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3화
아나스타샤는 처음 문화부 주최 가을 연주회의 연주자로 초청되었다고 들었을 때를 떠올렸다. 정말 뛸 듯이 기뻤다.
송년 연주회 무대를 보며 같은 무대에 서고 싶다고 생각한 지 1년도 되지 않아서 정말 그 꿈을 이룰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다.
쇼팽 콩쿠르에 나가기 전에 하나라도 더 성과를 만들어 놓으려고 미국 포트워스 콩쿠르에 나가서 상을 받았던 일이 주효했던 걸까? 당시에 인터뷰를 하기도 하고 기사와 뉴스 등에 나오기도 했지만 사실 그렇게 큰 이슈가 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뭐가 어찌되었든 간에 타티아나 그리고 에르네스트와 같은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나스타샤는 자존감의 고양을 느꼈다.
“…….”
하지만 정말 어떤 이유든 상관없는 건 아니었다.
정말 모르는 어떠한 외력에 의해 이 자리에 설 기회를 얻은 것이라면 아나스타샤는 스스로를 칭찬할 수가 없었다.
마냥 좋아해선 안 될 것 같단 의심은 첫날부터 강하게 들었다.
알렉산드라가 친구들을 보던 눈빛과, 아나스타샤를 돌아보던 눈빛은 현저히 그 의도가 달랐다. 그것은 콘서트 디렉터로서 아나스타샤가 정말 믿고 쓸 만한 피아니스트인지 재 보는 눈빛이었다.
연주회를 기획하고 성공시켜야 하는 책임자이니 그렇게 미심쩍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직접 보고 나서야 그런 눈빛을 보인다는 것은 알렉산드라의 판단이나 검토 없이 다른 이유로 아나스타샤가 합류하게 되었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이어서 원래 기획이었던 콰르텟 연주에서 퀸텟으로 바뀌자 쉽게 내켜 하지 않으며 실력 확인을 바랐던 게오르기. 그 외 다른 스태프들의 시선.
그 모든 것들이 각각 분산된 퍼즐들처럼 아나스타샤의 주변을 떠다녔지만 영리하고 예민한 그녀의 신경은 빠르게 그런 단서들을 모아서 결론을 도출하는 데에 그리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그녀 혼자였다면 이 연주회에 초청되지 않았을 피아니스트였다. 그 점은 분명했다.
‘그건 분명하고, 불분명한 건…….’
아나스타샤는 상황을 정확하게 분리해서 판단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관계자 중 누군가가 두 사람과 친한 학생을 물색하다가 아나스타샤를 발견하고 콩쿠르 이력을 확인하고는 적당히 붙여 놓았다면, 기뻐했던 과거에 조금 창피하고 오롯이 피아니스트로서 발탁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약간 울적했겠지만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다.
권한을 쥔 사람들이 지금은 그 정도의 인식으로 자신을 대하더라도 언젠가 바꿔 놓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으니까.
때문에 아나스타샤가 진정 최악이라 생각하는 상황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서로를 잘 알고 친밀하다고 생각하는 타티아나나 에르네스트의 직접적인 요청으로 아나스타샤가 끼워진 상황이었다.
“…….”
일단, 아나스타샤는 그 가능성은 굉장히 낮게 봤다.
아무리 두 사람이 주목받는 피아니스트라 할지라도 아직 열여섯 살의 신예일 뿐이다. 그런데 문화부 주최의 연주회 같은 중요한 자리에 친구를 끼워 달라고 떼를 쓴다고 해서 그걸 관계자들이 들어줄 리 만무했다.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녀는 어째서인지 불안감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근래 에르네스트가 보이는 언행에서 위화감이 종종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
에르네스트로선 분명 타티아나와 듀엣으로만 주목받길 원했을 테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합류가 확정된 이야기를 했을 때 깜짝 놀라며 여러 감정을 보이던 타티아나와 달리 에르네스트는 별로 놀라는 것 같지도 않았고 당연한 듯 받아들이며, 되레 아나스타샤가 세 명의 피아니스트가 한 무대에 서는 것에 대해 비합리적이라 주장하자 그것을 정면으로 받아치며 해 보자고 종용하기도 했다.
도무지 납득이 안 가는 태도였다.
기뻐하는 타티아나 앞에서 마뜩잖아하는 내색을 대놓고 할 수 없었던 것이라기엔, 나중에도 전혀 태도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세 명을 위한 곡을 쓰겠다는 것도 홧김에 한 말이라면 나중에 취소해도 될 일이었다. 타이트한 일정에 그것까지 맞추는 건 사서 고생을 하는 일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아예 콘서트 디렉터 앞에서 다시 한번 그것을 확실하게 못 박고는 실제로 진행 중이었다.
