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8화
타티아나의 배려로 듀엣 연습은 하루 건너뛰고, 에르네스트는 계속해서 작곡에 집중했다. 집에서 해도 되는 일이지만 조용한 연습실에서 집중하는 것은 능률에 확실한 도움이 되어 주었다.
고요 속에서 선율을 낚아채며 수백 번이나 건반과 펜을 왔다 갔다 한 그는 서서히 팔에 피로를 느꼈다. 건반만 치거나 펜만 쥐고 있었다면 몇 시간이 지나도 괜찮았겠지만, 번갈아 하려니 피로도가 만만찮게 높다.
“…….”
슬슬 여기까지 하고 나머진 집에서 할까.
2시간 정도 시간을 쏟아 만든 곡은 꽤 괜찮게 느껴졌다. 물끄러미 악보를 바라보던 에르네스트는 문득 타티아나가 곁에 있으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그녀라면 지금 바로 악보를 보며 그의 해석을 읽어내고 연주로 평가했을 테니까.
하지만 잠시 든 생각은 곧 에르네스트의 의지로 꾹꾹 눌러졌다.
이것도 일종의 의존에 가깝다. 그녀에게 영향을 받는 건 좋지만 적어도 수평적인 영향이 되어야 한다. 에르네스트는 근래 자주 했었던 생각을 되새기면서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건반 덮개를 닫고, 악보와 필기구를 정리한 그는 가방을 들고 연습실을 나섰다. 반으로 가도 할 건 딱히 없으니 이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계단을 막 내려간 그는 저쪽 복도에서 막 걸어오던 한 여학생을 발견했다. 그녀 역시 사람들 사이에서 에르네스트를 정확하게 발견하고는 눈을 마주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 갈 수 있을 리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가볍게 웃으며 아나스타샤에게 다가갔다.
“오후 일과 끝?”
“응. 너는?”
“나도.”
“집에 가니?”
“가야지.”
단조로운 대화가 몇 번 오갔다. 딱히 호들갑스럽게 할 이야기도 없고 두 사람 다 그럴 성격도 아니었다. 에르네스트가 다시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아나스타샤가 따라왔다.
자연스레 같이 하교하게 된 에르네스트는 문득 이상함을 느끼곤 다시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다른 애들은?”
“다른 애들?”
“발렌티나나, 타티아나.”
막상 물어보고 나서야 뭘 이런 것까지 묻는 건가 싶은 생각이 스스로도 들 정도였지만, 항상 같이 다니는 두 사람 없이 아나스타샤가 혼자 있으니 조금 궁금증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손끝으로 가방을 톡 치며 말했다.
“나 오늘 퀸텟 연습 있어서 나온 거거든. 그래서 따로 가기로 했어. 그 애들은 스터디룸에 있지 않을까?”
“아, 그래.”
“그런 넌?”
“나?”
무슨 소린가 싶어 되묻자 그녀는 지금 궁금해할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라는 듯 물었다.
“넌 타티아나랑 듀엣 연습 안 하고 뭐 해?”
두 사람의 듀엣은 기정사실로 정해져 있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아직 곡 선정과 연습이 전혀 되어 있지 않으니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준비해야만 했다.
학교에 듀엣 연습실이 없는 것도 아니고, 평소 같았으면 두 사람은 오늘 하루 만에 어지간한 일들은 거의 다 마무리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오늘 하려고 했었는데, 타티아나가 다음에 하자고 해서.”
“……그럴 리가?”
“그 애 탓은 아니야. 오늘 내가 작곡으로 머리가 조금 복잡했었거든. 그래서…….”
타티아나가 연습을 미루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보던 아나스타샤는 곧 이어진 에르네스트의 설명에 눈을 가늘게 떴다.
옆에서 그녀의 시선을 느낀 에르네스트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비타민이라도 먹어야 하나?”
“그 애가 그랬니? 피곤해 보인다고.”
“아니 뭐…….”
약한 모습을 보일 생각은 일절 없었다. 하지만 추리력이 탁월한 아나스타샤는 이미 상황을 어느 정도 다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피곤하다고 어필하는 꼴사나운 상황 같단 생각이 든 에르네스트는 얼른 다른 변명을 떠올려 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확신을 가진 아나스타샤는 그의 앞으로 나아가 길을 막더니 뒤돌아섰다.
“여기 좀 볼래?”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한마디 할까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의 눈 밑에 생긴 다크서클을 보더니 핀잔을 주었다.
“어우, 눈 좀 봐. 성격 진짜 나빠 보여.”
“……이렇게 생긴 걸 어떻게 하라고?”
“아니야. 너 원래 안 그랬어. 맨날 눈에 힘주고 다니니 이렇게 된 거지.”
“네가 뭘 안다고…….”
시큰둥하게 받아치려고 했지만 어려서부터 봐 온 아나스타샤에게 그런 말을 해 봐야 온갖 과거 이야기만 나올 것이 분명했다.
결국 이기지 못할 싸움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내가 그렇게 힘주고 다니냐?”
“그렇잖니? 이것저것 뭐든지 다 하려 하고.”
“…….”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걱정될 정도로 하진 않아야지.”
의도찮게 저의가 드러나듯 아나스타샤의 목소리가 묘하게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툭하면 에르네스트를 가지고 놀거나 장난을 치려고 하긴 했지만, 진심으로 그를 싫어하진 않는다. 에르네스트는 그 점만큼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건 그 역시 아나스타샤를 싫어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걱정돼?”
“뭐니? 내가 방금 그 말 잠깐 했다고 지금…….”
“……됐다.”
혹시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나 싶어 물어봤더니 아나스타샤는 대번에 정색하며 그를 놀리려 들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에르네스트는 말을 딱 자르고는 그냥 갈 길 가기로 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길을 비켜 주지 않고 자신의 가방 안을 뒤적이며 말했다.
