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45화 (745/1,277)

##  745화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점심에 식당에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면 곧 레슨 시간이었다.

난 미하일 선생님의 레슨실로 향했다. 이번에 준비한 곡은 니콜라이 보리소비치 오브코프의 열 개의 심리적인 회화dix tableaux psychologiques이다.

오브코프는 19세기 러시아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망명해 살았던 작곡가였다.

생전에 그리 큰 유명세와 명예를 얻지는 못해서 벽돌공으로 생계를 꾸리기도 했지만, 그가 남긴 전위적 도전이 가득한 곡들과 새로운 악기들, 그리고 특이한 작곡 표기법 등은 지금까지 연구되고 있다.

굉장히 현대적인 작곡가이기 때문에 아직 다른 클래시컬한 작곡가들의 곡도 제대로 섭렵하지 못한 내가 다루기엔 좀 어려웠다.

그러나 미하일 선생님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나가는 데에 이 오브코프의 현대적 음악도 굉장히 도움이 될 것이라 하시며 내게 추천해 주었다.

선생님이 하시는 그런 추천엔 항상 이유가 있었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 부분을 믿으며 난 이 곡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곡에 파고들수록 오브코프의 작곡 표기법 등에 대한 것에도 흥미가 생겼다.

물론 내가 지금 작곡을 시도할 건 아니지만, 특정한 표기법 등에서 아이디어가 샘솟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오브코프에게서 무언가 얻어내어 내 것으로 취할 수 있다면, 그것을 잘 다듬어서 에르네스트에게 전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고.

저번에 내가 고안해 낸 기호를 그는 요즘도 잘 사용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잘 이해하고 써 준다면 내 입장에서도 의욕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열심히 연습해 온 곡은 선생님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시간을 별로 주지 않았는데도 생각보다 잘 완성해 왔구나. 네 음악이란 느낌이 든다.”

“괜찮았나요?”

“그래. 보통은 악보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기만 하면서 도무지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곤 하는데…… 역시 널 믿었던 내 판단이 옳았던 모양이구나.”

리듬도 화성도 불분명한 이런 현대 음악은 인상파적인 예술기법을 한 단계 더 넘어가서 형이상학적인 무언가를 다루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악보만 따라 연주하면 일단 음악의 형태는 갖춰지는 클래식 음악과 달리 이 곡은 관념적 이해 없이 연주만 하면 완전히 소음이 되어 버리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난 그 부분을 그래도 꽤 빠르게 인지하고는 음악 너머의 무언가를 찾아내어 끌어내려고 애썼다.

주어진 것은 제목과 악보. 나름대로 연구를 하긴 했다.

“제목이 특이하지만 힌트를 많이 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흠, 심리적인 회화?”

“부제들이 잘게 나누어져 있기도 하고요.”

열 개의 심리적인 회화. 사람의 심리와 기저의 무의식에 닿은 흐름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린 음악이다.

그리고 그 제목에 걸맞게 각각 열 개나 되는 단편적인 음악들은 마치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심상을 다루고 있었다.

기이함, 필사적인 노력, 신비, 발산 등의 보편적이지 않은 제목이 붙어 있었지만 그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 그리 어렵진 않았다. 되레 노골적이고 직관적이기까지 했다.

미하일 선생님은 신기한 사람 보는 듯한 눈으로 날 보더니 안경을 고쳐 쓰시며 물었다.

“이해할 수 있었니?”

“예, 표제음악답다고 생각해요.”

“음…… 그래, 네 독서 경험이 깊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그 정도는 이해한다 해도 이상할 게 없겠지.”

어찌 되었건 내가 연주한 곡을 방금 들으셨으니 내 이해가 잘못되어 있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아실 것이다. 선생님은 이쯤 하면 된 것 같다는 듯 턱 부근을 만지더니 내게 물었다.

“이 정도면 만족하니?”

“……선생님이 듣기엔 어떠신가요?”

연습한 곡이 어디까지 완성되었는지, 미비한 곳은 있는지 의견을 구하기 위해 레슨을 청하는 것이다. 그런데 미하일 선생님은 그 부분에 대해선 크게 할 말이 없는지 짧게 말했다.

