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44화 (744/1,277)

##  744화

어딜 가든 내 동선은 빅토르를 통해 예고르에게 보고된다. 그래도 난 이렇게 저녁식사에 불참하게 될 때면 늘 아버지나 오빠에게 직접 알리곤 했다.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란 그런 것이라 생각하니까.

“…….”

평소 같으면 전화부터 걸지 않고 메시지를 보내곤 하는데, 오늘따라 전화를 먼저 했더니 두 분 모두 통화 중이었다. 바쁜 일이 있는 걸까.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길 반복하지 말고 조금 기다렸다가 다시 걸어 볼 생각이다. 어차피 주문한 음식도 나오는 데에 시간이 걸릴 테니까.

아무도 연결되지 않은 스마트폰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잘 모르는 거리를 걷는 잘 모르는 사람들. 저마다 각자의 목적을 향해 발걸음을 바삐 옮기지만 그중 몇몇 사람들은 이쪽을 바라보기도 했다.

레스토랑 간판으로 향했던 시선은 곧 내려와 입구 쪽에 서 있는 내게로 향한다.

괜히 입구 근처에 서 있나 싶다. 하지만 자리를 옮기자니 마땅히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다른 곳으로 가면 아나스타샤나 에르네스트가 의아해할 것 같기도 했고.

한 번 더 오빠에게 전화를 걸어 봤지만 여전히 통화중. 딱 1분만 더 기다려 보기로 생각하며 천천히 시간을 쟀다.

내 마음속 시계는 상당히 정확한 편이어서 굳이 타이머 등을 쓸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40초가 지났을 때였다.

거리를 뒤덮는 소음 속에서 레스토랑 문이 열리는 작은 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예민하게 그 소리를 쫓던 나는 그다음에 이어지는 발소리가 어딘가 귀에 익다는 것 역시 파악했다.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느낌이 아니었다. 살금살금 무언가 기획하고 있는 음모의 분위기. 더더군다가 그 목표는 바로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옆을 휙 돌아볼까 하다가 잠자코 기다렸다. 이럴 땐 가만히 기다려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었으니까.

“뭐 해? 타티아나.”

잠시 기다리자 근처까지 다가온 에르네스트의 목소리가 날 불렀다. 난 예상이 맞았음에 기뻐하며 웃었다.

“깜짝 놀랐잖아요. 에르네스트.”

“……전혀 안 놀란 것 같은데. 왜 멍하니 있어?”

나보단 그가 더 놀란 눈빛이었다. 난 다시 거리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가, 천천히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멍하니 있지 않았어요.”

“그럼 뭐 했는데?”

“……야경 구경?”

“그걸 보통 멍하게 있다고 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난 억울했다. 속으로 초를 세면서 멍하게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하지만 그런 이야기로 항변해 봐야 아무 의미 없었다. 난 전화를 하려 했는데 아버지와 오빠 두 분 다 현재 통화 중이라는 사실을 전했다.

“그래서 잠깐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냥 들어오지 그랬어. 전화 이력은 남을 테니까 메시지 하면 되잖아.”

“그럴 걸 그랬나 봐요.”

난 나대로 왔다 갔다 하기 싫어서 기다렸던 건데, 안에서 보고 있던 에르네스트의 입장에선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입구 근처에서 가만히 서 있으니 이상하게 보일 만도 했다. 오죽했으면 나와서 뭐 하고 있느냐고 물어보나 싶다.

어색하게 머뭇거리던 나는 이만 들어가자고 하려 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주위를 휙 둘러보더니 내게 반 걸음 더 다가왔다.

“그런데 타티아나. 혹시 누가 말 걸거나 했어?”

“예?”

“그…… 입구 옆이니까…….”

그는 갑자기 두서없이 이야기했다. 밖에 잠깐 서 있었다고 걱정해 주는 걸까.

입구 근처인 이곳은 통행이 잦은 곳이긴 하지만 내가 나간 뒤로 레스토랑 밖으로 나온 사람은 전혀 없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몇몇 이쪽을 보긴 했지만 아무도 말을 걸어오진 않았다.

만약 내가 아니라 에르네스트가 서 있었다면 알아보고 사인이나 사진 등을 요청한 사람들도 있지 않았을까? 난 그 정도로 유명한 사람은 아니었다.

길게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난 고개를 저었다.

“없었어요. 교복 때문인지 몇몇 분들이 보긴 하셨죠. 이 근처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복장은 아니니, 신기해 보이나 봐요.”

난 고개를 들어 네온사인이 흐르는 간판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내 교복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흔치 않은 교복을 입고 다니다 보면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나름 합리적인 이유를 끌어내어 이야기했는데, 에르네스트는 쉽게 납득했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목 근처를 감싸더니 고민하는 투로 말했다.

