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41화 (741/1,277)

##  741화

잠깐의 휴식 후 회의는 계속 이어져 갔다.

연주 프로그램 진행 상황에 이어 조금 더 디테일한 부분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기획을 여러 번 해 본 콘서트 디렉터 알렉산드라의 주도로 회의가 진행되었다.

“그렇다면 1부 무대 전환 사이 들어갈 특집이 필요할 테니 그 부분은 데니스에게 부탁해야겠군요. 시간은 최대한 빠르게 해서…… 아니지, 피아노 3대를 옮기는 데 드는 시간을 직접 리허설해 보고 정해야겠어요.”

알렉산드라는 상당히 주도면밀한 성격이었다. 정말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고 완벽하게 딱 맞아떨어지는 연주회를 기획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세 대의 피아노로 연주회의 시작을 연 후에 무대를 바꾸어 퀸텟의 연주로 전환하는 방식에 대한 디테일을 점검하는 도중이었다.

이젠 퀸텟이 된 음악가 집단의 리더라 할 수 있는 게오르기가 손을 슬쩍 들어 올리며 발언했다.

“잠시, 알렉산드라.”

“예. 게오르기.”

그녀가 돌아보자 게오르기는 다시 한번 확인한다는 듯 물었다.

“1부 처음에 피아니스트 세 명이 합주한다고 했죠?”

“그래요.”

저번 주에 이어 이번 주에도 잘 진행 중인 것으로 확인된 기획이었다.

알렉산드라는 손바닥을 위로 해서 그에게 향하며 말했다.

“안 될 것 같다 생각이 드시면 얼마든지 의견 내 주셔도…….”

“아니, 반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걸 지금 반대하는 건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를 무작정 못 믿겠다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죠. 그건 적어도 결과물을 보고 나서 이야기하도록 하고…….”

약속된 시간이 되어서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이 완성되었을 때, 그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반대해도 문제없다는 투였다. 알렉산드라 역시 결과물이 나올 때까진 기다려 주겠다는 입장이었으므로 지금까지와 별다를 건 없었다.

게오르기가 말하고 싶어 하는 본론은 지금부터였다.

“그 합주 후에 바로 우리 퀸텟이 들어가기로 했는데…….”

“예.”

“그거 순서를 바꿔 보는 건 어떻습니까?”

“순서를요? 어떻게요?”

“그대로 피아니스트들이 이어서 듀엣을 연주하고 2부를 퀸텟이 맡는 겁니다. 그게 무대 전환에 드는 시간도 줄일 수 있겠죠. 안 그렇습니까?”

두 번째 회의를 진행하면서 우리가 그려 놓은 청사진은 세 대의 피아노로 연주회를 시작한 후 퀸텟으로 1부를 마무리 짓고, 2부는 피아노 듀엣으로 채우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나와 에르네스트는 문화부 장관의 추천으로 이 가을 연주회에 초청된 것이라서 그 피아노 듀엣에 대한 이견은 아예 없다시피 했다. 2부 피날레에 위치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게오르기가 처음으로 반대 의견을 낸 것이다.

알렉산드라의 눈가가 살짝 움찔거렸다. 잠시 게오르기를 바라보던 그녀는 물병을 들었다가, 마시지 않고 도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시간을 줄일 수 있는 건 맞겠죠. 피아노 한 대를 빼고 남은 두 대를 위치만 조정하면 되니까.”

“그렇죠.”

“하지만 그 순서로는 기존 기획을 또 상당 부분 갈아엎어야 해요. 세 명이 출연했다가 한 명이 빠지고 두 명이 계속 이어서 하게 되면 그림이 완전히 달라지니까.”

“이대로 해도 아나스타샤가 1부 내내 이어서 성격이 다른 장르를 연주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인데요.”

“때문에 1부의 주인공은 아나스타샤인 것이죠. 거기에 문제가 있나요?”

알렉산드라는 딱 잘라 이야기했다. 어떤 기획을 수정한다는 건 꼭 좋은 방향으로만 바뀌지 않는다. 얻어 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분명히 잃는 것도 있는 것이다.

옆에서 지금 오가는 이야기를 가만 듣고 있자면, 지금 아나스타샤가 1부에서 무난히 돋보일 수 있는 기회를 게오르기가 망치려고 하는 것같이 들렸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겨우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죠. 우리 퀸텟에게 2부 피날레를 주면 연주회 전체의 주인공을 아나스타샤로 만들어 줄 수도 있을 겁니다.”

모두가 깜짝 놀라 게오르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주장했다.

