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46화 (746/1,277)

##  746화

그간 에르네스트는 작곡에 상당한 집중력을 기울이고 있어서 듀엣 연습은 몇 번 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린 한 번 모일 때마다 정말 확연하게 차이가 날 정도로 급속도로 좋아져 가고 있었다.

지금 이 곡에 대한 숙련도는 모자라지만, 나와 에르네스트가 그간 함께한 시간과 공유하고 있는 음악이 워낙에 많은 덕분이었다.

우리는 연습을 하고자 모이면 길게 이야기를 하지도 않는다.

그냥 서로 연주를 해 보고 짧은 감상을 주고받은 후엔 다시 특정 부분들을 몇 번 다시 맞춰 보면서 완성도를 끊임없이 올려 나갈 뿐이다.

가끔은 곡을 연주하지도 않고 악보를 보여 주며 개선할 때도 있었다.

“이것 좀 봐 줄래.”

에르네스트가 자신의 악보를 내게 보여 주었다.

아직 암보를 완벽하게 하지 못하기도 했고, 우린 서로 협의하며 맞춰 나가야 할 부분이 많았기에 여러 메모가 적인 악보를 필수적으로 지참하고 있었다.

연주를 해 보면서 서로 맞춰 주어야 할 사항이 있을 때마다 기록해 놓은 이 악보는 어떻게 보면 우리 두 사람 사이의 계약서라고 할 수도 있었다.

이 음악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면밀한 조항들이 빼곡하게 차 있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시간을 들여 협상하며 서로 만족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아내어 이 계약서를 완성하고는, 마지막엔 그 전문을 완벽하게 외워 무대 위에서 선보이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약간 가슴이 벅차는 기분이 들다가도, 객관적이고 사무적 태도를 견지해야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협상에서 밀리면 안 될 테니 말이다.

“…….”

그런데 상대가 이렇게나 양 측이 원하는 바를 잘 이해하고 있다면 달리 더 할 말이 없기도 했다.

저번 연습을 마친 뒤 집에서 혼자 조금 고민했던 부분들을 에르네스트는 정확하게 짚어 낸 뒤에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었다.

거기엔 에르네스트 나름의 기호 체계와 메모 등이 그의 생각을 깔끔하게 드러내고 있었는데, 난 그 모든 것을 이해하는 데에 전혀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에르네스트가 제안한 해결책을 이해한 나는 다시 악보를 돌려주며 웃었다.

“제가 너무 빨랐던 거죠?”

“너무는 아니고. 약간?”

그는 별것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사실 이건 내가 전적으로 고쳐 주어야 하는 부분이 맞았다.

가볍게 손목을 흔들며 그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템포를 먼저 가져가 주시겠어요? 따라가 볼게요.”

“알았어.”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피아노 앞으로 돌아앉았다. 나 역시 손가락으로 건반을 스치며 연주를 준비했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했으니 따라 주어야겠지. 그리 어려울 건 없었다.

잠시 후, 에르네스트가 방금 내게 보여 주었던 구간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난 곧바로 건반을 움직여 늦지 않게 그 음악에 합류했다.

악보를 보고 머릿속으로만 떠올리던 음악이 현실에 표현되고, 옆에 있는 다른 피아노의 소리와 뒤섞인다.

그것만으로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음악이 생성되고, 정해진 음을 동시에 연주하더라도 매순간 다른 가치들이 창출된다.

난 온 신경을 집중했다. 단지 귀로만 들어선 부족하다. 두 개의 소리를 완벽하게 캐치하기 위해선 온몸으로 소리의 파동을 느껴야만 했다.

거리와 타이밍 그리고 음악적 견해 차이 등으로 우리의 음악엔 미세한 균열들이 벌어져 있었다. 그 간극을 줄여 나가며 최고라 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 건반을 헤집었다.

1초를 수만 번 쪼갠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가는 산물을 균일하게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내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때문에 지금 가능한 것은 내 자신을 보다 완벽하게 컨트롤하여 이 음악이 완성된 시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내 노력에 호응하듯 에르네스트 역시 자신의 연구가 듬뿍 들어간 균질한 수준의 음악을 연주했다. 쉽게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는 연주였다.

연습은 버벅이지도 길지도 않았다. 단 한 번 맞춰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서로 얼마나 준비해 왔고, 저번보다 얼마나 더 발전했는지 알 수 있었다.

“어때?”

에르네스트가 날 돌아보며 물었다. 내 대답을 이미 다 알면서 물어보는 느낌이었다.

“좋아요. 훨씬 안정되어 있다는 느낌이 드네요.”

“그럼 이대로…….”

“그런데 이런 건 어떨까요?”

