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7화
연구와 연습으로 시간을 보내며 끝없이 음악을 갱신하고 완성시켜 나갔다. 만약 영원히 시간이 주어진다면 우린 정말로 이 음악을 무한히 쌓아올릴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시간의 제약은 무대에서나 연습에서나 항상 우리를 옭아매고 있었다.
영원도 무한도 없이 시간은 우리를 속박한다. 난 그 부분이 아쉬우면서도, 우리가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하는 섭리라 생각했다.
“…….”
결과를 보여야 할 첫 시간이 다가왔다.
약속 장소로 움직이는 차 안에서 난 옆자리의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무언가 보고 있었다.
앞으로 우리 일정을 SNS 같은 곳에 올리고 있는 걸까? 스푸마토 콰르텟과 함께 피아노 퀸텟을 이루어 음악을 연주하고, 그것으로 다른 피아노 듀오를 상대한다는 걸 아나스타샤는 이미 완전히 인지하고 그 외의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는 듯 보였다.
나 역시 그리 어렵게 생각하진 않는다.
한정된 무대와 순간의 시간을 낚아채기 위해 늘 경쟁해야 하는 우리 음악가들은 그 상대가 친구라 할지라도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늘 있는 일이며 당연히 받아들일 일이다.
하지만…… 큰 콩쿠르를 앞두고 있는 만큼 이번 콘서트는 편하게 진행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없잖아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에르네스트가 우리 모두를 생각해서 곡을 작곡하고 있기도 했고…….
“뭐 하니?”
“예?”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옆자리의 아나스타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스마트폰을 뒤집어 놓으며 물었다.
나야말로 그녀에게 뭐 하던 중이었냐고 묻고 싶었던 차였는데, 이렇게 역으로 질문을 받으니 무어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하던 행동 그대로 말했다.
“아나스타샤를 보고 있어요.”
“아하핫, 뭔가 예전에 했을 법한 말이네.”
“예전이요?”
“아무것도 아냐.”
그녀는 나지막이 웃더니 아예 스마트폰을 가방 안으로 집어넣으며 내게 사과했다.
“내가 폰 만지고 있어서 심심했구나. 미안, 미안.”
“괜찮아요.”
“그 와중에…… 쟤는 자고 있네?”
가운데 자리에 앉은 그녀는 내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에르네스트가 앉아 있었는데,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몸을 앞으로 숙여서 그쪽을 보니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채 잠들어 있는 게 보였다. 차에 타자마자 말 몇 마디 하더니 조용해졌었는데, 몇 분 만에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모양이다.
우아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훌륭한 소로킨의 운전 솜씨 덕분인지 그는 깨지도 않고 새근새근 잘 자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그 모습이 신기한지 중얼거렸다.
“와, 진짜 신경줄 굵네.”
“피곤하신가 봐요.”
“하긴 뭐 시키지 않은 것도 사서 하다 보면 지칠 만하지.”
요 며칠간 난 주어진 곡들을 연습하는 데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의 모자람을 느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나와 똑같은 수준으로 곡들을 늘 연습해 오면서도 동시에 작곡도 차근차근 잘 진행해 나가고 있었다.
정말 완성이 목전에 다다라 있어서 다음 주 정도면 완성된 곡을 받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에르네스트가 음악가로서 얼마나 천재적인 사람인지 증명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인간의 한계를 쥐어짜는 듯 몰아붙이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 주는 듯한 시간이기도 했다.
난 그것을 몸소 겪어 본 적 있고, 어떤 기분으로 살고 있는지 잘 안다. 때문에 그에게 어떤 말도 해 주기 어려웠다. 그저 옆에서 있어 주고 필요할 때 도움을 줄 뿐이었다.
아나스타샤 또한 말은 매정하지만 에르네스트가 하는 일들에 대한 존중은 분명히 보여 주며 진심으로 협조하고 있었다.
다만 이런 빈틈이 보일 때 장난을 치고픈 마음은 참기 힘든가 보다.
“근데 그건 쟤 입장이지. 안 그러니? 괴롭혀 주고 싶네.”
“하지 마세요.”
“한 번만 찔러 보면 안 될까?”
“아나스타샤.”
괜히 에르네스트를 쿡쿡 찔러 깨우고 싶다는 듯 아나스타샤가 손가락을 세웠다. 난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말렸다.
어차피 약속 장소까진 앞으로 잘 해 봐야 5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적어도 그 정도 시간은 방해받지 않고 편히 자게 놔두고 싶었다.