“이 곡은 네가 판단해서 마무리 짓는 게 낫겠구나.”

“…….”

보통 다른 선생님들은 권위를 생각해서라도 이렇게 학생에게 맡기지 않는다. 맺고 끊음을 확실하게 하는 분들이 훨씬 많다는 걸 난 잘 안다.

하지만 미하일 선생님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내가 이루어나가는 음악 활동이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그리고 자체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 그런 부분에만 관심이 많으셨다.

내가 기억이 없을 때부터 봐 오셔서 그러신 걸까, 아니면 다른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똑같으실까.

잘 모르겠지만…… 선생님이 날 믿고 판단을 넘기셨다면 나 편하자고 대충 매듭짓고 넘어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나는 다시 피아노 건반을 눌러 보았다. 오브코프가 주로 사용하는 음계를 천천히 펼쳐 보인다. 반복되지 않는 반음계 톤은 기이하게 뭉치며 소리의 구름을 이룬다.

약간 이해한 것 같은데 지금 시간을 들여 더 파고든다고 해서 저 구름에서 비나 눈을 뿌리고 번개를 치게 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조금 더 연구가 필요했다.

다시 한번 내 실력을 점검하면서 심사숙고한 뒤, 난 선생님에게 말했다.

“오브코프의 곡은 제가 혼자서 조금씩 연습해 보고, 다음에 또 다른 곡을 들려 드릴게요.”

지금 여기서 한 단계의 완성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천천히 시간을 들여 조금씩 다루어 볼 생각이다. 자유롭게 맡겨 주신다면 알아서 해 보겠다는 뜻이었다.

선생님은 길게 묻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 알았다. 그러면 이다음은…… 하이든으로 가 볼까?”

“하이든이요?”

“왜, 갑자기 시대를 뒤로 건너뛰니 혼란스럽니?”

“음…… 조금은요.”

이번 10학년 1학기는 미하일 선생님이 현대 음악 커리큘럼을 만들어 오셔서 이것저것 공부하게 되리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바라보니 선생님은 차분히 설명해 주셨다.

“이것도 필요한 연습이란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온갖 시대의 곡들이 모두 나오는 만큼 유연한 적응력이 굉장히 중요하지. 물론 네 레퍼토리가 고전부터 현대까지 모두 아우르고 있다는 건 잘 알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그 강점을 잘 써야 한다고 생각한단다.”

보통 한 시대에 천착하게 되면 그 분위기에 휩쓸려서 다른 음악에 적응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심지어 어떨 땐 그 시대에 사는 인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까지 한다.

쇼팽 콩쿠르처럼 한 작곡가의 곡만 다룬다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내가 나갈 퀸 엘리자베스에선 그렇게 시대에 매몰되지 않고 되도록 다채로운 음악성을 보이는 쪽이 유리한 모양이다.

그리고 미하일 선생님은 음악에 집중하는 것도 좋지만 한 발자국 물러서서 유연하고 자유롭게 음악을 다루길 바라는 분이기도 했다.

선생님이 어떤 방식으로 날 가르치고, 또 배워 나가길 바라는지 아는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 알아줘서 고맙구나.”

“그럼 하이든 다음엔 다시 현대음악인가요?”

“내가 그렇게 단순하게 널 가르치진 않을 거란다. 아마 너도 처음 들어 볼 황당한 곡을 갑자기 던져 줄지도 모르지.”

번갈아가며 고전과 현대를 넘나들기만 하면 그 또한 패턴이 생긴다. 때문에 선생님은 완전히 나를 혼란에 몰아넣을 생각이신 것 같았다.

다른 학생들이었다면 아마 살려 달라고 빌지 않았을까?

하지만 난 웃으며 받아들였다.

“후후, 어쩐지 기대되어요.”

선생님은 내가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는 듯 만족스럽게 웃으며 다음으로 레슨할 하이든의 곡을 알려 주셨다.

레슨도 끝나고, 다음 곡도 정해졌다. 오늘 내게 주어진 시간은 슬슬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미하일 선생님은 시간을 확인하시고는 물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하고…… 연습은 에르네스트와 할 예정이지?”

“예. 그리고 다른 연습실을 빌려서 아나스타샤도 같이 하기로 했어요.”