“타티아나. 그건 교복 때문이 아니라…….”

“?”

“……네가 가게 앞에 있는 조각상인 줄 안 것 아닐까?”

갑자기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나는 눈만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일반적으로 조각처럼 생겼다는 말은 칭찬이겠지만, 지금 그가 하는 말은 아까 멍하니 있었다는 말에 이은 놀리는 말이었다. 제가 그 정도도 못 알아들을 정도로 보이시나요?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항의했다.

“잠시만요. 그게 무슨 실례되는 말씀인가요?”

“실례? 아, 미안. 농담이었어.”

“미안하실 농담은 하지 말아 주세요.”

한껏 뾰족하게 이야기해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받아쳤다.

“미안하게 될 줄 몰랐어.”

“무슨 변명을 그런 식으로 하시나요…….”

“변명이 아냐.”

“…….”

너무 태연한 태도라서 더 이상 무어라 할 힘도 없었다. 맥이 풀린 내가 한숨을 내쉬자 그는 싱긋 웃기만 했다. 저런 말에 말문이 막히는 나도 참 문제다.

예전부터 느낀 건데 에르네스트는 내가 뭐든 금방 잘 용서해 주리라 믿는 듯한 면이 있었다.

물론 내가 그간 그에게 무르게 대한 적이 많긴 하지만…… 갑자기 후회되려 한다.

하지만 이제 와서 내가 억지로 태도를 바꿀 수도 없는 일이었고. 저번에 한 번 해 봤다가 죄책감에 짓눌렸던 기억을 떠올리면 그냥 지금처럼 대하는 것이 제일 편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다시 스마트폰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걸어 볼게요.”

“그래.”

이번에도 아버지는 통화 중이었다. 사업 건으로 긴 통화 중이신 것 같다. 다음으로 오빠에게 전화했더니 이번엔 신호가 갔다.

잠시 후 전화가 연결되었고 난 반갑게 말했다.

“아, 전화해도 괜찮나요?”

- 하고 있잖아. 무슨 일이야?

장난기가 스민 느긋한 목소리. 나 역시 장난을 이어 나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내 전화가 끝나길 기다리는 친구가 둘이나 있었기에 간략하게 용건만 전하기로 했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저녁식사는 밖에서 하고 가게 될 것 같아서요.”

- 아, 그래? 알았어. 누구랑?

종종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루슬란 오빠는 바로 알아들었다는 듯 말했다. 난 스마트폰을 귀에 붙인 채로 고개를 들어 옆에 있는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그는 내 통화가 끝나길 기다리다가 눈을 마주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입을 열지 않고 제스처로 무언가 전하려 하는 것 같은 모습이 재미있어서 웃음을 터뜨렸다가, 오빠에게 전했다.

“에르네스트하고…….”

- 에르네스트?

그런데 그의 이름을 입에 담자마자 갑자기 느긋했던 루슬란 오빠의 목소리가 일변했다. 가끔 느낄 수 있는 냉정한 면모가 전화 너머에서도 드러났다.

- 그 녀석 지금 옆에 있는 건가?

“예? 예…… 그렇긴 한데…….”

- 그러면 잠깐 나 좀 바꿔 줘.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잠시 생각해 본 나는 오빠가 무슨 일로 에르네스트를 찾는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약간 반항심이 들었다.

“싫어요.”

- 뭐?

“혹시 기다리실까 싶어 전화를 드리긴 했지만, 제가 누구와 식사하는지는 제 자유잖아요?”

다시 관계를 회복한 이후로 오빠가 날 굉장히 걱정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이해한다.

모든걸 처음부터 쌓아 나가야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내겐 그야말로 모든 것이 위험천만하게만 느껴졌을 테니까.

작년에 에르네스트와 트베르스코이 산책로를 돌아다녔을 때도 오빠가 그를 붙잡고 무언가 신신당부했을 때, 내가 아무 말 않고 있었던 건 그 심정을 어느 정도 납득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억을 되찾았음을 알렸는데도 오빠는 여전히 날 두 살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열여섯 살로 인식하지만 여전히 못미더워하거나. 둘 중 무엇이던 간에 날 믿지 않는다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젠 슬슬 믿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럴 땐 내 입장도 곤란하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했다.

“…….”

몇 초간이지만 어색한 전파만이 흘렀다.

왈칵 화를 내며 혼을 내더라도 무언가 말이라도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조용하니까 잘못한 것 같단 생각만 자꾸 든다. 해야 할 말을 했다고 분명히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한 게 아니었을까.

한동안 우물쭈물하고 있자 옆에 서 있던 에르네스트가 이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전화를 달라는 표시였다. 내가 넘겨주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니 그는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결국 난 천천히 그에게 스마트폰을 건네주었다.