지금 그가 내밀고 있는 이 악보가 그 일부분이었다.
“완성 전에 이렇게 일부만 주고 미리 봐서 문제가 되진 않겠지. 나중에 수정이 있을 수도 있지만, 아마 크게 바뀌진 않을 거야.”
“…….”
아나스타샤는 말없이 손을 뻗어 그 악보를 받았다. 알아보기 좋도록 컴퓨터로 정리된 악보의 출력본이었다.
이 애 요즘 작곡하면서 프로그램도 배운다고 했었던가? 그래도 이렇게 말끔하게 만들 수 있을 줄은 몰랐다.
확실히 이렇게 하면 수정하거나 많이 찍어 내는 것도 쉬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악보를 보던 아나스타샤는 지금 그런 것으로 감탄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눈으로 읽은 음표들은 그녀의 훈련된 음악적 능력을 거쳐 머릿속에서 소리로 변했다.
그 선율의 한 가닥을 느낀 아나스타샤는 이것이 불과 며칠 만에 쓰였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에르네스트의 작곡가적 재능이 어디까지 가 있는진 모르겠지만, 단기간에 떠올린 일시적인 방침이나 허술한 의도로 만들어진 음악이라기엔 너무나 또렷하고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에르네스트, 너 이거…….”
어쩌면 이 애가 날 완전히 바보취급하고 있을지도 몰라.
아나스타샤는 은연중에 그런 불안감을 계속 느끼고 있었다.
진지한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그 둔감한 에르네스트도 결국은 어딘가에서 힌트를 얻었는지 그녀를 의식하는 태도를 보이곤 했기 때문이다.
아나스타샤는 그 부분을 종종 예민하게 느꼈다.
어디까지 확신하는 것인지, 겉보기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점잖게 굴고 있지만 그 속으론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알고 싶다면 서로 품고 있는 감정들에 대해 대화를 해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것을 확인하는 것조차 겁이 났다.
그녀는 스스로에게도 아직까지 확신이 없고 해결책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일단은 피아노로 같은 무대에 서는 것을 무턱대고 목표로 할 정도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판단이 안 서 있는 상태였다.
언젠가 한 번쯤 에르네스트를 피아노로 꺾고 나서 다시 한 번 타티아나를 제대로 돌아봐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할 뿐이었다.
때문에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없었고, 에르네스트의 생각을 의심하며 일방적으로 무언가 캐내려고만 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태연하게 편한 친구를 대하듯 하고만 있었다.
“불만 있으면 이야기하고. 바꿔 줄 테니까.”
“…….”
아나스타샤는 다시 악보를 내려다보았다.
각 연주자들에게 정확하게 선율들이 나누어져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맡은 서드 피아노에게 부여된 것은 초고속의 테크닉을 필요로 하는 스케일이거나 앞서 나온 단락적인 주제를 다시 풀어헤치는 고난도의 패러프레이즈.
보다 감각적이고 세련된 음악성의 에센스를 요구하는 화려한 역할이 주어져 있었다.
오래전부터 그녀의 음악을 지켜봐 왔다는 느낌이 분명하게 든다. 이것이야말로 네게 맞는 것 같다고 추천하는 듯하다.
아나스타샤는 이 추천이 정확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멍하니 악보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에르네스트가 물었다.
“어렵지?”
“……아니.”
“미안. 네가 예전에 곡을 쉽게 쓰라고 했던 걸 무시하는 건 아닌데, 이걸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이 칠 것 같진 않아서.”
“…….”
예전 타티아나에게 써 준 곡을 두고 아나스타샤가 했던 말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
아나스타샤는 조용히 악보를 내려놓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의심은 의심일 뿐이겠지.
이렇게까지 아나스타샤를 이해하고 친구라 생각하는 에르네스트가 설마 그녀의 성격을 무시하고 자존심을 짓밟으면서 들러리로 세우고자 했을 것 같진 않았다.
이 연주회에 초청받게 된 것에 저 애들의 친구란 이유가 꽤나 크게 작용했다는 것은 명백하겠지만…… 직접 끌어들였는가, 아닌가. 그 차이는 정말 중요했다.
그것도 모를 정도로 생각이 짧진 않겠지.
‘네가 날 그렇게까지 바보로 낮잡아 보진 않았으리라 믿어.’
여전히 여러 의구심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하며 치워 나갔다.