“그래,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을 쓴다고 했지…….”

아직 그 음악을 들어 보신 적 없는 선생님은 무언가 상상하시는지 천장 부근을 바라보시더니, 천천히 날 돌아보며 말했다.

“에르네스트가 그렇게 잘 될 줄은 나도 몰랐구나.”

“예?”

중요한 무대인데 도전적이라거나, 무리를 한다거나 하는 평이 나올 줄 예상했던 나는 약간 놀라서 되물었다.

잘 되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미하일 선생님은 오래 전부터 구세프 선생님과 함께 에르네스트를 봐 왔던 분이었다. 때문에 나와는 다른 감회를 느끼시는 듯했다.

“에르네스트는 본래 약간 특이한 고집이 있는 아이였지. 구세프는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엄격한 클래식 음악가로 교육시켰지만 종종 어려워하기도 했었단다. 천성이란 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듣고 보니 그 말대로였다.

에르네스트는 겉으로 보기엔 완벽에 가까운 클래식 음악가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조기 진학하라는 스카우트를 몇 년째 뿌리치며 음악학교에 남아 있다가 이번엔 작곡에 도전한, 독자적인 커리어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봐도 평범하진 않다.

그런 면모는 지금도 조금씩 보인다. 깜짝 놀랄 정도로 어른스럽게 사람들을 배려하는가 싶으면, 생각처럼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진 않는다거나.

굳이 할 필요 없는 것을 하려 한다거나. 가끔 묘한 고집을 보일 때가 있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서 늘 납득해 버리곤 하지만, 종종 그에게 휘둘리기도 한 나는 지금 선생님의 평에 전적 동의했다.

내가 이해한 것 같자 선생님은 크게 웃더니 이어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 특이한 고집이라 생각했던 부분들이 이렇게 좋은 방향으로 그 아이를 발전시켜 나갈 줄은…… 우리 선생들도 미처 몰랐단다.”

이야기는 에르네스트를 향했지만 그 시선은 정확하게 내게 향하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난 선생님이 에르네스트의 성장에 내가 기여하고 있음을 짚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그런 확신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았다.

난 약간 당황해선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어떤 말씀이신진 이해했지만…… 오해예요. 전부 에르네스트가 할 수 있었던 것들을 해낸 것뿐일 거예요.”

“하하하, 그런가.”

“제가 그 아이에게 어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하려니, 내가 한 것들이 없진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천방지축이었던 그를 조금 얌전하게 만들어 놓기도 했고, 그 후에도 작곡가로서 성공적인 첫 발을 내디딜 수 있도록 응원하기도 했으니까.

내가 그에게 여러 가지를 받았던 것처럼, 나 역시 그에게 영향을 끼쳤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잘 알고 있는 일이고, 정말 기쁜 일이다.

하지만 갑자기 이런 말을 들으니 조금 부끄러웠다. 난 모르쇠로 나서기로 마음먹고는 말을 돌려 버렸다.

“저도 자꾸 이상한 말을 하게 되네요. 아무튼 앞으로도 에르네스트는 잘 해낼 거예요.”

“그래, 알았다. 나도 괜한 소리를 했구나.”

미하일 선생님은 별 의미는 아니었다는 듯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난 가방을 챙겨 들고 일어섰다.

“이만 가 보렴. 다음에 보자.”

“안녕히 계세요.”

인사하고 뒷걸음으로 나와 레슨실 문을 닫았다. 여러 소리가 메아리치는 복도에서 잠시 있던 나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교내에 몇 없는 피아노 듀오 연습실. 그중 한 곳은 거의 매일 우리가 사용하는 곳이었다.

“왔어?”

“…….”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에르네스트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보면대 위의 악보에 무언가를 적어 넣고 있는 중이었다.

저 악보엔 내가 그에게 허락했던 기호도 들어가 있었지. 그것 말고도 내 목소리는 얼마나 들어가 있지?

그의 얼굴을 보니 반가웠지만, 방금 전 미하일 선생님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각나서인지 어쩐지 밝게 인사하기가 약간 어색했다.

에르네스트는 의아한 듯 내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뇨, 아니에요. 연습하죠.”

난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하고 얼른 그 옆에 가서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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