아나스타샤를 보니 그녀도 게오르기가 이렇게까지 말해 줄 줄은 몰랐는지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이 가을 연주회의 주역이 누구인지 확실히 정해진 바는 없었지만 대체로 나와 에르네스트의 듀엣을 주역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여기 그것을 정면으로 무너뜨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분위기가 깨어진 것만으로도 회의 분위기는 일변했다.

그만큼 게오르기는 적극적이었다. 만약 그 적극성이 아무 근거 없는 맹목으로부터 나오는 느낌이었다면 모두들 그를 한심하게 생각했겠지만, 그는 분명히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확신하며 세상에 증명하고 싶어 하는 음악가의 눈을 하고 있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그의 확신에 압도되었다.

“그건…….”

“그건 주최의 의도와 벗어나겠죠? 하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언제 그런 사람들 말대로 해서 잘 된 적 있었습니까?”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연주회의 성공을 위한 궁리는 우리 연주자들 같은 현장 관계자들이 잘 안단 말이죠. 전 이번에 보고 느낌이 왔습니다. 확실하게.”

아나스타샤…… 대체 리허설에서 얼마나 잘했던 거예요?

같은 피아노 연주자도 아니고 콰르텟의 리더가 마치 금광을 발견한 광부처럼 확고하게 그녀를 밀어붙이니 할 말이 없어질 정도였다.

멍하니 바라보자 게오르기는 그제야 나와 에르네스트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두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우리라고 들러리만 하고 있을 생각은 없어서.”

아나스타샤를 주역으로 세우고, 당연히 그의 콰르텟도 주역이 된다. 게오르기는 분명하게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만 한 음악이 그들이 이루는 퀸텟 사이에서 벌써부터 어느 정도 형상을 이루고 있음을, 난 직감했다.

“그렇게 나와 주셔야죠.”

“?”

그때, 내 옆에 있던 에르네스트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이런 순간이 올 줄 알았다는 듯, 그는 한마디로 게오르기를 약간 당황시켜 놓고는 날 돌아보았다.

가끔 그가 보이는 허락의 눈빛이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믿으며 동의를 구하는 순간이다.

일단 저질러 놓고 허락을 구하는 건 좋은 습관이 아니지만, 나 역시 그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난 작게 고개를 끄덕여 마음대로 해 보라고 승낙했다.

에르네스트는 다시 게오르기에게 말했다. 당당한 목소리가 테이블 위를 점령한다.

“저희도 분명한 확신을 쥐고 있습니다. 2부에서 완벽한 듀엣으로 연주회를 성황리에 마무리 지을 것이란 확신이요.”

“서로 다른 확신에 차 있다는 건…….”

지금 에르네스트는 게오르기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보다 분명하게 매듭을 짓고 나아가려는 표현이었다.

게오르기도 그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었는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 서로를 잘 모르기 때문이겠군요.”

“그렇죠.”

두 남자 사이에 암묵적 합의가 오갔다.

지금 그들은 각자가 가진 음악으로 연주회의 주역이 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2부 피날레라는 스포트라이트는 단 한 자리뿐. 필요하다면 쟁취해야 한다.

에르네스트는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해 나갔다.

“이 사안은 조금 미루고, 준비가 된 후에 리허설로 결정짓도록 하죠. 본래 상충되는 의견이 있으면 그렇게 조율하지 않습니까? 우리들은.”

먼저 했던 주장을 정확하게 받아들이면서 도저히 물러날 수 없게 하자 게오르기는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혹시 연주 경력이 얼마나 되었다고 했죠?”

“10년은 넘었죠.”

“그래서 그런가, 이미 엑스퍼트로 보이는군요.”

한참이나 어린 10대이지만 에르네스트는 큼직한 연주회 경험도 굉장히 많았다. 때문에 이런 상황을 어떻게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는지 잘 아는 것이다.

그러나 게오르기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당연했다. 나와 에르네스트의 나이를 합쳐도 그보다 적을 테니까.

“그런데 우리도 그보다 길면 길었지, 경력이 짧고 일천하진 않아서.”

낮게 웃던 그는 다시 한번 확인해 왔다.

“그럼 약속한 겁니다? 파트너에게 동의는 구하신 거죠?”

“예.”

“좋습니다.”

그렇게 2부 피날레 자리를 건 듀엣과 퀸텟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정확하게 정해진 바는 아직 없었지만, 서로 한 곡씩 준비가 되는 시점이 아마 리허설로 승부를 내는 날이 될 것이다.

