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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742화 (742/1,277)

##  742화

회의를 마치고 나와 차에 올라타니 빅토르가 우리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고생 많군요 다들.”

평범한 인사이지만 진심도 어느 정도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교복도 갈아입지 못하고 바로 회의에 참석해서 해가 질 때까지 있었던 우리가 그렇게 편해 보이진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계속 쉬지 못하고 있었던 건 빅토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 대신 아나스타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빅토르야말로요. 소로킨도. 항상 고마워요.”

“고맙습니다.”

에르네스트도 따라 말했다. 예의 바른 두 사람은 확실하게 감사 인사를 전할 줄 알았다.

빅토르는 피식 웃고는 다시 앞을 보며 말했다.

“자택으로 모시겠습니다.”

딱히 묻고 대답을 들을 것도 없이 차는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각자 집에 내려 주기 위해 출발했다.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는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난 그 말소리들을 기분 좋게 듣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미 밖은 어둑어둑하다. 다들 집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테니 어서 돌아가야 할 시간이지만, 난 어쩐지 조금 아쉬웠다.

마음 같아선 같이 저녁 식사라도 하고 가자고 하고 싶은데, 회의로 많이 피곤할 친구들의 시간과 집중을 또 빼앗는 일이 될까 싶어 주저되었다.

다시 대화로 귀를 기울이자 아나스타샤는 회의 때 있었던 테이블 세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까 중간에 뭐 먹던데, 그거 맛있었니?”

“그냥 과자였어.”

“누가 준비해 놓은 걸까?”

“글쎄, 알렉산드라가?”

“그분은 지시를 했겠지.”

“보통 지시한 사람이 준비했다고 하지 않나?”

“그런가?”

테이블 위에 있던 다과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의미 없는 말장난들의 주고받음 같았지만 조금 깊게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지시자와 실행자가 분리되어 있을 때 주체는 어디에 있는가? 비단 회의 테이블 세팅만이 아니라 오케스트라처럼 여러 인원으로 이루어진 집단이라면 생각해 봄직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리 똑똑하지도 않으면서 쓸데없이 깊게 생각하는 나와 달리, 정말로 똑똑한 에르네스트는 이 대화 전반에 숨어 있는 본질적인 주제를 아주 명쾌하게 꿰뚫어 통찰해 냈다.

“배고파? 아나스타샤.”

마치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스스로 배고팠음을 깨달았던 것처럼 아나스타샤는 깜짝 놀라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누가 봐도 순간적으로 속내를 들켜서 당황한 모습이었다.

“어? 응? 아니?”

“저녁때이긴 하네요. 어떤가요? 아나스타샤.”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워하고 있던 나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끼어들어 저녁 식사를 제안했다.

정중앙에 낀 아나스타샤는 나와 에르네스트를 번갈아 돌아보더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왜 다들 나한테만 묻는 거니?”

“배고파 보여서?”

“…….”

에르네스트가 태연하게 대답하자 아나스타샤는 도끼눈을 하고는 그를 노려보았다. 눈치도 없이 이런 공간에서 그렇게 대놓고 물으면 어쩌자는 거냐며 압박을 잔뜩 주는 것 같다.

그런 압박에 에르네스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때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사실 내가 배고픈 것 같기도 하고…… 저녁 식사 하고 갈까? 내가 살게 오늘은.”

“갑자기? 무슨 날이기라도 해?”

“별로. 그냥 그러고 싶어서.”

자기 이야기로 초점을 돌리며 저녁 식사까지 사겠다고 하니 자연스레 식사하러 갈 명분이 확실해졌다.

난 그에게 달리 이야기한 바는 없었지만 내 마음을 읽고 대신 상황을 정리해 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아나스타샤는 배고픈 건 사실이지만 약간 부끄러운지 스마트폰을 들고는 화면을 톡톡 치며 말했다.

“음, 이 근처에서 제일 비싼 파인 다이닝이…….”

대번에 에르네스트가 인상을 썼다.

“그냥 다 없던 일로 하고 집에 갈까?”

“벌써부터 겁먹으면 어떻게 하니? 내가 그렇게 염치없는 사람일까 봐?”

“……마음대로 해라.”

“타티아나, 마음대로 하래!”

말을 꺼낸 게 잘못이라는 듯 에르네스트가 한숨을 쉬자 아나스타샤는 까르르 웃으며 내 팔을 붙잡으며 머리를 기대왔다.

어깨 쪽에 머리를 대고 있는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자 그녀도 눈을 들었다. 어디로 갈 건지 골라 보자는 눈빛이었다.

티격태격하기도 하지만 서로를 잘 배려하기도 하는 두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난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에르네스트의 편을 조금 들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난 작게 소곤거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가요. 부담되잖아요?”

