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9화
스푸마토 콰르텟의 제1 바이올린. 게오르기 보리소비치 케드로프는 멤버들과 함께 중앙음악학교 근처의 연습실로 향했다.
“시간에 맞춰 온대?”
“내가 데리러 가도 되는데. 어쩔까?”
살짝 들뜬 분위기. 평소 말이 많지 않은 멤버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말이 많았다.
그들은 콰르텟으로 5년 넘게 활동하면서 서로 눈빛만 봐도 서로의 생각을 알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때문에 음악 역시 마찬가지였다. 늘 하던 음악을 계속 하고, 레퍼토리가 바뀌더라도 평소 추구하던 방향성은 크게 바뀌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신선함보다는 완전무결성에 집중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원숙해진 음악집단의 행보였다.
하지만 이번에 퀸텟 멤버로 함께 하게 될 피아니스트의 실력은 이미 단단하게 굳어져 있던 그들의 음악에 다시 불을 붙여 놓았다.
“피아노 퀸텟은 우리도 오랜만이네.”
“정말. 요즘 며칠 동안 계속 퀸텟 레퍼토리만 반복해서 들었다니까? 그런데 듣다보니까 한 다섯 곡쯤 하고 싶더라.”
“난 일곱 곡.”
“어, 혹시 나랑 겹치는 것 있나?”
“드보르작?”
“나도!”
다리아와 카일이 숨이 넘어갈 듯 웃으며 이런저런 곡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아는 피아노 퀸텟은 모조리 다 꺼내 놓는 것 같았다.
마치 처음 만났을 때를 보는 것 같다. 다들 밤새워 콰르텟에 대해 이야기하며 즉석에서 수많은 곡들을 맞춰 보고, 첫 무대에 섰던 그때의 분위기. 그 흥미와 열렬함이 지금 다시 천천히 맴돌고 있었다.
“…….”
게오르기는 제1 바이올린이자 암묵적 리더로서 멤버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쟁쟁한 음악가들이 즐비한 모스크바에서, 그간 이 세 명과 함께 분명한 실력파로서 인정을 받고 콰르텟으로서 자긍심을 향상시켜 왔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고착을 가지고 왔고, 최근 들어선 약간의 매너리즘마저 느껴진다 싶기까지 했다.
어떻게든 타파해야겠다 생각해서 레퍼토리를 바꿔 보기도 하고 다른 연주자를 끼워 합주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피아노 퀸텟에선 쓴맛을 보기도 했었고. 때문에 차라리 변화 없이 이대로 쭉 가는 것이 안전하지 않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멤버들에겐 생활의 문제가 걸려 있기도 한 일이니.
그러나 한 명의 피아니스트가 단 4분 동안 보여 준 연주로 이렇게 간단히 해결될 줄은 몰랐다.
정말 까마득한 후배라 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였지만, 아나스타샤가 보여 주었던 실력은 충분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심지어 게오르기가 느끼기엔 아나스타샤는 본 실력을 제대로 보여 주지도 않았다.
“뭐든지 해 보면 알겠지.”
“그렇지?”
그들이 준비해야 할 피아노 퀸텟 음악은 두 곡에서 세 곡 남짓. 시간은 겨우 한 달밖에 없다. 레퍼토리에 퀸텟이 없는 건 아니지만 불완전하고, 아나스타샤는 아예 새로 보는 것이 대부분이겠지만 게오르기는 그녀라면 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을 느꼈다.
굳이 암보까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악보를 볼 수 있는 피아니스트는 정말 빠른 속도로 곡을 익힌다. 아나스타샤는 기억력도 굉장히 좋은 것 같으니 그리 걱정되지도 않았다.
겨우 하루 보고, 그것도 4분간 합주했던 16살짜리 연주자를 이렇게까지 믿어 본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나 타티아나처럼 검증되었다 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들보다, 게오르기는 아나스타샤가 마음에 들었다.
아나스타샤의 음악엔 무언가 갈구하는 정열이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게오르기의 콰르텟엔 그 불꽃이 필요했다. 그녀와 함께라면 무대도, 그리고 콰르텟의 쇄신도 모두 가능할 것 같았다.
