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40화 (740/1,277)

##  740화

게오르기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런 말 많이 들었겠지만, 아나스타샤. 정말 천재 아닙니까?”

세간에선 에르네스트나 타티아나를 새로운 세대의 천재들이라 칭송하고 있다.

본래 게오르기는 천재라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굉장한 부담과 편향적인 기대 등이 담긴 말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나스타샤를 그 외에 어떻게 칭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약간의 평정을 잃은 그 칭찬에 아나스타샤는 차분히 대답했다.

“많이 들은 적 없어요. 절 천재라 해 준 건 그 애뿐이니까.”

“……그 애?”

“음…… 얼마 전까지 조금 슬럼프였거든요. 그 전에도 중앙음악학교에선 겨우 그럭저럭인 실력에 불과했고요.”

“그럴 리가. 그 실력에 그럭저럭? 전 중앙음악학교가 아니라 모스크바 음악원의 학생들과도 여러 번 합주해 본 적이 있습니다. 거의 그에 비견된다고 판단되는데.”

게오르기는 모스크바 음악원 입학처장은 아니지만 조기입학을 해도 충분한 실력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계속되는 극찬에도 아나스타샤는 으레 그 나이 아이들이 보여 줄 법한 반응을 보여 주지 않고 가볍게 웃어 보였다.

“너무 띄워 주신다.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능숙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면서 게오르기는 많은 것을 느꼈다.

그녀의 모습은 어른스럽기도 했고, 또 진짜 천재들을 보고 좇는 사람의 반응이기도 했다. 저절로 그녀 주변의 여러 상황들이 떠오른다.

연주 전에 언급했던 성실한 친구, 그리고 그녀를 천재라 해 주었다는 아이가 아나스타샤에게 영향을 많이 준 동일 인물이라는 것 정도는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누구일지 곰곰이 생각해 본 게오르기는 며칠 전 함께 봤었던 그녀의 친구 두 명을 떠올렸다.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

처음 게오르기는 세 사람에 대해 잘 모르고 굉장히 단적인 생각으로 아나스타샤가 타티아나에게 일종의 경쟁심을 품고 있으리라 예상했다. 현 시점에서 에르네스트라는 피아니스트의 듀엣 파트너 자리는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종합적으로 보니, 어쩌면 모든 가정이 다 틀렸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

어떤 이유로 첫 기획이 갑자기 변경되면서 아나스타샤가 들어왔는진 여전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깊게 들어갈 부분이 아니라는 직감이 든 게오르기는 더 이상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세 피아니스트의 일에 흥미 본위로 기웃거릴 이유는 없었다.

대신 그는 주어진 조건에 감사하기로 했다. 어쨌건 아나스타샤는 그들과 같은 음악을 하게 되었고, 충분한 실력과 의욕을 가지고 있었다. 잘 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생긴다.

게오르기는 바이올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거…… 처음 기획대로라면 별 생각 없이 하던 음악이나 할 생각이었는데, 아나스타샤가 합류하니 욕심이 많아지는군요.”

본래 콰르텟으로만 했다면 아마 이미 수십 번도 더 무대에 올렸던 레퍼토리만 올려서 가을 연주회를 안정적으로 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퀸텟을 하게 되니 일단 익숙한 곡이 그리 많지도 않았고, 새롭게 하더라도 아나스타샤와 함께 굉장히 훌륭한 연주를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게오르기는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여러 곡들을 떠올리다가, 그 곡들을 무대에 올려 최종적으로 나올 연주회를 그려 보기도 했다. 수많은 연주회를 거쳐 온 게오르기는 한정된 인원과 구성으로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연주회를 할 수 있는지 감각적으로 잘 파악하는 편이었다.

“우리가 2부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그는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일전에 듣기론 듀엣을 2부로 하면서 피날레를 강렬하게 장식하기로 정했다고 했다. 대체로 청중들은 오래된 콰르텟의 연주보단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듀엣에 열광하기 마련이다.

실력의 차이가 문제가 아니라 흥미를 끌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많은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그림이 필요했다.

스푸마토 콰르텟은 실력 좋은 베테랑으로 이름이 자자하지만 에르테스트와 타티아나가 이룰 듀엣과 비교되는 그림은 나오지 않는다.

때문에 매년 하는 이벤트성이 짙은 가을 연주회에선 노골적으로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따로 놓아도 실력이 탁월하며 스타성이 넘치는 피아니스트들이기도 했고.