“응. 나도 그러려고 했어.”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아나스타샤가 낮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스마트폰으로 다시 지도를 불러낸 뒤 어딘가 검색해서 띄워 놓고는 그것을 조수석에 있는 빅토르에게 보여 주었다.

“빅토르. 여기로 가 주실 수 있나요? 타티아나랑 오늘 저녁 먹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분위기 파악에 능한 빅토르는 짧게 대답만 할 뿐이었다. 때문에 우리가 어디로 가기로 했는지 알 수 있는 단서는 전혀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장난을 조금 더 이어 가기로 했는지 아예 에르네스트 쪽은 보지도 않고 내게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저번에 크로커스 시티 놀러갔을 때 생각나니? 거기 선상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 했었잖아.”

“기억에 남았나요?”

“당연하지! 얼마나 좋았는데.”

“후후, 다행이에요.”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 마티네 연주회를 도와주었던 것에 대한 보답으로 난 두 친구를 크로커스 시티에 데려가서 선물을 사 주기도 하고, 모스크바 강 위에 있는 레스토랑에 가기도 했었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이야기가 모두 에르네스트를 압박하는 용도로 쓰이고 있단 점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에르네스트도 하고 있다면 파인 다이닝 정도는 각오하라는 의미와 비슷했다.

물론 난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아나스타샤의 장난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맞장구를 쳐 주었다.

에르네스트는 무어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긴 했지만 자기 자신이 한 말도 있는지라 결국 자포자기했는지 정말 마음대로 하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더더욱 신이 나선 존재하지 않는 환상 속 파인 다이닝의 기대치를 마구 높여 나갔다. 한 끼에 10만 루블이나 하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

한참 시달리던 에르네스트는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먼저 내린 아나스타샤가 밖으로 손짓하며 말했다.

“뭐 하니? 안 내리고.”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데?”

“응. 맞아. 교복 차림으로 파인 다이닝을 어떻게 가니?”

“…….”

그제야 완전히 당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에르네스트는 인상을 썼지만 배를 잡고 웃는 아나스타샤를 어떻게 할 순 없었다. 그는 이대로 당장 돌아가고 싶다는 표정을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

레스토랑 문을 열고 들어서니 깔끔하게 정돈된 인테리어가 우리를 맞이했다. 꽤 괜찮은 느낌이었다. 그 잠깐 동안 찾아보면서도 이런 좋은 곳을 찾아낸 아나스타샤가 대단했다.

우린 안내를 받아 창가 자리에 앉았고 곧 메뉴판을 받아 볼 수 있었다. 기본적인 펠메니부터 고급 해산물 요리까지 상당히 다양한 메뉴가 준비되어 있었다.

“전 육류 말고…….”

뭔가 특별하게 먹고 싶단 기분은 아니었지만 에르네스트가 사 준다고 하니 잘 결정해야 할 것 같았다. 너무 신경 쓴 것 같은 메뉴는 되레 그리 좋지 않았다.

겨우 저녁 메뉴인데, 이럴 땐 고민이 길면 안 된다. 난 길게 시간을 끌지 않고 가볍게 바로 결정했다.

“피자로 할게요.”

“피자? 와, 나도 피자로 할까?”

“음…… 이것 맛있어 보이지 않나요?”

“그렇네. 그럼 난 이걸로 할게. 나눠 먹을까 우리?”

“그럴까요?”

이렇게 음식을 나눠 먹는 일은 예절에 맞지 않는 경우이지만, 가족이거나 정말 친한 사이라면 못 할 것도 없었다.

이전부터 난 종종 친구들과 그렇게 하는 편이었고 이젠 아나스타샤도 자연스럽게 다른 메뉴를 골라 두 가지 맛을 맛보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쪽이 정말 합리적이긴 하다.

그렇게 아나스타샤와 메뉴를 정하고 나서 고개를 드니 에르네스트는 메뉴판이 아니라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그래? 너도 피자 먹고 싶니?”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는 옅게 웃더니 메뉴판을 덮었다. 곧 웨이터가 와서 주문을 받아갔다. 나와 아나스타샤는 다른 종류의 피자, 에르네스트는 스테이크였다.

주문을 마치고 나니 아나스타샤는 허리를 쭉 펴며 기지개를 켜더니 웃으며 말했다.

“아까 연습 같이 안 하고 집에 가겠다고 하길 잘 했네.”

“연습?”

“응. 게오르기는 연습하자던 눈치였는데. 오늘은 좀 그래서.”

아나스타샤가 그냥 돌아가겠다고 하니 게오르기는 그녀에게 퀸텟 연습을 강요하진 않았다. 그 상황만 보더라도 난 그 사이에 상당한 신뢰가 이미 자리 잡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저번에 했었던 리허설이 좋았던 걸까? 아나스타샤의 실력이라면 인정받기에 충분했겠지만 직접 보고 싶기도 했다. 다음에 혹시 회의 후에 바로 퀸텟 리허설을 한다면 견학하고 싶다고 해 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아나스타샤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는 에르네스트에게 물었다.