게오르기와 멤버들이 그런 기대를 가지면서 악기를 점검하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연습실로 아나스타샤가 들어섰다. 첫인상으론 열여섯 살이라는 걸 아는데도 훤칠한 키에 시원시원한 언동으로 전혀 학생처럼 보이지 않았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교복 차림이다 보니 비로소 중앙음악학교 학생처럼 보였다.
하지만 교복을 입고 가방을 들고 있어도 아나스타샤는 성인 연주자 네 명 앞에서 전혀 위축되거나 어색해하지 않았다.
“레슨 끝나자마자 온다고 왔는데, 조금 늦었나 보네요. 미안해요.”
시간은 정시에 딱 맞추어 왔지만 이미 와 있는 콰르텟 멤버들을 보며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사과하고는 자연스레 비어 있는 자리로 향했다.
쿨한 태도였지만 너무 거리를 두지도 않고 적당히 선을 지킬 줄 아는 모습이었다. 콰르텟 멤버들은 모두 그녀를 반겼다.
“하나도 안 늦었어요. 어서 와요.”
“오늘 학교에서 안 힘들었어요?”
“교복 정말 예뻐요! 왜 나 때는 교복이 없었을까…….”
이런저런 인사가 오가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중앙음악학교엔 교복이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굉장히 신선해 보인다. 게오르기의 눈에는 음악 사관학교 같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다리아는 마냥 예쁘다며 칭찬일색이었다.
친목도 도모할 겸 잡담을 나누면서 차도 한 잔씩 마시다 보니 10분 정도 흘렀다. 그사이 아나스타샤는 같은 여성인 다리아와 많이 친해진 것 같았다.
게오르기는 슬슬 이쯤하면 괜찮겠다고 생각하며 이야기했다.
“우리 음악 이야기도 시작해 볼까?”
잡담으로 느슨해져 있던 분위기가 서서히 팽팽해졌다. 아나스타샤가 게오르기를 바라보았고 다리아는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솔렌과 카일은 찻잔에 남아 있던 것들을 한 입에 비워 버리곤 테이블 구석으로 치웠다.
프로 음악가들의 집중력은 무섭도록 날카로웠다. 게오르기는 흡족함을 느끼며 회의를 시작했다.
“오늘은 퀸텟을 몇 곡 꼽아 볼 예정이고, 레퍼런스들은 내가 준비해 왔으니까 모두 참가해서 의견이 있다면 바로바로 말해 줬으면 좋겠군.”
피아노 퀸텟이라는 구성만 덩그러니 놓아진 상태로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면 맨 처음 해야 할 건 당연히 곡을 선정하는 일이었다.
각 음악가들의 레퍼토리의 교집합을 확인하는 일은 연주를 해 보지 않아도 여러 가지를 알 수 있게 되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게오르기는 피아노 퀸텟 곡들의 리스트를 몇 개 정리하여 나열하고는 각각의 오디오 또한 준비했다. 만약 필요하다면 순서대로 하나하나 들어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가장 먼저 손을 들고 제안한 사람이 있었다. 아나스타샤였다.
“드보르작의 피아노 퀸텟 2번 어떨까요?”
“드보르작!?”
그 말에 곁에 있던 다리아와 카일이 그야말로 펄쩍 뛰며 놀랐다. 기겁한 목소리로 깜짝 놀란 아나스타샤가 눈을 깜빡이며 두 사람에게 물었다.
“진정하세요. 왜 그러세요?”
“왜, 왜 드보르작이죠?”
다리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까지 더듬거리며 아나스타샤에게 확인을 구했다.
그녀는 입술에 손가락을 대며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별 이유는 없어요. 집에서 스푸마토 콰르텟의 앨범을 쭉 듣다 보니 피아노 퀸텟으로는 드보르작을 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맙소사, 우리도 그 이야기 했었는데.”
“와, 진짜요?”
“그렇다니까요! 카일, 맞지? 응?”
“우연인지 인연인지 모르겠네 이것도.”
다리아가 호들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도 이해할 만했다. 단순히 운이 좋아 같은 곡을 찍었을진 모르겠지만 그 또한 연주자의 성향이 반영되는 것이라면, 이렇게 시작부터 잘 맞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았으니까.
아나스타샤 역시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녀는 거기에서 곧바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운명이라 생각하면서…… 조금만 해 볼까요?”
“해 보자고요?”
“제가 퀸텟을 한 곡도 해 본 적이 없다 보니…… 그렇다고 이야기만 하다가 가면 시간이 아쉽잖아요? 그래서 살짝 연습해 왔거든요.”