운 좋게 콘서트 디렉터보다 위에 있는 연주회 관계자들의 눈에 든 덕분에 추천을 받아 합류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을 일종의 기회라 생각한 에르네스트가 마침 세 명을 위한 곡을 떠올렸으리라.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판단에 마침표를 찍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정돈하고 나니 한결 후련해졌다.
이미 실력은 실력대로 다 보여 주어서 콰르텟에게도 상당한 인정을 받았으니 연주회만 잘 하면 된다.
이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도 에르네스트가 열심히 쓰고 있으니 그 노력에 대한 보답으로라도 연주를 도와주면 될 일. 그 정도는 할 마음이 있었다.
물끄러미 에르네스트를 바라보니 그가 퉁명스레 말했다.
“왜, 불만 있으면 이야기하라니까?”
말투는 틱틱거리지만 내심 아나스타샤가 곡이 별로라고 던져 버릴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웃으며 악보를 갈무리했다.
“불만은 없어. 괜찮은걸? 곡도 난이도도.”
“그럼…… 연습해 볼래?”
에르네스트가 다시 한번 정식으로 요청했다.
여기서 안 하겠다고 할 순 없었다. 그녀는 이미 에르네스트에게 그가 벌이고 있는 수많은 일들을 제대로 해내지 않으면 평생 놀림감으로 삼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은 에르네스트에게 어떠한 동기나 강압이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반대로 아나스타샤에게도 속박이 되었다. 적어도 방해를 하면 안 된다는 속박이었다.
어지간히 큰일이 있지 않고서야 그의 일을 망치면 안 된다.
이 곡은 어떻게 봐도 당장 흠을 잡기 힘든 좋은 곡이니 아나스타샤는 협조적으로 따라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여러 일들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도록.
쿨하게 인정한 아나스타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약속은 약속이니까.”
“고마워.”
“왜 고마운데?”
“……서드 피아노를 맡아 줘서. 세컨드인 타티아나도 기뻐할 거야.”
항상 힘든 내색 전혀 하지 않는데도 피로함이 묻어나올 정도로 무리하고 있는 이유 중엔 역시 타티아나가 차지하는 부분이 가장 큰 것 같았다.
갑작스레 같은 연주회에 합류한 아나스타샤는 본래 같이 연주를 할 계획이 잡혀 있지 않은데, 거기에 피아니스트들만을 위한 시간을 만들어 내서 다 함께 무대에 설 수 있게 한다면 타티아나가 기뻐할 것이란 계산이 제일 앞서 있겠지.
그런 생각까지 들자 웃음이 나왔다.
그냥 신경 쓰지 말고 듀엣에나 집중하지 그랬니. 그래도 그 애는 행복해했을 텐데.
“바보.”
“뭔데 갑자기?”
“그냥, 바보 같아서.”
“그런 바보랑 다음 중간고사 성적 두고 내기라도 해 볼래?”
“내가 널 공부로 어떻게 이기니?”
“어이가 없네.”
아나스타샤도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공부로는 안 된다는 걸 깔끔하게 인정했다.
요즘은 작곡까지 해 대는 터라 음악가로서의 역량은 얼마나 벌어져 있는지 가늠조차 잘 안 된다. 정말 에르네스트는 종합적인 능력에서 한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피아노에서, 아나스타샤는 그의 턱 밑에 칼끝을 겨누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부분을 곧 증명할 날이 오겠지. 언젠가 올 때를 기다리며 아나스타샤는 나이프 끝을 만지작거렸다. 에르네스트는 눈썹을 찡그렸지만 더 할 말은 없는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공부 등을 가지고 이겼다고 생각해 본들 무의미하다는 걸 그도 잘 아는 것이다.
조금 더 퉁명스러워진 그를 보니 웃음이 나온다. 아나스타샤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레스토랑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 애는 왜 저기 저러고 있을까?”
“?”
에르네스트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았다. 그곳엔 타티아나가 멍하니 서 있었다.
전화를 한다고 나갔던 애가 왜 가만히 있는지 모르겠지만, 눈에 띄는 외모인데다가 하필 통행이 잦은 입구 부근이라 그런지 오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타티아나를 바라보고 지나쳐갔다.
저러다가 누가 말 거는 거 아닌가 몰라. 그런 걱정도 들었다. 늘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는 것 같은 심정이다.
하지만 경호원까지 대동하고 다니는 타티아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 일은 없을 거란 현실적인 판단과, 기억을 되찾은 그녀를 어리숙하게 보는 건 실례라는 생각으로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상황을 확인하고는 잠시 주저하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선 입구로 향했다.
그래, 지금 말 거는 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네가 되어야지.
아나스타샤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그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