혹시라도 이야기소리에 잠에서 깰까 싶어 작은 목소리로 아나스타샤를 제지하자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싱긋 웃었다. 난 순간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장난이야 장난. 깨어 있는 애랑 놀아야지.”
“예?”
“여기 있는 애 말야.”
무슨 말이냐고 되묻기도 전에 아나스타샤가 손가락으로 내 옆구리를 찔러 왔다. 간지럼에 약한 난 소리를 낼 뻔했지만 간신히 참으며 반항했다.
그러나 내가 아나스타샤를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워낙에 빠른 그녀를 막을 수도 없었고 차 안이라서 피할 곳도 없었다.
한참 동안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다가 기진맥진해지고 나서야 아나스타샤는 날 괴롭히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녀에겐 장난이겠지만 난 진짜로 버거웠다.
숨을 가다듬으며 자세를 추스르고 나니 볼멘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 교복을 정돈하고 괜히 머리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뭐예요 이게…… 머리 헝클어졌어요.”
“내가 빗어 줄게.”
“…….”
이렇게 병 주고 약 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알아서 하겠다고 하려다가, 어떻게든 사과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 그녀를 위해 머리를 내어 주었다.
아나스타샤는 빗을 꺼내선 내 머리를 빗었다. 방금 전의 손길과는 달리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혼자서 빗어도 될 테고, 도착해서도 시간이 있겠지만 이렇게 차 안에서 아나스타샤가 빗어 주는 것이 난 가장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음악 이야기는 잠시 미루어 놓고 아나스타샤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기도 잠시.
몇 번이나 와서 이젠 익숙하게 느껴지는 주차장에 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소로킨이 백미러로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나스타샤도 이젠 봐주지 않아도 되잖냐는 듯 날 보더니, 곧 에르네스트의 어깨를 잡고 약간 흔들었다.
“일어나, 에르네스트.”
“……?”
잘 자고 있던 에르네스트가 서서히 눈을 떴다. 늘 형형한 눈빛을 하고 있는 그가 이렇게 살짝 풀린 눈으로 상황파악을 하려고 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겨우 십몇 분 정도 잤을 뿐인데도 그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는지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어디야 여기?”
“뭔가 기절한 사람 납치해 온 기분이네…… 정신 안 차리니?”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아서 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미안, 졸려서.”
에르네스트는 중얼거리더니 이대로 있는 건 창피했는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대로 우리만 차 안에 있을 이유도 없었고, 나와 아나스타샤도 따라 나섰다.
밖으로 나와 햇빛을 받으니 비로소 정신이 좀 드는지 에르네스트는 목 부근을 스트레칭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던 난 지금 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바로 알아차렸다.
“에르네스트, 잠시만요.”
“어?”
“머리 빗어 드릴게요.”
빗을 꺼내 다가가자 에르네스트는 슬쩍 물러나며 사양했다.
“그냥 둬.”
“들어가면 다시 손봐 주실 분들이 계시지만, 지금 머리카락이 엉망이에요.”
“……얌전히 잤는데.”
그는 조금 투덜거렸지만 내가 의지를 굽히지 않고 빗을 들고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자 결국은 고개를 숙였다. 좌석에 눌린 옆, 뒷머리가 문제였던 거라 난 그를 뒤돌게 시키고는 여러 번 빗어 주었다.
오래 눌려 있던 건 아니어서 그런지 금방 괜찮아졌다.
관찰력이 좋은 아나스타샤는 주차장 한 곳을 돌아보고 오더니 우리에게 말했다.
“저기 봐. 똑같이 생긴 차들. 관용차 같은데?”
“아, 정말이네요.”
아나스타샤가 가리킨 곳엔 정말 똑같은 검은 차량들이 연달아 주차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이동하실 때 똑같은 차량들이 함께 가는 것처럼 비슷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척 봐도 평범한 사람이 와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지금 이곳에 올 만한 고위 인사라면 한 명뿐이었다.
프세볼로트 문화부 장관.
우린 모두 동시에 같은 사람을 떠올렸는지 서로 얼굴을 바라보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긴장이 안 될 순 없었다. 당장 우리 세 명이 문제없이 연주회 무대에 오를 수 있는지는 오늘 모두 결정될 테니까. 거기엔 문화부 장관의 의견이 강하게 반영될 테고.