“…….”
이미 아나스타샤에겐 여러 번 놀라서 어지간해선 놀랄 생각이 없던 게오르기는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주어진 시간이라고 해 봐야 이틀밖에 안 되었다. 첫 만남 이후 이틀 만에 있는 회의에선 프로 연주자들이라 하더라도 합주엔 큰 기대 없이 곡 선정만 하고 갈 생각으로 참가한다. 일단 곡이 정해진 뒤에야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미리 연주할 만한 곡이라면서 연습해 왔다고 한다. 물론 곡 전체를 하진 못했을 테고 잘 해 봐야 1악장의 일부분 정도겠지만, 그것만으로도 게오르기가 보는 아나스타샤의 평가는 한 단계 더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원래 그렇게 준비를 잘 하는 편입니까?”
“아뇨? 전 별로. 대신 제 친구가 정말 성실하죠.”
“……?”
“전 그 애에게서 배운 것뿐이에요.”
대체 어떤 친구를 두었길래 이렇게까지 하는진 모르겠지만, 게오르기는 준비된 아나스타샤와의 합주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당장 하죠.”
악보를 준비하고 악기들을 튜닝한다.
드보르작의 피아노 퀸텟 2번은 과거 연주 경험이 있다. 때문에 스푸마토 콰르텟은 빠르게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피아니스트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챙겨 온 악보를 들고는 피아노 앞에 가 앉았다. 교복을 입은 학생의 모습이지만 지금만큼은 그 어떤 누구보다 믿음직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시작할게요?”
자리를 잡은 게오르기와 다른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나스타샤는 천천히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물결처럼 리듬감 있게 피아노의 소리가 밀려온다. 곧 첼로가 그 위에 선율을 길게 이어 붙이며 노래한다.
가장조로 시작되며 목가적인 분위기를 그려 내던 음악은 어느 순간 묘하게 조성이 뒤틀린다.
그리고 바이올린 두 대와 비올라가 동시에 따라붙으며 5대의 악기가 열정적인 화음을 터트린다.
‘……이게 살짝?’
피아니스트에겐 그리 어려운 기교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겨우 하루이틀 만에 준비해 온 연습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나스타샤는 정확한 템포로 연주하며 퀸텟의 균형을 잡아냈다.
그 와중에도 섬세한 아티큘레이션이 굉장히 돋보인다.
어떠한 심도 깊은 연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아나스타샤의 천부적인 재능과 음악성에서 드러나는 연주였다. 다른 입김이 닿지 않은 이 음악이야말로 진짜 천재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었다.
옆에 있는 다리아의 연주로부터 감탄이 드러난다. 그녀는 한층 더 연주를 과열시키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게오르기는 그런 그녀를 조금 추스르다가, 다음 순간 확실한 타이밍에 맞추어 폭발시켰다.
악장 지시 레지에로leggiero. 즉 경쾌하게 연주하라는 지시에 맞추어 마치 타란텔라처럼 피아노가 춤추고 이어서 바이올린 두 대가 그 타란텔라를 이어받는다.
리듬 자체가 어렵진 않지만 템포가 불분명하면 순식간에 무너질 만한 구간이었음에도 다섯 명의 연주자들은 한 번의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게 연주를 마무리 짓고 1차 클라이맥스에 방점을 찍었다.
그대로 더 화려하게 나아가나 싶던 연주는 아나스타샤의 중단으로 멈추어 섰다.
“…….”
모두가 그녀가 그 즈음에서 멈출 것이라는 걸 은연중에 인지하고 있었기에 거의 동시에 연주를 멈추었다. 단 한 번의 합주였는데도 이미 굉장히 많은 부분을 음악적으로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콰르텟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시간이 없어서 여기까지밖에 못 봤어요.”
“…….”
3분이 조금 넘는 연주였으니 총 40분에 가까운 이 드보르작 피아노 콰르텟 2번의 아주 작은 일부분밖에 안 된다. 리허설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긴 하다.
하지만 이 짧은 시간에 아나스타샤가 준비해 온 음악과, 스푸마토 콰르텟이 오랜 레퍼토리를 되살려 한 첫 합주를 돌이켜 본 게오르기는 한 달 후의 무대가 벌써부터 눈앞에 그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