“한 번 봐야겠는데.”

본래 게오르기와 멤버들은 그 구성에 딱히 이견이 없었다. 1부에서 있는 실력을 견고하게 보이고, 2부는 듀엣으로 마무리. 그렇게 납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와 함께 하는 것으로 결정되고 그녀와 합을 몇 번 맞춰 보고 나니, 퀸텟이 2부로 가서 마무리 짓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피날레를 그냥 넘겨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강하게 들었다.

“…….”

다시 연주자들이 모두 모여서 회의를 할 때, 정식으로 알렉산드라에게 제안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게오르기는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화부의 입김이 많이 닿아 있다고는 들었지만, 아나스타샤의 합류처럼 다른 변경이 더 있다고 하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 같진 않았다.

게오르기가 그렇게 차후 구성을 생각하며 아나스타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의문이 생겼는지 살짝 손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저기,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요. 처음 기획이라는 게 뭐예요?”

게오르기가 혼자서 중얼거린 이야기를 들은 아나스타샤는 의아해할 만도 했다.

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처음 기획은 콰르텟과 에르네스트, 타티아나까지 6명의 구성이었다. 게오르기는 있는 그대로 말해 주려다가 멈칫했다.

문화부와 연주회 관계자들 사이에서 어떤 결정이 있어서 아나스타샤가 들어오게 되었는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에르네스트의 선생인 구세프의 추천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기억이 났다.

그 선생은 왜 아나스타샤를 끼운 걸까? 물론 실력이 뛰어나니 좋은 무대에 올려 보내서 경력을 쌓고 이름을 알리게 하고픈 건 확실히 이해하겠지만, 게오르기는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학교 내의 어떠한 복잡한 역학관계는 아닌 것 같지만, 미묘한 신경전의 분위기가 살짝 느껴졌다.

“……그건 저도 잘.”

그런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들쑤시는 것처럼 이야기할 순 없었다. 지금 이 좋은 분위기를 깨고 싶지도 않았고.

그냥 어깨를 으쓱하며 웃고 넘어가면 아나스타샤도 넘어가 주겠지. 그녀가 그 정도 배려심이 없어 보이진 않았다. 알고 있는 걸 말해 주지 않고 음악회를 우선하며 그 배려심에 기대는 건 어른으로서 비겁한 짓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지금은 아무 말도 않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복잡하게 생각하는 게오르기와 달리 첼리스트 솔렌은 대뜸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원래는 아나스타샤가 없이 피아노 듀엣과 저희 콰르텟으로만 진행할 기획이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어떤 이유로 아나스타샤가 추가되고…… 저도 처음엔 이해가 안 갔죠. 굳이 피아니스트를 한 명 더 억지로 끼우는 느낌이었으니.”

“억지로 말이죠?”

솔렌, 제발.

게오르기는 그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대체 그런 말을 해서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비단 게오르기뿐만이 아니어서, 다리아와 카일도 입을 꾹 다문 채 솔렌을 노려보고 있었다. 제발 쓸데없는 이야기 하지 말고 입 좀 닥치라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솔렌은 자신이 느낀 바는 확실하게 말하는 성질이 있는 연주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선택이 탁월했단 생각이 드는군요. 역시 알렉산드라가 괜히 콘서트 디렉터로 발탁된 게 아니에요.”

“알렉산드라가 선택하진 않았을 것 같아요. 그녀는 처음에 절 낯설어했거든요.”

“추천은 다른 누가 했겠죠. 하지만 결국 최종 허가는 그녀가 하지 않았겠습니까?”

“음…… 알았어요. 그녀에게 물어봐야겠네요.”

감사 인사가 아니라 물어본다는 말이 조금 스산했지만 그래도 아나스타샤는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

첫 회의로부터 나흘이 지났다.

두 번째 역시 똑같은 연습실을 대여해서 이루어졌다. 촬영 장비 등이 그대로인 걸 보니 아마 장기 대여를 한 것 같았다. 이 정도 규모의 연습실을 장기 대여하다니, 역시 문화부에서 하는 일이라 가능한 일인 것 같았다.

“교복을 입고 있으니 확실히 학생답다는 느낌이 사는군요!”

촬영 프로듀서 데니스가 호탕하게 이야기하며 다시금 카메라들을 집중시켰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정말로 우리가 학교에서 바로 와서 연습하는 생생한 장면을 담는 것에 흡족해하는 듯했다.