“전화 바꿨습니다. 에르네스트입니다.”

그는 깔끔하게 인사를 하더니 이어서 오빠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고 그냥 지금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전부였다.

“연주회 관련 회의 후에 시간이 많이 늦어 제가 식사를 사기로 하고 밖에 나왔습니다. 예. 오스탄킨스키 근처입니다. 아나스타샤도 함께입니다.”

애초에 허락을 받으려 한 건 맞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뭔가 어린애 취급당하는 기분이라 그리 좋지만은 않다.

나도 이렇게 제대로 잘 설명할 수 있었다. 오빠가 에르네스트의 이름을 듣자마자 대뜸 전화를 바꾸라고 해서 화가 났을 뿐이지.

이래저래 억울한 기분이 들어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심지어 전화도 에르네스트의 손에서 끊은 모양이다. 그는 통화를 종료하고는 내게 스마트폰을 돌려주었다.

“자.”

“…….”

조용히 그것을 받아 들고도 뭐라 납득하기 어려운 기분 때문에 한동안 가만히 있자 에르네스트는 쓴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전화 그냥 바꿔 줘도 돼.”

“저는…….”

그도 날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난 살짝 짜증이 나서 입을 열었다.

내가 에르네스트에게 전화를 바꿔 주지 않은 데엔 단순히 철딱서니 없는 반항적인 이유만이 전부가 아니다. 너무 많은 이유가 뒤섞여 있다.

그리고 그중엔 내 앞에 있는 그에 관한 이유 또한 있었다.

오빠가 내는 목소리에서 난 이후 이어질 대화를 짐작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가 괜한 소리를 듣고 틀에 박힌 대답을 해야 하는 그 과정을 강요받는 게 싫었다.

뭐라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를 감싸고 싶다는 생각도 굉장히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그냥 바꿔 주면 된다는 둥 편하게 이야기하는 걸 보니 얄밉다. 한마디 해 줄까 싶었지만, 그가 납득할 수 있게 말한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어쩔 수 없었다. 난 스마트폰을 도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앞으론 메시지로 통보만 할 거예요.”

내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건 알 텐데도 에르네스트는 웃기만 했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모르겠다.

못마땅하단 눈빛으로 올려다보니 그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그래도 연락 안 한다는 말은 안 하는구나.”

“그, 그럴 순 없어요.”

어딜 가든 내 위치와 상태를 알려야 한다는 건 깊게 자리 잡은 의무에 가까웠다. 밤중에 혼자 빠져나와 혼수상태에 빠진 적이 있던 난 연락 없이 걱정을 끼치는 일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가볍게 이야기하는 것 같던 그도 내가 세차게 고개를 젓자 웃음기를 거두고는 약간 미안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럴 수 없다니. 그것도 네 신념 중 하나인 건가.”

“……예?”

“아니야. 자, 들어가자. 아나스타샤가 기다려.”

그리고 그는 레스토랑의 문을 열어 주며 안쪽으로 손짓했다. 난 그 손짓에 이끌리듯 안으로 들어섰다.

혼자 앉아 있던 아나스타샤는 같이 들어오는 우리를 보며 물었다.

“무슨 이야기 했니?”

“별 이야기 아니었어요. 에르네스트가 제게 멍하니 있지 말라고 했네요.”

“전화하러 나간 애한테 무슨 말이야 그게?”

“그러게 말이에요.”

또 괜한 화살이 에르네스트에게 향했으나 그는 반응해 주면 손해라는 듯, 한 마디 대꾸도 없이 물만 마셨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 말도 않으면 재미없다. 나와 아나스타샤는 그의 말을 이끌어내기 위해 장난을 치며 이런저런 대화를 끌어냈고, 결국 에르네스트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우리 대화에 참여했다.

잠깐 그렇게 담소를 나누고 있자 곧 요리들이 나왔다.

“식사할까요.”

1인분의 작은 피자라지만 이렇게 보니 상당히 크다. 아나스타샤도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으나, 곧 나이프로 반절 자르더니 내 접시로 옮겼다.

“자, 여기.”

“아, 저도요.”

레스토랑에서 각자 시킨 것을 교환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겠지만, 아나스타샤와 함께 하니 마치 집에서 파이를 구워선 나눠 먹는 느낌이었다.

홈 파티 같은 걸 하면 집주인이 파이를 잘라주거나 서로 나눠 먹는 일은 흔하다.

에르네스트도 우릴 딱히 이상하게 바라보진 않았다. 약간 묘한 눈빛이긴 했는데, 아마 그도 피자가 먹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에르네스트도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우리끼린 괜찮은데, 꼭 예절 챙긴다니까.

사양하겠다면 억지로 권할 생각은 없었다. 난 가볍게 권한만큼 가볍게 포기하고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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