“다크서클에 좋은 거라도 발라 줄까?”
“아니.”
“별건 아니고 그냥 선케어 제품인데?”
“괜찮다니까 그러네…….”
아나스타샤가 무언가 꺼내기 전에 에르네스트는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연습실에서 타티아나가 그를 내려다보던 기억이 떠올랐다. 눈을 마주하던 그녀는 순간적으로 에르네스트의 얼굴에 손을 뻗고 있었다.
눈을 어떻게 하긴 해야겠지만 지금 아나스타샤에게 부탁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에르네스트가 무시하고 지나가 버리자 아나스타샤도 별수 없는지 그를 따라왔다.
계단을 딛는 발소리만이 이어졌다. 교내는 여러 소리로 가득했지만 에르네스트는 지금 아나스타샤와 이루는 두 명 분의 소리에만 집중했다.
이윽고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아나스타샤였다.
“에르네스트.”
“응.”
“걱정은 그 애가 정말 많이 해.”
“……뭐?”
“타티아나 말야.”
갑자기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터라 에르네스트는 순간 발을 멈칫했다. 계단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그가 돌아보자 아나스타샤는 이미 멈춰 서서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늘 그랬다. 타티아나에 대한 일이라면 자신의 일보다 훨씬 더 진지해진다.
“그 애는 우리에게 걱정 어린 말을 하는 것도 어려워해. 정작 자신이 체력을 도외시하고 음악을 하다가 쓰러진 경우도 몇 번 있었으니까 말야. 이해한다는 거지.”
“…….”
“참 고지식하지?”
타티아나가 평소에 말이 많고 아나스타샤에게 매달리는 성격이었다면 이렇게 진지하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침묵으로 인내하며 홀로 생각하고 노력하는 타티아나를, 통찰이 강한 아나스타샤는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듯했다.
물론 에르네스트도 지금 그녀가 하는 말을 모르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그를 걱정하면서도 음악에 집중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다는 걸 이해한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미친 듯이 몰두해 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하지만 말은 않아도 기색을 보면 알 수 있잖니. 안절부절못하는 걸.”
“알아.”
그러나 이해한다고 해서 걱정을 놓고 마음을 편히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건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이었는데, 심지어 타티아나는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부분이 약간 있어서 곧잘 불안해하곤 했다.
요즈음은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그녀를 자극하지 말자는 건 친구들 사이에 세워져 있는 암묵적인 룰과 다름없었다.
아나스타샤는 다시 한번 되새겨 주겠다는 듯 똑똑히 말했다.
“그러니까 적당히 하라곤 안 할게. 대신 그 애 앞에서만큼은 똑바로 해.”
자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하는 말이 참 아나스타샤다웠다.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말이 심하네? 아나스타샤.”
“난 네가 할 만하니까 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
약간의 믿음이 담긴 말이 돌아왔다. 그녀는 에르네스트의 음악적 재능이 여러 방면에 걸쳐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가능하다고 판단했으니 한다. 그뿐이라는 걸 아나스타샤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아도 이해하는 듯했다.
하지만 예리한 그녀는 에르네스트가 음악 외의 것에도 신경을 쏟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눈치채고 있었다.
“이것저것 다 말이지.”
“…….”
“정말 할 만한 것 맞니?”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살짝 떠본다는 것을 느꼈다. 여기에서 그가 요즈음 품고 있는 고민이나 그녀에 대한 의문 등을 이야기한다면 아나스타샤는 그가 왜 사서 고생을 자처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연주회를 앞두고 괜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맞겠지.”
“흐응.”
아나스타샤는 콧소리를 내며 에르네스트를 이리저리 뜯어보더니 한 발자국 다가왔다.
아직도 학교에선 아나스타샤를 무서워하는 학생들이 많다. 그녀가 복도를 걸으면 피하는 학생들이 있을 정도였다. 외견은 화려하지만 마치 맹수와도 닮아 있는 눈빛을 한 아나스타샤는 쉽게 마주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지금 역시 그랬다. 오랜 친구라 하더라도 상관없다는 듯 아나스타샤는 섬뜩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것만 알아 둬. 난 타티아나와 달라. 만약 네가 작곡에 실패하고, 연주회도 망치고, 동시 참가한 콩쿠르의 결과도 엉망인 날엔 평생 놀림감이 될 각오 정돈 하는 게 좋을 거야. 알겠니?”
이것저것 벌려 놓은 것들을 똑바로 수습하지 못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엄포였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에르네스트의 귀엔 그 말이 마치 응원처럼 들렸다.
에르네스트는 당당하게 받아치지도, 화를 내지도 않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살벌하게 이야기 하는데도 평생 놀릴 구실 만들어 주지 말고 똑바로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건 독설의 달인인 구세프 선생님의 지도를 오래 받은 덕분일까.
어쨌든 에르네스트의 강한 멘탈은 그 정도로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말을 그냥 흘려듣지도 않았다.
정말 진행 중인 어느 하나라도 허술하게 되는 날엔 그의 오만함은 온 세상으로부터 지탄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 원래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긴 하지만, 분명 타티아나도 슬퍼할 것이라 생각하니 제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다시 분명하게 생각해두면서 에르네스트는 농담조로 말했다.
“그땐 놀림감이 문제가 아니라 선생님이 날 죽일 걸.”
“아, 그런가?”
아나스타샤는 그제야 구세프 선생님도 만만찮은 사람이라는 걸 떠올린 듯했다. 그녀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아하핫, 그래, 그랬네. 살려면 열심히 해야겠다. 에르네스트.”
“살려고 열심히 하고 있어…….”
이번엔 농담이 아니라 솔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아나스타샤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