문제가 생기기 전에 완벽한 기획으로 정리를 하는 것도 좋겠지만, 서로 원하는 바가 확실하다면 이렇게 정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았다. 연주자인 나는 이러한 의사결정에 익숙한 편이었다.

그러나 남겨져 있던 콘서트 디렉터의 입장도 우린 생각했어야 했다.

“……두 분, 저에겐 아무 상의도 없이 뭘 멋대로 정하고 있는 건가요?”

“아.”

“똑바로 이야기하세요. 똑바로.”

잔뜩 화가 난 알렉산드라는 쌍심지를 치켜세우며 에르네스트와 게오르기를 압박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감 넘치게 이야기하던 두 남자는 이제야 조금 잘못했다는 생각이 드는지 머뭇거리며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한참이나 이야기를 듣고 난 알렉산드라는 모든 이야기를 정리하고는 타당성이 있는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일리 없는 주장은 아니니까……. 그러면 그 프로그램 리허설 날 장관께서 확인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누구요?”

“프세볼로트 장관이요.”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크게 뜬 게오르기가 알렉산드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들고 있는 서류 위를 탁탁 치며 말했다.

“그분이 직접 보셔야 납득을 하실 테니까요.”

“하, 하하…… 일이 커지네요……?”

“어차피 크게 할 것, 제대로 하죠.”

장난치는 것 아니라는 듯 그녀는 다시 한번 엄격한 목소리로 못 박았다.

“설마 그럴 생각도 없었던 건 아니죠?”

게오르기는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그렇게 연주회 진행에 대한 디테일한 이야기도 보류하게 되고 나니 할 이야기가 없어졌다. 이젠 정말 양측이 음악을 준비해 오면 그것을 보고 판단해야 할 일이었다.

시간이 조금 많았으면 좋겠는데, 아쉬웠다. 하지만 주어진 조건들을 긁어모아서 어떻게든 완성시키는 일은 우리가 늘 하는 일 중 하나였다.

다음 일정을 설명한 알렉산드라는 이쯤에서 회의를 정리하자며 테이블 위를 정리했다.

“그럼 주말에 뵙도록 하죠.”

“수고했습니다.”

“준비할 게 많겠군요.”

“다음에 봅시다.”

모두들 인사를 나누며 일어섰다.

서로 해야 하는 음악이 완벽히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제 내부적으로 경쟁해야 할 일도 생겼으니 며칠 동안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각자 머리가 복잡한 상황이었다.

“아나스타샤.”

게오르기는 막 일어서는 아나스타샤를 살짝 불러냈다.

“오늘은 바로 돌아가려고?”

“그러려고요. 너무 늦기도 했고. 혹시 연습하려고요?”

“음.”

이왕 모인 김에 이대로 비어 있는 연습실에서 합을 맞춰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러나 창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게오르기는 시간을 다시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오늘 이 정도 수확으로 만족하겠다는 것 같았다.

“아니, 우리도 가야지. 그럼 주말에 모이기 전에 시간 돼? 어느 정도 연습이 되어 있다면 같이 확인해 보고 싶은데.”

“아무 때나 좋아요. 이번엔 제가 여러분과 가까운 쪽으로 갈까요?”

“아니, 괜찮아. 우리가 갈게. 그쪽이 편해.”

이제 두세 번 본 것일 텐데도 아나스타샤는 게오르기와 편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회의 전부터 느꼈던 점인데, 이미 말까지 놓은 걸 보니 정말 친해진 모양이다.

난 그런 그녀를 걱정을 놓고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약간 미묘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아나스타샤가 저렇게 아무에게나 사교적인 사람이었던가? 물론 같이 연주를 해야 할 연주자이니 아무 사람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이것도 아나스타샤에게 실례라는 걸 깨닫고는 얼른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지워 버리곤 일부러 에르네스트에게 물었다.

“잘 하고 있는 것 같죠?”

“응? 뭐가?”

“아나스타샤 말이에요.”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돌려 저쪽을 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잘 하겠지. 난 저 애가 밖에서 실수하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어.”

처신을 잘 한다는 뜻일까. 칭찬을 한다면 다른 이야기도 이어 나올까 싶어 에르네스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약간 작게 말했다.

“나한테만 까칠하지.”

“아하하하, 에르네스트가 실수했던 것 아닐까요?”

“지금까지 보면 알잖아? 난 잘못한 거 없다고.”

“무언가 있을 거예요.”

“……나 참.”

편들어 주지 말라는 듯 그는 인상을 썼지만 결국은 한숨을 쉬며 손바닥을 위로 펼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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