“그런데 있잖니, 에르네스트.”

“응.”

“아까 게오르기와 이야기했던 것 말야…….”

그녀는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쓸어내리더니 눈만 들어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혹시 예상하고 있었던 거니?”

에르네스트는 무엇을 묻는 건지 모르겠다는 투로 반문했다.

“무슨 소리야? 예상이라니.”

“그러니까, 듀엣과 퀸텟으로 이렇게 나뉘는 건 당연했겠지만…… 이렇게 대결 비슷하게 해서 순번을 정하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던 거야?”

아까 전 회의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게오르기는 알렉산드라에게 정식으로 퀸텟을 2부 피날레로 옮겨 달라 요청했고, 거기서 에르네스트는 테이블 위에서 회의로 정할 것이 아니라 음악으로 정하자며 받아들였다.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상황이라 나 역시 그에게 무언의 동의를 표했었지만, 아나스타샤는 약간 다른 의문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난 듀엣이 무조건 뒤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니? 약간 기뻐하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게오르기가 욕심을 부려 주는 건 연주회에 득이 될 일이긴 하니까.”

그의 말대로 리더 바이올린 연주자인 게오르기가 이 가을 연주회에 의욕을 보여 주고 최고가 되고자 한다면 그건 전체적인 퀄리티를 상승시키는 데에 엄청난 도움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의 말만 들어 본다면 원래는 이렇게 될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에르네스트는 테이블 위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리더니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그에게 욕심이 생긴 건 네 덕분이겠지.”

“내가?”

“그래. 첫 회의 때 보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다음에 뭘 어떻게 한 거야?”

나 역시 궁금해했던 부분을 에르네스트가 짚었다. 분명 굉장한 실력으로 콰르텟 사람들을 사로잡았으리라 예상만 할 뿐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그 부분을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아나스타샤는 샐쭉하니 웃으며 거절했다.

“안 가르쳐 주지.”

“……뭔데.”

오늘 저녁 식사까지 사는데 그렇게 박하게 구는 거냐며 에르네스트가 눈빛을 보냈지만, 아나스타샤는 그것을 무시하고는 고개를 숙여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일단 엄마한테 밥 먹고 간다고 메시지나 보내 놔야겠네.”

에르네스트는 불만 어린 표정이었지만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마침 때가 좋았다. 나도 아버지에게 친구들과 식사하고 늦게 들어간다고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냥 메시지를 보내도 되겠지만, 난 어지간하면 전화를 하는 편이다.

“저도 전화드리고 올게요.”

“유리 아저씨한테? 잠깐만, 왜 일어나?”

“금방 올게요.”

친구들과 사석이라고는 하지만 대화 중에 통화를 하는 건 결례다. 난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밖에서 통화를 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떠났다.

***

에르네스트의 시선은 레스토랑 밖으로 나가는 타티아나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친구와 음식을 나누어 먹을 정도로 격의 없는 모습을 보이는가 싶으면, 다들 스마트폰 만지는 일은 예사이니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텐데 전화통화 같은 사소한 부분에선 칼 같은 예의를 보이기도 한다.

여전히 존대를 고집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긴 했지만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의 이런 면모들도 하나하나 기억하며 이해하고자 했다.

“…….”

그때였다.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들었다.

마냥 장난을 치며 웃고 즐거워하던 그녀의 표정엔 묘한 충동이 떠올라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직감적으로 아나스타샤가 무엇을 의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사과를 하는 건 제일 바보 같은 짓이다. 에르네스트는 분명히 깊게 생각한 후에 자신의 판단으로 그녀와 연주회에 함께하는 길을 택했다. 모두 잘될 것이라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다.

그러나 아나스타샤가 느낄 기분을 완전히 무시할 순 없었다. 아직까진 의심뿐인 것 같지만 언제 배신감으로 바뀔지 모르는 감정의 격류가 느껴졌다.

잠시 그녀를 바라본 에르네스트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이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다.

“자.”

“……뭐니?”

에르네스트가 건넨 건 한 뭉치의 악보들이었다. 어리둥절해하는 아나스타샤에게 그는 설명했다.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 네가 준비해야 할 파트야.”

갑자기 악보를 받아 든 아나스타샤는 약간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듯했지만, 이것 또한 에르네스트가 처음부터 기획해 왔다는 걸 떠올렸는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날이 서 있던 눈빛은 피로에 물든 에르네스트의 눈을 보고는 누그러졌다. 그가 어째서 이런 기획을 무리해서 밀어붙이고 있는지에 대해, 아나스타샤는 물어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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