다른 관계자들은 우리가 교복을 입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알렉산드라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진지한 태도로 우리를 대하며 의견을 구했고, 콰르텟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도 우릴 음악학교 학생으로 대우하지 않고 준비된 피아노 연주자로 대해 주었다.

“잠시 쉬어 갈까요.”

30분 정도 회의를 마치자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아나스타샤를 포함한 퀸텟은 저번 연습으로 프로그램도 거의 다 정한 것 같았고, 나와 에르네스트의 듀엣 연주 역시 그렇게 오래 걸릴 일은 아니었다.

때문에 이젠 각자 연습하고 완성도를 높이는 일만 남았겠거니 생각하며 빨대를 입에 물었다.

아나스타샤는 시간이 난 참에 콘서트 디렉터인 알렉산드라에게 묻고 싶은 게 생긴 듯했다.

“알렉산드라. 혹시 곤란한 질문 해도 될까요?”

“곤란……? 뭔가요?”

아나스타샤는 둘만 이야기하고 싶다는 듯 알렉산드라에게 가까이 다가가 소곤거렸지만 살짝 귀를 기울이니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들려왔다.

“제가 이 무대에 서려면 추천이 필요했을 텐데, 혹시 누가 추천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인사를 드리고 싶어도 도무지 누군지 알 수가 없어서요. 선생님도 말씀해 주시지 않고.”

궁금해할 만했다. 심지어 그건 나도 궁금했다.

아나스타샤는 최근 들어 이런저런 성적을 내고 있었다. 그걸 누군가가 눈여겨보고 보증했다는 것 같은데, 궁금해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알렉산드라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건 프세볼로트 장관님께서…….”

“그분은 저 말고 제 친구 두 명만 추천하신 것 아닌가요? 원래 기획대로라면 말이에요.”

원래 기획이라는 이야기에 알렉산드라는 말을 멈췄지만, 곧 다시 이어 말했다.

“나중에 아나스타샤의 이야기도 듣고는 추천하신 걸로 알아요.”

“누구에게 들었을까요?”

“그것까진 모르겠군요.”

직접 문화부 장관에게 가서 어떤 연유로 그런 추천을 했는지 판단 여부를 물어보긴 쉽지 않았다.

물론 아나스타샤가 실력이 엉망진창이라면 문화부 장관이 아니라 대통령에게라도 가서 따져 묻겠지만, 그녀는 숨겨져 있던 진주처럼 콰르텟 모두에겐 물론이고 알렉산드라에게도 평가가 좋았다.

아나스타샤가 워낙에 우수했기에 왜 그녀냐는 물음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 묘한 상황을 이해했는지 아나스타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튼, 믿어 주신 것 감사드려요. 콰르텟분들과 함께 좋은 연주 해 보겠습니다.”

“지난 단체 연습이 꽤 흡족하셨나 보네요.”

“예. 의욕이 생기더라고요.”

퀸텟 연주는 처음일 텐데도 아나스타샤는 어려워하지 않고 잘 하는 것 같았다. 난 흐뭇한 기분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마친 알렉산드라는 곧 그녀도 묻고 싶은 게 생겼는지 에르네스트에게 말을 걸었다.

“에르네스트, 서곡으로 쓸 곡에 대한 생각은 여전한가요?”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그는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대답했다.

“이미 전주는 작곡이 끝났어요.”

“벌써 했다고요?”

“기한 내에 맞춰 보이죠.”

“…….”

“왜 놀라시죠? 제가 분명 2주일이라 말씀드렸을 텐데.”

한 말은 지키는 게 당연하다는 투라서 알렉산드라는 뭐라 할 말이 없는 듯했다. 그녀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당돌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듯 했다.

그 광경을 보던 아나스타샤는 장난스레 웃더니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원래 기획대로라면 피아노 세 대가 무대에 오를 일은 없었을 텐데, 네가 밀어붙이니까 그렇잖니.”

없었던 것들이 자꾸 당연하다는 듯 추가되니 콘서트 디렉터로선 고민이 있을 만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무슨 상관이냐는 듯 다시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고, 아나스타샤는 말하다 보니까 생각났다는 듯 이어 말했다.

“맞네, 생각해 보니까 네가 꼭 그래야겠다고 했었지.”

처음 이 이야기가 나왔을 때 에르네스트는 작곡을 해서라도 방법이야 만들면 얼마든지 있다고 했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때를 떠올리는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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