하지만 이미 그렇게 모든 것이 걸린 상황에서 우리는 몇 번이나 무대에 서 봤고, 연습한 만큼의 결과를 보여서 사람들을 만족시켜 왔다. 오늘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 우리 모두 잘해서 좋은 연주 보여 주자. 그 결과야 뭐 어떻든.”
퀸텟과 듀오의 순서를 정하는 대결. 중요한 건 그 내용이겠지. 난 전적으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아나스타샤.”
“응. 갈까?”
“예.”
연습실 건물로 들어서자 벌써부터 분위기가 달랐다. 이전까지 봐 왔던 연주회 관계자들이 아닌 빅토르와 비슷한 분위기의 남자들도 몇 명 보였고, 전체적으로 느낌이 많이 경직되어 있었다.
거기에 휩쓸리듯 나 역시 숨이 막혀 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 친구들이 함께 있어서 괜찮았다.
늘 쓰는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서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던 알렉산드라가 우릴 맞아 주었다.
“어서 와요, 타티아나. 에르네스트. 아나스타샤.”
“안녕하세요.”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나서, 난 그녀와 이야기를 하던 사람을 돌아보았다.
희끗한 머리를 뒤로 넘긴 노년의 남성이었다. 넥타이와 슈트 차림의 평범한 모습이었지만 풍겨 나오는 분위기는 결코 힘없는 노인의 것이 아니었다.
이 연습실, 그리고 건물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압력은 바로 이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했다.
알렉산드라는 뒤늦게 소개한다는 듯 손을 펼치며 우리에게 말했다.
“아, 이분이…….”
“프세볼로트 키릴로비치 스체니코프일세. 문화부에서 일하고 있지.”
그 말을 가로채며 프세볼로트 장관이 일어서서 우리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먼저 이렇게 소개할 줄은 몰랐지만, 당황하지 않고 나도 마주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입니다.”
“음.”
그는 잠시 날 바라보더니 인사를 질문으로 받았다.
“날 아는가?”
“……예?”
난데없이 웬 엉뚱한 질문인지 모르겠다. 분명 처음 뵙겠다고 했는데.
이해는 안 가지만 그래도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문화부 장관님이신 것과……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축하 연설을 하셨던 걸 뵌 적이 있어요.”
“아하.”
프세볼로트 장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 그 전엔 조금 바빴으니…….”
약간은 애석하다는 듯 그렇게 혼잣말을 읊조리던 그는 얼굴에 미소를 떠올리며 이어 말했다.
“난 타티아나 양을 그보다 조금 더 전부터 봐 왔네. 송년 연주회에서 아르카디 교수의 추천으로 올라왔을 때 말일세.”
송년 연주회도 문화부 주최였으니 날 아신다고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지나간 이야기를 할 땐 묘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습관이 있는 것 같은 프세볼로트 장관은 연이어 기억을 되살리며 이야기했다.
“그때 타티아나 양과 에르네스트 군을 처음 봤었지. 객석에서 느꼈던 감동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군.”
그렇게 과거로 향해 있던 이야기의 초점이 어느 순간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끄덕임이 멎었고, 그는 날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보여 주겠나?”
“준비해 왔습니다.”
“……분명히 알겠군. 유리 알렉세예비치의 딸이란 걸.”
“…….”
“칭찬일세.”
어떤 의미에서 저런 칭찬이 나왔는진 잘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내 태도가 그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 정도는 확실하게 느껴졌다.
이어서 에르네스트도 짧게 문답을 나누었다. 에르네스트는 훈장 수훈자이기도 하니 프세볼로트 장관과 몇 번 마주한 경험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에르네스트가 특수한 경우다. 나처럼 초면인 건 아나스타샤도 마찬가지였다.
프세볼로트 장관은 아나스타샤를 돌아보며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이야기 많이 들었네.”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이즈마일로바라 해요.”
“그래, 아나스타샤 양.”
무언가 궁금하다는 듯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던 프세볼로트 장관은 우리에겐 묻지 않았던 질문을 그녀에게 던졌다.
“갑자기 이런 연주회에 서게 되어서 부담스럽거나 떨리진 않나?”
그런 상황을 상정한 듯한 질문이었지만, 아나스타샤는 여유로운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기분 좋은 부담감이죠.”
“핫,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은 또 오랜만이군.”
프세볼로트 장관은 껄껄 웃으며 아나스타샤를 칭찬했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아나스타샤는 어떠한 시험을 통과한 것 같았다.
흡족해진 미소와 함께 프세볼로트 장관은 다시 편하게 자리에 앉으며 우리에게도 앉기를 권했다.