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로열티 더 줘야 하는 건가……?”

“더 주실 건가요?”

“……네가 달라면.”

진짜 무언가 해 달라고 하면 뭐든 하려는 기색이었다. 이전에 처음 로열티 이야기를 했을 때도 그는 뭐든 바라는 걸 말해 보라 했었다. 난 조금 무리해서 그의 곡을 헌정해 달라고 했었고.

곡을 헌정받아 초연하기까지 모든 것을 난 기적과도 같이 생각했다.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후후, 괜찮아요. 저번에 받은 것으로 평생분 로열티는 다 받았어요.”

어차피 이젠 나보다 에르네스트가 훨씬 더 기호를 사용할 일도 많을 것 같고, 난 그가 이렇게 유용하게 써 주는 편이 훨씬 더 좋았다.

그런데 이제 평생 로열티는 필요 없다는 말에 에르네스트는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발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정도야?”

“그 정도예요.”

“……그건 그 기호에만 한정하는 거지?”

“?”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받은 곡이 너무 커 저울이 완전히 끝까지 쏠려 있으니까 그가 더 무언가 얹어 달라고 한다면 충분히 얹어 줄 의향이 있었지만, 내겐 지금 그에게 줄 만한 게 별로 없었다.

“그렇죠? 그리고 전 상표권이나 특허권을 더 가지고 있지도 않고요. 무언가 있나요?”

“그런 건 아니고. 그냥…….”

할 말은 곧잘 하는 편인 그도 신중해질 땐 한없이 신중해진다. 그러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됐어. 그냥 해 보자. 괜찮다고 했지?”

로열티를 너무 과하게 받은 것에 대해 생각하던 나는 지금 그의 작곡을 도와주고 함께 연습하는 것도 어쩌면 그 보답이 될 수 있겠다고 느꼈다. 더 이상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물론이에요.”

“시작할게. 내 템포에 따라오면 돼.”

에르네스트는 어깨를 살짝 돌리며 몸을 풀더니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난 그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조금 이완되어 있던 집중력을 다시 끌어 올렸다. 빠르게 악보를 읽어 내며 내가 들어가서 낚아채야 할 역할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아직까지 악보 속에만 있었던 곡을 이끌어 낸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음악을 분명한 형태로 재현시키는 일은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

그가 만든 곡의 도입부는 예상 그 이상으로 뛰어났다.

일반적으로 셋 중에 한 명에게 주연이라 할 수 있는 선율을 맡기기 마련인데, 에르네스트는 정말 공평하게 세 명이 연주에 임할 수 있도록 해 두었다.

피아노가 두 대뿐이라 에르네스트가 퍼스트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서드는 선율만 이어붙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세 대의 피아노가 첨예하게 대립하거나 조화롭게 뻗어 나가는 음악이 섬세하고 화려하게 드러났다.

그가 처음 작곡했던 곡을 초연했던 연주자로서, 난 지금도 발전이 계속되고 있음을 확신했다.

에르네스트는 무언가에 예속되거나 순종하지 않는다. 러시아적 색채를 추구하면서도 라흐마니노프나 스크리아빈 등 그가 자주 연주하는 작곡가들의 화법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 점이 그 증거였다.

그의 독자적인 해석과 음악성 그리고 진지함이 빛나는 멋진 곡이었다. 이 음악이 무대에서 연주되는 것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마음에 들어요.”

좋고 나쁘고를 따지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난 이 음악이 좋았다. 에르네스트가 앞으로도 좋은 음악가가 되어 주리란 걸 다시 한번 확인한 것 같아서.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됐어.”

“후후, 그게 아니잖아요? 무대에 올려야 하는 곡이니 청중들이 좋아해 주셔야죠.”

“네 마음에 든다면 다른 사람들도 좋아할 거야.”

난 자신의 기준과 사람들이 평에서 종종 괴리가 생긴다는 걸 알고 있지만, 에르네스트의 말을 들으니 그런 걱정은 별로 들지 않았다.

악보를 다시 챙긴 후 잘 정리한 나는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앉아 있는 그에게 악보를 돌려주며 칭찬해 주었다.

“겨우 며칠 만에 어떻게 이렇게…… 정말 대단하세요.”

“아직 갈 길이 멀어.”

악보를 받은 그는 가볍게 말했지만 그 길이 쉽지 않으리란 것은 알 것 같았다.

일어서지 않고 앉은 채로 날 올려다보는 그는 묘하게 지쳐 보인다. 아마 실제로는 내가 보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겠지.

“그런데 정말 무리하고 계시진 않나요?”

이렇게 물어봤자 의미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난 걱정되는 마음에 어쩔 수 없이 물어보았다. 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왜, 그렇게 보여?”