분명 저번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들게 좋아졌다. 이 또한 지금 시점에서의 완성된 음악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난 이것이 우리 할 수 있는 완성의 끝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페달을 밟으며 건반을 짚었다. 다만 이번엔 손가락을 방금 전과 다른 방식으로 움직였다. 내 파트가 아닌 에르네스트가 맡은 파트였다.

난 그의 파트의 일부분을 그대로 연주했다. 템포는 유지하되, 그의 해석에 약간 더 색채감을 가미해서.

“…….”

조금 더 어려워졌죠? 하지만 할 수 있잖아요.

연주를 마친 내가 돌아보니 그는 납득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그가 다음번엔 분명히 이보다 더 잘 연주할 것이란 확신을 느꼈다.

그런데 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질세라 손을 뻗었다.

“나도 이렇게 제안하고 싶은데.”

에르네스트는 익숙한 선율을 연주했다. 세컨드 피아노인 내게 맡겨진 부분이었다.

그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포인트를 콕 짚어 내면서 존재감이 확 드러나도록 만들어 냈다. 난 그 음악을 듣자마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작곡가이기에 알 수 있었던 걸까? 역시 둘이서 연구하니 혼자서 하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그런데 지금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이 있었다.

“설마 양 파트를 다 연습하신 건가요?”

“그러는 너야말로.”

“전 원래 이쪽이 익숙해서…….”

난 협주곡을 연습할 때도 총보를 두고 전 파트를 고려하며 음악의 구조를 연구한다. 피아노 듀오 역시 마찬가지로 모든 구성을 고려했을 뿐이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도 그렇게 연습했을 줄은 미처 몰랐다. 가뜩이나 이 곡뿐만이 아니라 작곡으로도 시간과 집중력이 많이 부족했을 텐데……

조용히 바라보자 그는 피식 웃기만 했다.

“우리 둘 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건 알겠네.”

“후후, 그러네요.”

마치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그가 나와의 연주에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 것 같아 무척 기뻤다.

난 다시 악보를 살펴보았다. 겨우 며칠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이 정도의 완성도였다. 암보도 거의 다 되었고. 보다 완벽을 기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무리일 것 같진 않았다.

“이 페이스대로라면 문제없겠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한 곡 더 준비해도 될 것 같은데? 앙코르로.”

“앙코르 잘 안 하시잖아요.”

“할 수도 있지 뭐.”

“여유 있으시네요?”

살짝 사그라들었던 걱정이 다시 고개를 든다. 난 그가 자꾸 이렇게 하나씩 일을 추가하는 것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염려되었다.

“작곡은 잘 되어 가시나요?”

“응. 그래서 말인데 오늘…….”

그가 막 이야기를 하려던 찰나, 어떠한 전조도 없이 갑자기 연습실 문이 벌컥 열렸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아나스타샤가 막 문을 열어젖힌 자세 그대로 우리에게 물었다.

“연습 끝났니?”

난 고개만 끄덕거렸다. 아나스타샤는 갑자기 들어와서 미안하다는 듯 웃더니 이제 와서 노트하듯 문을 손등으로 톡톡 쳤다.

“피아노 소리가 안 들리길래. 중요한 이야기 하고 있던 건 아니지?”

“아, 괜찮아요.”

곡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긴 했지만 대충 마무리되는 시점이었다. 에르네스트를 돌아보니 그도 딱히 방해 받은 건 아니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무튼 이 시간에 우리가 연습 중이란 걸 알면서 찾아왔다면 아나스타샤에게도 무언가 중요한 용건이 있을 것 같았다. 난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냐니?”

“……?”

“에르네스트가 말 안 해 줬니?”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나스타샤는 어이가 없다는 듯 왈칵 화를 내며 에르네스트에게 따졌다.

“네가 모이자고 해 놓고 막상 이야기를 안 하면 어떻게 하니?”

“지금 하려고 했어.”

“나 오고 나서?”

“아니, 너 오기 전에.”

“정말 마음대로네…….”

더 따질 힘도 없다는 듯 그녀는 한숨을 푹 쉬더니 삐딱하게 문가에 선 채로 말했다.

“우리 셋이서 하기로 했던 곡 있잖아. 오늘 연습하러 갈 거야. 괜찮지? 타티아나.”

“셋이서요?”

“우리 같이 해야 하는 곡 있잖니. 이거.”

내가 끝까지 이해를 못 하자 아나스타샤는 내 옆으로 다가와 앉더니 가방을 뒤적여 서류철에 정리된 악보를 꺼내어 보여 주었다.

그 악보의 첫 페이지를 보자마자 난 이것이 에르네스트가 작곡한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내가 본 것은 그의 친필 악보였다. 이렇게 프로그램으로 잘 사보된 악보는 처음이었다.

“악보는 언제 받으셨나요?”