“그야…… 맡고 계신 일이 너무 많으니까…….”

정말 너무 많다.

그는 사실상 음악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어느 하나라도 허투로 한다면 그만 포기할 수 있게 되겠지만, 그의 천재적인 재능과 노력은 그 전부를 가능케 만들었다.

하지만 가능하다고 해서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다. 하루 24시간을 사는 인간으로선 잘 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을 정도일 테니까.

그렇지만 나도 잘 안다. 그만둘 수 없다는 걸.

절대 힘들다고 그만둘 수 없다. 쓰러져 기절하기 직전까지 음악에 매달려 있고 싶어진다. 난 그게 어떤 기분인지 잘 안다.

심지어 그가 보고 있는 세상에선 훨씬 더 손에 잡힐 듯 아른거리는 게 많을 테니까, 내가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안 되겠지.

“앗.”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 쪽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난 얼른 손을 거두었다. 지쳐 보이는 눈가로 다가가던 손끝이 허공에 멈춰 섰다.

에르네스트는 뭐 하고 있냐는 듯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난 얼른 얼버무렸다.

“눈 밑에 무언가 묻으신 것 같아서.”

“……또 생겼나 보네.”

“잠은 충분히 주무시는 게 좋아요. 어렵다는 건 알지만.”

“알았어…….”

잠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문득 졸려졌는지 그는 중얼거리듯 말을 맺었다. 난 무언가 도울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한 가지 떠올려 냈다.

“아, 맞아. 제가 도와 드릴까요?”

“뭘?”

“이렇게요.”

의아해하는 에르네스트의 등 뒤로 돌아간 나는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았다. 깜짝 놀라는 감정이 어깨에서 느껴졌다.

에르네스트가 휙 뒤돌아보며 물었다.

“갑자기 뭐, 뭐야?”

“어깨가 뭉치진 않으셨나요? 제가 풀어 드릴게요.”

작년까지만 해도 심신의 괴리로 인해 온몸에 저림과 감각의 부자유 등을 느껴 온 나는 마사지를 자주 받곤 했다. 덕분에 나는 통증을 경감시켜 주는 방법 또한 여럿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내 손에서 빠져나가더니 일어나버렸다. 받기 싫다는 표현이었다.

시무룩해진 난 그에게 물었다.

“왜 피하시나요?”

“왜 뒤에서 갑자기 그러는데?”

“제가 뒤에서 목이라도 조를까 봐요?”

“……너 가끔 무서운 말 잘 하는 거 알아?”

“그게, 책 때문에…….”

“무슨 책을 보길래?”

내 잘못은 아니다. 얼마 전에 본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이라는 소설에서 여주인공이 조카를 교살하는 장면이 나와서 나도 모르게 이상한 말이 나온 것 같다.

변명 같은 이야기를 더 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아쉬움을 숨길 생각은 없었다.

“알았어요.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앞으로도 잘 알아 둘게요.”

“아니…….”

그는 조금 난감해하더니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어깨 안 뭉쳤어. 멀쩡해. 그러니 괜한 힘 뺄 필요 없다는 거지. 그…… 손아귀에 힘이 있으면 피아노에 쏟는 게 낫잖아?”

“저보다 더하네요, 에르네스트는.”

늘 다른 무엇보다 피아노에 집중하는 삶을 견지하는 건 나도 심한 편이었지만 그 역시 만만찮았다.

이렇게 또 공통점을 확인하고 나니 웃음이 나왔다.

“후후.”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러 가지 노력하면서 지쳐 있는 건 맞지만 그는 똑똑하고 자기관리도 잘 하는 사람이니까 나보단 훨씬 나을 것이다. 그렇게 믿기로 하고, 난 곁에서 편의를 봐 줄 수 있는 부분들만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원래는 오늘 듀엣 곡 정하려 했었는데…… 지금 작곡하시는 파트를 보니 그 곡에 집중하시는 게 나을 것 같네요. 그렇죠?”

“그런 것까지 알았어?”

“당연하죠.”

같이 연주해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얼마나 집중하여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 그런데 지금 다른 곡들을 늘어놓고 연습하면서 또 부담을 기울인다면 집중도 분산되고 일도 힘들어질 것이다.

시간이 많진 않지만 조금 미뤄도 상관없었다. 그도 며칠이면 아마 준비가 될 테니까.

난 뒤로 물러나선 가방을 챙겨 들었다.

“오늘 전 이만 가 볼게요. 내일 더 이야기하도록 해요.”

“……고마워.”

“너무 오래 계시진 마세요?”

“노력해 볼게.”

그가 말하는 것이 어떤 느낌으로 하는 말인지 너무나 잘 와닿아서, 난 다시 한번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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