“어? 저번에 패밀리 레스토랑 갔을 때.”

“전 못 받았는데…….”

“……어?”

아나스타샤는 황당하단 소리를 내더니 다시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에르네스트는 지금까지 무슨 말을 듣던 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으나 지금은 실수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소리니 이게?”

“깜빡했네…….”

“깜빡으로 넘어갈 일이니?”

답답하다는 듯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이번엔 정말 에르네스트의 실수였다. 오늘 연습하자고 시간을 잡은 것이라면 적어도 며칠 전엔 내게도 악보를 주었어야 했다. 그래야 연습을 해서 합주를 해 볼 수 있을 테니까.

만약 우리가 서로 잘 모르는 연주자들이었다면 정말 큰일이라 할 수 있었다. 오늘 연습을 못 하는 건 물론이고 내가 화를 내도 무방한 상황.

그러나 난 이 정도 문제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도저히 해결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렇진 않을 것 같으니까. 그의 실수라면 내가 수습해 줘야겠지.

“괜찮아요. 이전에 본 적이 있어요.”

초견으로도 이럭저럭 연주할 수 있었던 곡이었다. 그 때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기도 하니까,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에르네스트도 내가 초견으로 연주한 걸 그 자리에서 본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대수롭지 않게 해결해 주려고 하는 걸 느꼈는지 고마워하는 것 같았다. 난 웃으며 그에게 요청했다.

“그래도 전부 암보하진 못했어요. 악보가 있으시다면 지금이라도 주시겠어요?”

“미안, 여기.”

다시 받아 보니 이번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악보였다. 몇 부 인쇄해서 가지고 다니는 것 같다.

그렇게 연습이 무산될 수 있었던 일을 우리가 자연스레 주거니 받거니 하며 계속 진행하기로 하자 아나스타샤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너희 정말…… 한 번 당황하지도 않는구나?”

당황은 했지만 수습할 수 있었을 뿐이다. 우리 연주자들에겐 이런 순발력 또한 생명 같은 것이기도 하니까.

에르네스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가 볼까? 연습실 예약은 잊지 않고 해 뒀어.”

“그 정도로 제정신이면 타티아나에게 악보를 주고 이야기하는 것도 미리 좀 하지 그랬니?”

다시 아나스타샤 핀잔을 주었지만, 난 그가 신경 써 주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그렇게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 않았다.

한창 할 일이 많아서 걱정이나 생각이 많을 그가 그다지 걱정하지 않고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으로 날 선택해 준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난 그가 믿어 준 만큼 응할 뿐이다.

세 명이 된 우리는 학교 밖으로 나왔다.

학교 내에서 피아노 세 대를 세팅할 수도 있겠지만, 합주 연습실 등에 피아노를 집어넣는 건 일이 굉장히 커지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쉽게 피아노 세팅이 가능한 넓은 연습실을 밖에서 구하는 편이 나았다.

“아, 여기 알지. 제일 넓은 곳 빌린 거야?”

“세팅도 다 되어 있다고 들었어.”

우리가 향한 곳은 근방에서 최신 시설로 유명한 연습실이었다. 공간도 크고 악기들도 준비가 잘 되어 있어서 음악학교 학생들은 물론이고 근처 음대생들도 자주 찾아온다.

우리는 그중 제일 큰 연습실을 대여했다. 그리고 그 안엔 그랜드 피아노 세 대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

“…….”

거대한 피아노 세 대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웅장했다. 정말로 흔히 보기 어려운 구성이다.

비단 나뿐이 아니라 두 사람도 이런 광경은 신기하다는 듯 잠시 주변을 서성이며 피아노들을 살폈다. 해야 할 일을 먼저 이야기한 건 에르네스트였다.

“일단 간단히 해 보자. 아직 다 완성된 곡도 아니니까.”

“앞부분만이라도 제대로 해 놓는 게 낫겠지? 혹시 장관님이 해 보라 할지도 모르니까 하는 거잖아?”

우리가 알렉산드라의 말처럼 프세볼로트 문화부 장관 앞에서 연주해야 할 곡은 듀엣과 퀸텟의 대결이었다.

그러나 이 곡을 일부나마 보여 달라는 요청이 있을 거란 건 불 보듯 뻔한 일이기도 했다.

그중 좌우의 두 피아노에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가 앉았다. 그리고 중앙의 자리는 내게 맡겨졌다.

난 남겨진 피아노를 잠시 지켜보다가, 그 앞에 가서 앉았다. 좌우에서 느껴지는 연주자들의 에너지가 마치 뜨거운 불처럼 느껴진다.

이 연주라면 그 누구라도 납득하게 만들 수 있을 테지. 난 그런 믿음을 가지고 손목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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